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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장
1.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5.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6.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Salmo 23 (22) * El pastor-anfitrión
1 Salmo de David. El Señor es mi pastor, nada me falta:
2 en verdes praderas me hace recostar; | me conduce hacia fuentes tranquilas
3 y repara mis fuerzas; | me guía por el sendero justo, | por el honor de su nombre.
4 Aunque camine por cañadas oscuras, | nada temo, porque tú vas conmigo: | tu vara y tu cayado me sosiegan.
5 Preparas una mesa ante mí, | enfrente de mis enemigos; | me unges la cabeza con perfume, | y mi copa rebosa.
6 Tu bondad y tu misericordia me acompañan | todos los días de mi vida, | y habitaré en la casa del Señor | por años sin término. 1: Ez 34; Jn 10,1-16 | 4: Job 10,21s.
주님은 나의 목자:시편 23편
정학근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성서학)
https://goo.gl/Kn02M3
들어가는 말
위대한 창조적 유다인 학자이자 사상가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년)은 이스라엘인에게 역사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생활’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곧 이스라엘이 역사의 드라마 안에서 ‘하느님의 동반자’였다는 것이다.1) 실제로 인류를 대표하여 간택된 이스라엘은 이 역사의 드라마 안에서2) 하느님의 동반자가 되어 그분의 현존과 활동에 대하여 응답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응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행동하고 말씀하셨다. 성서는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성서에는 인간에게 주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인간의 응답, 곧 그분께 바치는 인간의 행위 그리고 그분에 관한 인간의 말도 있다. 말을 통한 인간의 응답이 기도로 표현되었다면 행위를 통한 인간의 응답은 계명들과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또는 전례(예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시편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하여 기도로 표현된 인간의 응답이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자료층에서 구약에는 기도를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다. 이 용어는 유배기 이후 시대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우리는 구약 전체 속에서 오랜 과정에 걸친 기도의 발전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초기 단계에서는 기도 또는 하느님에 대한 부름의 극히 짧은 외침들이 있었다. 이러한 짧은 외침들은 먼저 노래로 불리고 기도문으로 쓰였다. 이 기도문이 글로 고착되고 수집되어 예배 때에 사용된 것이 오늘의 시편집이다. 그래서 베스터만(C. Westermann)은 “예배는 시편들을 탄생시킨 보금자리”3)라고 말한 바 있다.
유다의 전승에서 이스라엘 시편집에 있는 150편의 시편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며 동시에 노래다. 이 시편들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흠숭과 감사, 극심한 고통에 떨며 토하는 탄식, 환호에 찬 찬송,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 탄원, 맹세, 신뢰의 표현, 놀람의 표현, 구원받은 자들의 안도, 승리의 환희 그리고 하느님께 거는 말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편 23편은 이스라엘의 한 경건한 신앙인에게서 생겨난 기도이며 노랫말이다. 이 시편은 생겨난 이래 이스라엘 민족성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애송시가 되어 왔다. 앤더슨(Bernard W. Anderson)은 “이 시편은 그 심오한 단순성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켜 왔다. 여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외워 간직하고 어른들이 인생의 난국에 처했을 때 극복하도록 지지했으며,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입술에 평화의 기도가 되어 왔던 시 한 편이 있다. 하느님의 목적만이 뱃속에서 무덤에 이르는 한평생에 의미를 준다고 인간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느님께 드리는 확신에 찬 기도를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한 시는 없다.”4)라고 했고 바이저(A. Weiser)는 “이 시는 그 사상적 특징과 상상력, 그리고 그 속에 표현된 친숙한 종교적 감정 때문에 불멸적 가치를 지닌 시가 되었다.”5)라고 단언했다. 철학자들도 이 시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다룬다고 보고 그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 시편을 두고 “내가 읽은 수백 권의 책도 시편 23편의 이 구절보다 더 많은 빛과 위안을 주지 못했다.”6)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마도 어느 누구도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인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만큼 훌륭하고 간단하게 이 시편을 진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시편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이 놀라운 송시에는, …… 비록 노래하는 이의 영혼이 한순간 개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평화와 위로의 진실이 번득인다.
