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모든 시조 : 김양희 시인 ♣ -2019년 1월 9일 수요일-
만남의 재발견
엉겨 붙은 핏덩이에 달라붙은 거즈처럼 그 시간 넌 나에게 절실한 필요였지만
흐르던 피 멈추고 나면 떼어내기 두려워
시리아의 밤
사막의 하늘에는 습도 높은 별들이 산다
날마다 올라가는 아기 별 별 어른 별 별
별들아 참혹한 대낮 물을 수가 없구나
소라게
평산 아카데미 옷걸이만 있는 방
배낭을 부려놓고 텅 빈 자리에 누웠다
비로소 내가 이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가구며 가전제품 빼곡히 들어찬 집
좁은 틈에 겨우 끼어 자다 깨다 뒤척였는데
내 거야! 여기던 것들 모두 짐덩이었다
전집 열두 권
지금 소설 속을 맨발로 걷는 느낌이야 이야기를 밟다보면 슬픔은 희석되지 기쁨의 눈물 같은 거 정말 신파라 해도
열두 권 소설책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고 곳간 깊이 숨겨놓은 잘 여문 알곡이지 그렇게 간직만 해도 풍부한 자산이야
잠 속에 비운 뇌 상상으로 채워나가 기억하려 할수록 멀어지는 무의식 말고 자잘한 먹잇감으로 포만감을 노려봐
맨손이 적합할 거야 투명한 맹물처럼 흥미진진한 사건 혹은 담백한 배경 무한히 텅 빈 곳으로부터 시작문은 열리지
♠ 나누기 ♠
김양희 시인의 시조 네 편을 보내드립니다. 시조와 동시조를 함께 쓰는 시인으로 2016년《시조시학⟫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2018년 아동청소년문학 전문출판사 《푸른책들》이 주관하는 <푸른 동시놀이터〉신인상에 동시조가 당선되어 아동문학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시조를 통해 서정과 서사,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작법을 보이는 신예시인입니다. 제목을 보면 이미 그 시의 성패 여부가 판가름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남의 재발견」,「시리아의 밤」,「소라게」,「전집 열두 권」이라는 제목에서 무언가 강한 울림을 예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제목은 그 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남의 재발견」을 보겠습니다. ‘발견’이면‘발견’이지 왜‘재발견’일까요? 그것도‘만남의’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즉‘만남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시의 화자의 말‘엉겨 붙은 핏덩이에 달라붙은 거즈처럼/ 그 시간 넌 나에게 절실한 필요였’겠지요. 어느 시점인‘그 시간’의 정황이 그러했습니다. 그때 너는 나에게‘엉겨 붙은 핏덩이에 달라붙은 거즈’정도이기만 했을까요? 아마도 심정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상처를 다스리는‘거즈’가 등장한 것이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참신하고도 의미심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종장을 보십시오. 한 순간 으스스 전율을 일으키는 결구입니다. ‘흐르던/ 피 멈추고 나면/ 떼어내기 두려워’를 읽으면서 마치 나무마치로 정수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이럴진대 어찌 ‘만남의 재발견’이라고 명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어서 붙어 있다가도 어떤 연유로 떼어내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만남의 재발견」은 그때 닥쳐올 두려움에 대한 내적 성찰의 노래입니다.
시작노트에 의하면「시리아의 밤」은‘이탈리아 베니스공항에서 카타르 도하공항으로 가는 항공로에서 시리아의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면서 지은 시’라고 합니다. 시리아는 내전 중이어서 무고한 목숨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귀한 영혼을 한 편의 시로 위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아픔을 진솔하게 노래합니다. ‘사막의 하늘에는 습도 높은 별들이 산다’는 첫 대목부터 가슴을 치는군요. 내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막은 건조한데 그 하늘에 뜬 별은‘습도가 높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시어‘습도’는 슬쩍 놓은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 시편의 핵심어이지요. 서술어‘산다’와 접맥되어 안타까이 앗긴 목숨이 하늘로 올라가 다시 그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살긴 살되 눈물 머금은 별로 산다는 것이지요. 중장을 보십시오. ‘가끔 올라가는’이 아니라 ‘날마다 올라가는’이들은‘아기 별 별’과 ‘어른 별 별’입니다. 현재 진행형 사태입니다. 묘한 것은 시리아 국기에 별이 두 개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별 별’의 반복이 더욱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아기 별 별’이‘어른 별 별’과 더불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장은 어쩔 수 없이 탄식조로 끝맺습니다. ‘별들아 참혹한 대낮 물을 수가 없구나’라고요. 시의 화자가 어찌‘참혹한 대낮’에 대해 감히 물을 수가 있을까요? 입이 있어도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소라게」는 존재론적 성찰의 시편이군요. 소라게는 몸이 커지면 더 큰 소라껍데기로 이사 간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소라게’에 대한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평산 아카데미 옷걸이만 있는 방’에 들어가서 ‘배낭을 부려놓고/ 텅 빈 자리에 누웠’을 때 ‘비로소/ 내가 이 공간의 주인이 되었’음을 자각합니다. 이때 ‘방’이 곧 ‘소라게’임을 알아챕니다. 다시 공간 이동을 하여 ‘가구며 가전제품 빼곡히 들어찬 집’에서 ‘좁은 틈에 겨우 끼어/ 자다 깨다 뒤척였’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 집에 있는 모든 생활필수품은 ‘내 거야!/ 여기던 것들’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모두 짐덩이’라는 사실을‘평산 아카데미 옷걸이만 있는 방’에 누웠을 때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짐덩이’를‘짐덩이’인 줄 모르고 이고 지고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라게」는 그런 관점에서 사유가 깊은 시편이군요.
「전집 열두 권」은 이채롭습니다. 강인한 골격이 느껴집니다. 흔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내가 그동안 겪은 일, 글로 쓰면 책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거야.’라고 말하곤 하지요.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을까요? ‘지금 소설 속을 맨발로 걷는 느낌이야/ 이야기를 밟다보면 슬픔은 희석되지/ 기쁨의 눈물 같은 거 정말 신파라 해도’라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첫수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열두 권 소설책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고/ 곳간 깊이 숨겨놓은 잘 여문 알곡’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간직만 해도 풍부한 자산이’기 때문이지요. 셋째 수는 도전의식을 자극합니다. ‘잠 속에 비운 뇌 상상으로 채워나가’라면서‘기억하려 할수록 멀어지는 무의식’이 아닌 그 무엇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잘한 먹잇감으로 포만감을 노려’보라고 일러줍니다. 끝수는‘맨손이 적합할 거야 투명한 맹물처럼’이라면서 ‘흥미진진한 사건 혹은 담백한 배경’을 제시합니다. 그 순간 ‘무한히 텅 빈 곳으로부터 시작문은 열리’게 됨을 상기시키고 있군요. 「전집 열두 권」은 지난한 한 평생을 살아온 이라면 그 내면에 아프고도 쓰라리게 혹은 찬란하게 각인되어 있는 남모를 서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환기하는 시편입니다. 그‘보고’가 현재의 그를 만든 역사이자 그의 초상인 셈이지요.
굉장한 이야깃거리보다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상이 흥미로울 수가 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존재의 자잘한 일상, 각각의 삶, 각각의 고통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것을 시로 혹은 수필과 소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기록이 절망의 시간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기에 시인은 세상의 갖가지 아픈 일, 아름다운 일을 농밀한 언어로 직조하기 위해 지난한 담금질을 마다하지 않겠지요. 2019년 1월 9일 <세모시> 이정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