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 박선애
“2학기 제 소망은 정이를 이기는 것입니다.” 별이가 공식적으로 정이에게 도전장을 내놓았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잘 웃고 착한 별이의 평소 성격을 다 알고 있는 데다 마치 초등학생 발표처럼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장난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정이는 2학년 때 전학 왔는데 우리 반 1등이다. 그전까지는 별이가 공부를 제일 잘했다. 학기 초였다면 이 상황을 부담스러워했을 텐데 애들을 아는 지금은 마음 놓고 웃는다. 속으로 시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건강해 보인다. 정이도 한번 해 보자는 듯 소리 내지 않고 빙긋이 웃는 것으로 답한다.
10여 년 전 아파트 단지가 있는 신설 학교에서 근무했다.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사교육을 받았고, 학교에서도 학원 숙제하느라 바빴다. 이미 고등학교 수학까지 마쳐 줬노라고 자랑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아이들도 점수에 민감했다. 그때 3학년인 우리 반 진이는 쉬는 시간도 없이 공부만 했다. 좀 무뚝뚝해서 친구들과 썩 잘 어울리지는 않아도 제 일 잘하고 성적도 좋아 나무랄 데 없었다. 아이들이 진이에게 공책 좀 보여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했다. 진이를 불러 이유를 물어봤다. 그 애들은 놀 때 자신은 애써 정리한 공책을 왜 빌려줘야 하냐고, 자기 공책으로 공부해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부당하지 않냐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깜짝 놀랐다. "그 아이가 네 공책으로 공부한다고 수업 중에 열심히 한 너를 따를 수 있겠냐"라고도 하고, 돕고 나누며 사는 도리를 말해도 끄떡없었다. 한반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으니 이런 말이 먹힐 리가 있겠는가.
그 학교 아이들은 시험 기간이 되면 날카로워진다. 선생님한테도 까칠하게 굴고, 친구들과 서로 다투는 일도 잦다. 시험이 끝나고 정답지를 주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쫓아온다. 수행 평가 결과를 보고 왜 자신의 점수가 깎였냐고 따진다. 이런 것에 시달리기 싫어서 국어 과목에서 마땅히 평가해야 할 글쓰기나 말하기 등을 빼고 단원 평가 시험으로 대신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시험 문제를 실수로 틀렸다고 우느라 밥을 안 먹는 여학생은 여럿이었다. 또 시험 잘 못 본 것을 감독 선생님 탓이라고 부모가 전화로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시험 때마다 문항 내용이나 채점, 감독 자세까지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 아주 긴장했다.
그 사이에 세상은 상대를 끌어내려야 내가 올라가는 입시 전쟁이 더 치열해졌다. 우리 교실은 딴세상이다. 평화롭고 따뜻하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건 아니다. 여학생들은 꽤 열심히 한다. 특히 별이는 소망을 이루려는 듯 시험 기간에 입술이 부르트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서로 경쟁 대상자로 여기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눈치는 아니다. 전학 온 정이가 원래 있던 자신들보다 앞선다고 미워하지 않는다. 정이도 친구들보다 잘한다고 잘난 체하거나 또 눈치 보지도 않았다. 수업 중에 아는 것은 성의껏 대답하고, 친구들이 모르는 것은 알려 준다.
별이와 세희가 지구고등학교(가칭) 입시 설명회에 다녀왔다. 그 학교는 가까운 시에 있는 사립학교다. 교장 선생님은 수완이 좋고 입시 지도를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전임지인 세계고등학교(가칭)에서 근무할 때 중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데려와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좋은 입시 실적을 냈다. 그 덕분에 지구고등학교에 특별 채용 되었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학부모와 학생을 만나러 다니는 모양이다. 그 학교는 기부금을 수억 내는 이사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지원을 충분히 한다고 했다. 체험 학습은 해외로 간다.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몸값이 비싼 유명 강사를 데려다 수업을 연다. 또 인기 있는 인터넷 강의도 듣게 해 준다. 심지어 성적을 올리면 현금으로 바로 보상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을 미끼로 경쟁을 부추긴다니 참 비정하다.
아직 그 세계를 잘 모르는 세희는 자신의 내신 성적을 더 내려가게 할 정이까지 같이 가자고 꼬드긴다. 정이도 무난한 이 지역의 공립학교 대신 거기로 마음이 70%쯤 기울었다. 그 이유를 실적을 올리면 즉시 보상해 주는 제도가 자신을 더 채찍질해서 발전시킬 것 같아서라고 한다. 또 해외로 체험 학습 가는 것도 좋단다.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막연하게 낙관하고 있다. 같이 듣고 온 별이는 망설이고 있지만 세희는 마치 그 학교 학생이 된 것처럼 들떠 있다.
그 교장 선생님 능력으로는 이 근방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얼마쯤은 모을 것이다. 이미 선행 학습을 했을 그 아이들과 사교육을 전혀 안 받은 우리 아이들은 출발선이 다르다. 잘할 수도 있겠지만 노력한 만큼 따라가지 못해 좌절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의 점수가 1점 내려간 것에 안도하고 속으로 웃을 수도 있는 그곳의 정서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