시편 23편은 시편의 나이팅게일이다. 이 새는 몸집(시의 길이:옮긴이 주)은 작고, 깃털(표현:옮긴이 주)은 수수하며, 그리고 수줍어하며 애매하게 노래하지만,
아! 가슴에 다 담을 수 없이 탁월한 음악적 기쁨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도다.
복되어라, 이 시가 탄생한 날!
이 무슨 연유인가,
한 순례자,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낯선 노래 부르며 세상을 떠도는데,
그 노래 듣는 사람, 온갖 슬픔 잊는구나.
그러므로 노래의 천사는 온 나라 두루 다니며 각 나라 말로 노래를 불러
근심 걱정 몰아내 주는도다. ……
보라, 이 훌륭한 시를! 이 순례자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세상 모든 언어로 말하게 하셨도다. 오묘하도다, 이 시편,
세상 모든 철학 다 합해도 더 많이 슬픔 위로하지 못하였도다.”7)
이토록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격려와 위안을 베풀어 왔고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애송되어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로 기도문이나 성가로 자주 애용되고 있는 이 시편이 지닌 풍부한 내용과 그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먼저 시편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인 시편의 구조와 유형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삶의 자리를 고찰한 다음 본문을 심도 있게 주석할 것이다.
1. 본문과 번역 및 용어 해설
1) 본 문
2) 번역8)
1 [시편. 다윗]
주님께서는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당신의 막대와 당신의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주나이다.
5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하나이다.
6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이다.
3) 용어와 어구 해설
〔 1절 (표제) 〕
- 시(rw쐌z?i, 미즈모르):유다 전승에 따르면 히브리 성서의 시편 제목은 ‘찬양들’(탙lIhIT? 터힐림)인데, ‘시편집’은 여기에다 ‘책’(rp,se, 세페르)이란 말을 덧붙여 ‘찬양의 책’(세페르 터힐림)이라 불렀다. 그러나 칠십인역은 그 사본에 따라 표제를 달리하고 있다. 곧 ‘시’(yalmo貿, 프살모스), ‘시의 책’(Book of Psalms) 또는 ‘시편’(Psalter)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칠십인역은 시 또는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즈모르’에 근거한다. ‘미즈모르’란 이 단어는 아카디아어 ‘zamar’(노래하다, 연주하다)의 동족어로서 시에서만 사용되며 거의 전적으로 시편에서만 나온다. 이 단어가 시편의 표제들로 57번 나오는데 대체로 하나의 명칭이나 표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34편의 시편들에서 이 말 앞에는 라머나체아(j푑En푢?), “음악의 지휘자를 위한”이란 말이 나오며, 그 동일한 23개의 표제에서는 러다윗(dwId:l?, “다윗의”라는 말도 함께 나온다. 이 단어의 어근은 동족어인 아카디아어와 비슷한 모양인 자마르(zamar)인데 ‘노래하다, 찬양하다, 연주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의 어근을 ‘포도원의 가지를 자르다’로 보고 달리 해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이 현악이나 악기들과 함께 사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노래하다, 찬양하다’를 그 어근으로 봄이 타당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용어(미즈모르, rw쐌z?i)는 악기의 반주와 더불어 배경 음악으로 부르는 노래 또는 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 다윗의(dwId:l? 러다윗):‘다윗’ 앞에 나오는 전치사 ‘러’(l?가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윗의 시’란 말에 ‘의’(of)는 ‘……에게’(to), ‘ ……`을 위하여’(for), 또는 ‘ …… 에게 속한다’(belong to) 등으로 다양하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저작자임을 의미하거나 다윗과 관련된 어떤 사실을 표시하는 말인 것 같다. 시편 23편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다윗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시편의 역사적 배경과 삶의 자리”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y[Ir?hw:jy? 야훼 로이):하느님께서 목자로 비유되심은 구약성서에서 흔한 일이다(이사 40,11; 예레 23,1-6; 에제 34,12). 특히 시편(28,9; 74,1; 80,2; 95,7; 100,3)에서 자주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목자의 이미지로 표상되시고 있다. 이에 반해서 시편 49,15에서는 죽음이 저승의 목자로 비유되고 있다.
