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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동초 57회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훈현의 스승, 후지사와 9단의 어록
럭비공소크리(이영주) 추천 0 조회 219 14.03.10 14: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이 어록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짜깁기한 것이므로 실제와 아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_-;;)



"조군은 대단히 취향이 좋다"

한일 천재 소년들간의 국제전화 바둑을 보고 조훈현에 대해 후지사와 슈코가 한마디 남긴 평. 왜 하필 <기재>가 아니고 <취향>이란 말인가? 조훈현이 바둑 외에 잡기에도 능하고 엄청난 애연가였던 것은 <취향>이 비슷한 후지사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실제 이 양반이 내기바둑 한판 두자고 어린 조훈현을 유혹하는 바람에 이 사실을 듣고 노발대발한 대사부 세고에가 한때 조훈현을 파문시킨 적도 있다고 하니... 암튼 이때가 바로 세계 최연소 프로 입단 기록을 지닌 제자와 세계 최고령 우승 기록을 지닌 스승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때였던 듯 하다.



"내가 명인이 된 겁니까? 미안해요. 슈코는 악당이라니까."

제 1기 명인전에서 마지막 대국에서 지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후지사와가 자신이 명인에 등극한 줄도 모르고 잔뜩 술에 쩔어 새벽녘에 집에 돌아와 초대 명인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던 기자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함. 당시는 반집 개념이 없어서 흑 5집 공제룰을 적용했는데 이때문에 비길 경우 백의 승리로 여겼음. 하지만 승률이 같아질 경우 백의 빅승은 평가절하되는 규정으로 인해 결국 동률이었던 오청원을 누르고 후지사와가 명인에 오르게 된 것임. 하지만 당시 흑 5집 공제 규정을 만든 것도 역시 후지사와 본인이라고... -_-



"나는 일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

77년부터 82년까지 당시 상금 랭킹 1위였던 기성전을 6연속 제패. 경륜 도박으로 빚더미에 올라 사채업자들에게 쫓기게 됐을 때 그 좋아하던 술도 일제히 끊고 기성전 준비에 돌입 결국 우승 상금으로 빚을 갚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기성전 우승 상금이 2천만엔이었는데 이 양반 1,2기 우승으로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니 헐.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지 2기 기성전 때는 1승 3패로 가토 마사오에게 밀리자 산책하며 가지가 굵은 나무를 눈여겨 보며 돌아다녔을 정도. 왜? 목매달려고....-_-;; 아무튼 자기 말대로 7전 4선승의 기성전에서 4판만큼은 반드시 이겨왔기에 괴물 슈코라고 불리게 됨.?



"진주가 진흙 속에 있다."

조훈현이 한국에 돌아가버리자 술 한병만 달랑 들고 비행기 타고 찾아올 정도로 정이 깊었던 후지사와 슈코. 당시 일본 바둑과 한국 바둑의 수준 차이가 크게 났었기 때문에 조훈현의 기재를 안타까워하며 한 말이라고...?



"초반 50수까지는 내가 최강"

<처음에 강한 슈코> 라는 별명이 만들어질 정도로 첫 타이틀전에 강했던 후지사와 슈코는 62년 제1기 명인전, 69년 조기선수권전, 76년 천원전, 77년 기성전 등 신설된 기전 제1기의 우승을 휩쓸고 다녔는데 전성기로 여겨졌던 70년대 당시 남긴 말이라고 한다. 암튼 처음, 초반, 일등 이런 말들로 자기 인생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기사였던 건 확실하다.?



"네판만 가르쳐 주겠다."

"세판만 가르침 받겠습니다."

1983년 7번째 기성전. 6번이나 연속으로 기성의 자리를 지킨 후지사와 슈코 앞에 등장한 사상 최강의 젊은 도전자 조치훈. 한 시대를 풍미한 호랑이같은 승부사와 이제 곧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젊은 용이 대결전을 앞두고 주고받은 뼈있는 대화다. 결국 후지사와가 처음엔 자신의 말대로 3연승을 거두며 기성전 7연패를 눈앞에 두는 듯 했지만 생명을 걸고 두는 승부사 조치훈이 기적같은 4연승으로 역전승. 이후 후지사와 슈코는 하락세를 걷게 된다.



"조훈현이 세계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이 필마단기로 출전한 1기 응창기배. 역시나 첫 타이틀에 강하다는 후지사와 슈코답게 일본 대표 가운데 홀로 4강전까지 남아 결승전 예상을 물어보는 기자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결국 조훈현이 당시 일본 최고 실력자들을 줄줄이 물리치며 막강 포스를 자랑하던 섭위평을 이기고 우승하면서 이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물론 자신이 4강에서 탈락한 걸 빼면... -_-;



"만약 기도(棋道)가 100이면 나는 7만 안다"

그토록 호방하던 후지사와 슈코가 기특하게도 말년에는 바둑 앞에 겸손해진걸까?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 전에도 "바둑은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던 사람이다. 술과 담배와 암투병으로 늙고 지친 67세의 나이에 일본 "왕좌"타이틀을 차지함으로써 세계 최고령 우승 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남긴 말이다. 일본 기원이 아마추어 단증을 너무 비싸게 발급한다고 자신이 직접 단증을 발급해버린 사람이 남긴 말이다. 그덕에 일본 기원으로부터 제명까지 당하면서 말이다. 이 양반 아마 사실은 "나랑, 훈현이 외 몇명 빼고 너거는 다 바둑의 1도 몰라 이넘들아~!" 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첫째가 조훈현이고, 두 번째가 마효춘이다."

그가 남긴 말들 속에서 드러나듯이 후지사와 슈코의 조훈현 사랑은 정말이지 지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훈현 역시 애제자를 찾아 서울에 온 노스승의 어깨를 주물러드리곤 했다고 한다. 평생을 한 분야에 종사하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깊은 정을 나눌 상대를 만났다는 것, 그가 국적과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인간과 인간으로 평생을 함께할 상대라는 것을 후지사와 슈코는 알고 있었을까? 처음 그가 조훈현의 바둑을 보고 "조군은 대단히 <취향>이 좋다"라고 이야기했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



"바둑은 운명을 건 예도이다"

후지사와 슈코는 어버이날이었던 지난 8일 오전 7시경 향년 83세의 나이로 도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2002년 후지사와 슈코 9단의 인터뷰, 출처 : 타이젬) ?기사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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