- ‘아쉽다’, ‘부족하다’(rsEj:, 하세르):다후드(M. Dahood)는 동계 언어인 우가릿어에 근거하여 ‘하세르’의 뜻을 더욱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당신의 요구가 무엇이든 간에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게 청하라. 나는 그것을 내 형제에게 줄 것이다”(irs� ?y mmm irs�tk dh_srt wank as�tn lih_y).9)
여기 ‘하세르’라는 히브리어는 기본적으로 ‘감소하다, 없어지다, 줄어들다’는 뜻을 지니며 ‘있어야 할 데에 없는’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 2절 〕
- ‘잔잔한’(tw쐉num? 머누호트):히브리어 ‘머누호트’는 ‘쉴 만한’, ‘안식할 수 있는’, ‘평안한’, ‘신선한’으로 옮길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메’(ym?와 함께 ‘쉴 만한 물가’(표준 새번역), ‘잔잔한 물가’(구약 새번역), 또는 ‘신선한 물가’로 옮긴다.
〔 3절 〕
- ‘바른길’(qd??? 마걸레-체덱):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위험이 전혀 없고 길을 잃을 염려도 없는 ‘곧은 길’로 옮기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고대 번역본과 현대의 권위 있는 번역본들은 ‘정의의 길’, ‘의의 길’, ‘옳은 길’, ‘바른길’로 옮기고 있다.
〔 4절 〕
- ‘골짜기로’(aygEB? 버게):칠십인역은 전치사 ‘버’(B?의 의미를 ‘한가운데’(in the midst)로 옮긴다. 이 경우에 시편 기자의 더욱더 강렬한 시적 감성의 표현일 수 있는 ‘골짜기 한가운데로’라고 옮길 수도 있다.
- ‘어둠의’(tw
- 그것들(hM:hE, 헤마):다후드는 우가릿어 ‘hm’을 근거로 하여 감탄사적 뜻을 내포한 ‘보라’(behold)로 옮긴다.10) 이 번역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우가릿어 ‘hm’은 히브리어 ‘임’(킳I)에 상응하는 접속사로 ‘만일’ 또는 ‘때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1)
〔 5절 〕
- 상(?:l?u, 슐한):파워(E. power)는 원수들 앞에서 상을 차려 준다는 내용의 부조화를 막기 위하여 ‘슐한’의 의미를 다르게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상’을 뜻하는 슐한(?:l?u)의 끝 글자인 ‘눈’(n)자는 다음에 나오는 전치사 네게트(dg
〔 5절 2행 〕
- 칠십인역에서는 5절 2행과 6절 1행을 맛소라 사본과 다르게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to?pothvriovn sou mequvskon wJ?kravtiston kai; to; e[leov?sou katadiwvxetaiv me”
그리고 당신의 가장 좋은 것(포도주?)처럼 나를 기쁘게 하나이다. 또한 당신의 자비가 나를 따르나이다. …… 칠십인역은 6절의 첫 번째 두 행과 5절의 마지막 두 행을 한데 모아서 옮긴다(시리아어역과 라틴어역인 불가타역 참조).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히브리어에서는 파격적인 것으로 철저하게 거부된다.13)
〔 6절 〕
- 사오리이다(yTIb?? 샤브티):히브리어 ‘샤브티’의 문자적 의미는 ‘돌아오다’이다. 그러나 고대 번역본들과 함께 히브리어에서 이와 꼴이 비슷한 ‘살다’ 또는 ‘거처하다’로 읽는다. 우리는 대부분의 번역본들에서 발견된 샤브티(yHIk?? 살 것이다)에 대한 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칠십인역에서는 야샤브(bv푱:, 거처하다, …… 에 살다) 동사를 부정사(to infinitive)로 대치하여 접속사 ‘워’(w?를 생략하고 문장의 주어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번역한다.“주님의 집에서 나의 거처는(to; katoikei'n me ejn oi[kw/) 지속되오리다.”
2. 본문 주석을 위한 예비적 고찰
1) 구조
본문에 관한 구조적 관찰은 일반적으로 문학과 언어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문학 언어의 일종인 시편을 해석하고 연구할 때에도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특히 시편의 본문들이 대부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창안된 특별한 구상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저자의 의도와 목표가 그 구조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의 매력은 간결함과 그 아름다움에 있다. 그러나 이 시편을 해석하는 데 약간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 시편이 일관성이 없는 두 개의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두 상징이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은 한 사람의 목자, 또는 오히려 목자의 이미지로 표상되신 주님, 그리고 이런 주님에 대한 상징성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목자의 시편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모두 6절로 구성된 이 시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목자의 이미지는 4절까지 전개되어 있다. 곧 1-4절에서 주님은 그의 양떼를 보살피는 착한 목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와 반면에 5-6절에서 주님은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향응자 또는 원수들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집)주인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시편 23편은 두 개의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목자라는 상징과 주인이라는 상징이 시 자체에서 그렇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14)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시는 3개의 상징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브리그스(C. A. Briggs)는 1-3a절에서 푸른 풀이 무성한 목초지와 잔잔한 물가에서 그의 양떼를 돌보시는 목자이신 주님, 3b-4절에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바른길로 그의 일행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안내자이신 주님, 5-6절에서는 그의 손님을 잔치에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는 집주인이신 주님을 본다.15) 이와는 달리 쾰러(L. K뾥ler)는 목자에 관한 단일한 표상이 이 시편 전체를 통하여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16) 쾰러의 주장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쟈케(L. jacquet)는 이를 두고 “(이 시는) 단일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주님의 가족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쉽지 않음. (이 시는) 단일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김. …… `(이 시는) 단일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그의 양떼를 잘 돌보는 목자의 표상. 그 표상은 자연스럽게 다른 이미지, 곧 그가 초대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집주인의 표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혹은 차라리 이 시는 목가적이며 인간적인 이중의 관점 아래 전개된 단일한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17)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이 시에서 두 개의 상징을 본다. 크라우스(H. J. Kraus)는 이 시편은 목자의 표상(1-4절)과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집주인의 표상(5-6절)이라는 두 개의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시편 23편이 지닌 기본적인 요소인 상징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만 하더라도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이는 이 시편의 구조 또한 명백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견해의 다양성은 이 시편을 이해하는 데 더 나은 길을 열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내용과 형식을 바탕으로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보기로 하자. 우선 내용부터 살펴보자. 본문의 내용을 보면 시편 23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1-4절)와 후반부(5-6절).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의 전반부인 1-4절까지는 착한 목자의 표상이 전개되어 있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5-6절에서 목자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요소(머리에 향유를 발라 줌, 원수들, 주님의 집에 거주함)들이 나타남으로써 이 시편의 주제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시의 전반부에 묘사된 목자에 관한 이미지와 후반부(5-6절)의 주인에 관한 이미지가 시 자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목자와 주인의 관련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의 유목적인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가 탄생하던 시기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목자’란 말은 단순한 의미가 아닌 더 깊고 더 감성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곧 목자는 두 개의 관점에서 묘사될 수 있었다. 그는 양들이 목초지를 찾아다닐 때 보호자가 되며, 또한 사막의 적들과 위험을 피해서 그의 천막에서 환대를 구하는 여행자들의 보호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주님(야훼)은 목자의 생활 속의 두 가지 면을 가진 목자로서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양 떼를 이끄는 자로, 그리고 손님을 환대하는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쟈케의 의견대로 주님은 이 시에서 목가적이며 인간적인 두 면을 동시에 지닌 목자의 이미지로 표상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시편 기자는 시의 전반부(1-4절)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1-3절), 또는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옵니다.”(4절)라고 말함으로써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표현하며 후반부(5-6절)에서는 주님의 집에서(야훼의 장막) 그가 원수들에게 보호와 주인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착한 목자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이제 본문의 문법적인 구조를 살펴보자. 시편 23편에는 첫 절(1절)과 마지막 절(6절)에서 야훼(hwhy, 주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한 번씩 등장한다. ‘야훼’라는 말로 반복 구문(inclusio)을 형성하는데, 1절의 주체는 야훼이고, 6절의 주체는 나다. 그러니까 이 시는 주체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주체 나로 끝난다.18)
기호학적 분석에 따르면 본문은 등장 인물, 주체의 윤곽을 명확하게 그리고 있다. “행위자는 두 명이다:주님 그리고 나, 즉 말하고 있는 시편 기자. 그리고 본문 속에 아홉 가지 행동이 전개되는데 모두 주님께 귀속된다:그분은 나의 목자이시다/그분은 나를 쉬게 하신다/그분은 나를 이끄신다/그분은 생기를 돋우어 주신다/그분은 나를 안내하신다/그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그분은 나에게 위안을 주신다/그분은 나에게 상을 차려 주신다/그분은 내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신다. 돌보아 주기, 주의력 집중, 배려의 지적 사항들이 은유, 비유,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주님께 대한 아홉 개의 정의, 곧 그분은 나를 자애롭게 돌보아 주시는 분이라는 중심 내용이 본문 전체에 퍼져 있다.”19)
이 시에는 문법적인 사항으로서 특기할 점이 또 있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나의+명사’가 7번 나타난다:나의 목자(y[Ir?로이>,1절)/내 영혼(yvIp??<나프쉬>,3절)/저와 함께 계심(ydM:[I<임마디>,4절)/저에게<문자적으로는 ‘나의 앞’>(yn푦:l<러파나이>,5절)/내 원수들(yr:r??초르라이>,5절)/내 머리(yvIar?<로쉬>,5절)/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문자적으로는 내 생명의 모든 날들에> (yY:j?ymEy?lK:<콜-여메 하야>,6절). 그리고 ‘나는’이 주격으로 4번 나타난다:나는 아쉽다(rs:j?<<에흐사르>,1절)/나는 (걸어)간다(?Ea<엘레크>,4절)/나는 두려워한다(ar:yaI<이라>,4절)/나는 살다(yTIb??샤브티>,6절). 끝으로 ‘나를’은 목적격으로 5번 나타난다:나를 쉬게 하다<문자적으로는 ‘나를 누이다’> (ynIxEyBIr??야르비체니>,2절)/나를 이끌다(ynIlEh�n푱?여나할레니>,2절)/나를 끌다<인도하다>(ynIj쳌??얀헤니>,3절)/저에게 위안을 주다<나를 안심시키다>(ynI탒j�n푱?여나하무니>,4절)/나를 따르다(ynIWpD??I<이르드푸니>,6절). 이렇게 ‘나의’, ‘나는’, ‘나를’로 나타나는 일인칭 단수가 길지 않은 이 시편에서 16번이나 등장한다.20)
“한편 히브리 원문에 의하면 ‘당신’이라는 이인칭 단수는 5번 나타나 일인칭 단수에 화답한다. 우리말 번역에는 ‘당신’ 대신에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십니다(ydIM:[I hiT:a?아타 임마디>,4절)/당신의 막대(???I<쉬브트카>,4절)/당신의 지팡이(?,4절)/당신께서 차려 주시고(??�T?타아로크>,5절)/당신께서 발라 주신다(T:n?퐻I<디샨타>,5절).”21)
이렇게 시편 23편은 나(16번)와 당신=주님(5번)의 밀접한 관계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주님께서는 나(시인)를 자애롭게 돌보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시편 23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이 시를 통해 주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란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 하시는 일을 기도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각 이미지들 역시 다른 이미지들을 보충하면서 목자의 이미지로 표상되신 주님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을 하나 더 지적한다면 “1-3절에서는 주님에 대해서 3인칭으로 이야기하고, 4-6절에서는 주님을 2인칭으로 해서 직접 말씀드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4절은 주제상으로는 전반부에, 문법상으로는 후반부에 속하게 된다. 바로 이 4절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목자이신 주님과 향응자이신 주님은 한 분으로서, 이 두 주제는 한 분이신 주님의 서로 밀접한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22) 특히 이 시의 중심부에 배치되어 있는 4절(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나이다)은 시편 저자의 큰 신뢰심의 표현과 함께 주님의 함께하심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1절의 내용(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라는 시인의 신앙 고백)과 6절의 내용(자애로우신 주님)을 더욱 풍부하게 하면서 시편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시편 23편의 구조에 관한 결론을 정리해 보자.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시편 기자가 사용한 시편의 통일성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시편 속에서 단 하나의 상징(목자)을, 어떤 이는 두 개의 상징(목자와 주인)을 또 어떤 이는 세 개의 상징(목자, 안내자, 주인)을 본다. 이와 같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우리는 6절을 제외한 모든 비유적 표현이 실질적인 목자의 용례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목자의 상징만을 봄으로써 시의 통일성을 주장할 수 있으나 동시에 상징의 사용에 다소의 융통성을 허락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한계를 너무 날카롭게 지적하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23) 한편 문법적인 사항은 이 사실을 더욱 밝게 해 주고 있다. 시의 시작 절(1절)과 끝 절(6절)에 등장하는 ‘야훼(주님)의 행위’, 중심부(4절 2행)에 나오는 ‘주님의 함께하심’(현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라는 말로 가장 훌륭하게 나타낼 수 있다. 결국 시편 23편에서 표현된 각 상징들은 목자의 이미지로 표상되신 주님께 대한 상징을 보완하면서 주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문법적인 사항들은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편 23편의 구조적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보면 이 시는 교차 대구법(Chiasmus)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A. 착한 목자이신 주님(1절)
B. 푸른 풀밭과 바른 길(2-3절)
C. 함께하시는 주님(4절)
B′: 상<잔치>(5절)
A′:자애로운 주인이신 주님(6절)
(다음 호에 계속)
1) 헤셀,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8년, 398-400면 참조.
2) 이스라엘에게 “역사는 하느님의 경륜과 섭리 아래 있고 그의 약속에 의하여 그 역사가 움직이며 그의 의지에 의하여 그 한계성을 가지며, 하느님 자신이 역사를 살피신다. …… 모든 역사는 그 자료를 하느님 안에서 가지며 또 하느님을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다.”(Gerhard von Rad, “Der Anfang der Geschichtsschreibung im alten Israel”(1944년), Gesammelte Studien zum AT(=TB 8), 1971년, 153면; 쾰러,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19533년, 78면.
3) 베스터만, 「시편 해설」, 노희원 옮김, 은성, 1996년, 25면.
4) 앤더슨, 「시편의 깊은 세계」, 노희원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8년, 171면.
5) 바이저, 「시편(Ⅰ)」, 김이곤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2년, 303면.
6) Carlo M. Martini, “거룩한 독서”, 「믿음과 삶」 25호, 서인석 옮김, 대구가톨릭대학교, 2001년, 132면에서 재인용.
7) E. Vogt, The Place in life of Ps. 23, Bib 34, Rome, PIB, 1953년, 195면에서 재인용.
8) 「시편」(개정판), 임승필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2년.
9) 다후드, “PsalmsⅠ 1-50”, The Anchor Bible, vol.16, New York, 19826년, 146면.
10) 위의 책, 145면.
11) J. C. De Moor, “Ugaritic hm-Never ‘Behold’”, UF1, 1969년, 201-202면 참조.
12) 파워, The Shepherd’s Two rods in modern Palestine and in some passages of the Old Testament, Bib 9, Rome, PIB, 1928년, 439면; 쾰러, “Psalm 23”, ZAW 68(1956), 234면; J. Morgernstern, “Psalm 23”, JBL 65(1946), 13-24면 참조.
13) Peter C. Craige, 「시편 1-50」, 손석태 옮김, 솔로몬, 2000년, 275면.
14) L. A. Sch뾨el, Trenta Salmi:Poesia e Preghiera, Bologna, 1982년, 113-114면 참조.
15) 브리그스,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 vol. 1, Edinburgh, 1976년, 207면; 바이저, 「시편Ⅰ」, 김이곤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2년, 304-307면 참조.
16) 쾰러, 앞의 책, 227-234면; F.M. Dobias�, “Der 23. Psalm”, Communio Viatorum 15, 1972년, 141-149면.
17) 쟈케, “Les Psaumes et le coeur de l’homme”, Gembloux, vol. 1, 1975년, 552면.
18) “주님과 기도자의 관계를 살펴볼 때,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각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3절과 5절에서는 주님께서 주체로서 기도자에게 베푸시는 행동과 대접을 노래한다. 반면에 4절과 6절에서는 기도자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 그의 ‘걸어감’(4절)과 ‘살아감’(6절)을 고백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도자는 수동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능동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임승필, 「시서와 지혜서」, 생활성서사, 1999년, 92-93면).
19) Carlo M. Martini, 앞의 글, 133-134면.
20) 이병용, 「시편 1」 <시편을 산다>, 요단, 1999년, 77-78면 참조.
21) 이병용, 앞의 책, 78-79면.
22) 임승필, 앞의 책, 92면.
23) J. Morgernstern은 그의 책, Psalm 23, JBL 65(1946), 13-24면에서 실제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