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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할머니의 이야기
포천이 고향이고 포천에서 살고 계시는 86세이신 할머니 그리고 북한지역 창도리가 고향이고 지금은 철원 지포리에서 사시는 76세인 할머니 두분을 포천 의료원 정형외과 대기실에서 점심시간에 약 1시간 이상을 함께하며 세상사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얼마나 살아야 살았다고 할까요?
86세 되신 할머니는 94세 할아버지와 사는데 너무 살았다고 하고 76세 되신 할머니는 남편이 먼저 갔는데 함께 오래 살아야 좋다고 한다.
86세 할머니는 5녀1남를 두었다.
6.25때 파난갔다 부산에서 할아버지는 나이가 무려 30이 다 되었는데 키가 크고 잘 생겼다(?)는 이유로 징집군에 끌려갔다.
이미 대동아 전쟁도 갔다 만주지역에서 살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다시 군에 잡혀가니 시부모님들이 나서서 백방으로 징집을 못하게 하려 했지만 부둣가에 벌써 잡혀온 인원이 3,000명이 넘었다.
별별 사연으로 철조망이 처진 사이를 두고 생이별을 하는 순간이 나가오고 있다.
할머니는 벌써 2아들을 데리고 있어 업고 안고 철조망 앞에 엉엉 울며 떠나려는 남편을 애타게 부르고 시아버지는 정문으로 들어가 뭔가를 대화를 나누지만 피난을 온 마당에 호적등본이나 무슨 증명할 문서가 없는데 다짜고짜 끌어다 차에 태워버리는 무법천지의 징집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어쩌다 운좋게 아는 사람이 징집관이면 또 어떻게 빠져나와 군대를 기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신체조건이 좋고 부유하게 살아 옛된 얼굴에 청년으로 인식되어 빠져나오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니 만주에 끌려가 관동군으로 행세하다 쏘련군이 들어와 무장해제를 하여 조선인은 일부는 북으로 가고 일부는 남으로 오고 2년이나 그 추운 오지에서 마적단과 싸우고 중공군과도 싸우고 쏘련군과도 싸웠다 한다.
그런데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아서 기르는 가장인데 군대에 가야한다고 쓸데없는 변명이 필요없다며 무조건 트럭에 태우고 가버렸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는 돈을 얼마주고 나왔다고 하는데 급히 피난 나오느라 돈도 없다.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은 철조망이 있는 어느곳에 나가 아직 안에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뒤숭숭한 소문이 나더니 300명을 선발해서 일본에 유학을 보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멍쩡한 허우대 덕분에 여기에 또 걸려들어 배를 승선하여 일본 사세보인지 시모노세끼인지로 떠난다고 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벼락이 할머니한테 떨어졌다. 어린 것 둘을 데리고 어찌 살라는 것인지 시아버지 형제만도 남자만 여섯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한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옷도 없고 그러니 말만 할 줄 알면 국제시장에 나가거나 길거리에서 동냥을 해 와야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집이 어디 있는가. 상자박스나 어디서 보이는대로 판자같은 것을 주어서 움막집, 그러니까 열대우림에 살고 있는 오랑우탕이 사는 집처럼 하고 살아야 했단다.
배가 부두를 떠나는 날에 많은 일가족들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울부짖으며 언제 오느냐고 군 계급장을 달고 있는 아저씨들은 다 붙들고 매달려 애원해도 아무도 모른단다.
정말 유학을 가는 것인지, 하도 속아서 살아온 세상이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1개월 교육을 받고 배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 항구에 불빛이 반짝반짝하는 곳에 해상에 머물렀다. 이때가 '50.10월인데 원산 앞바다인지 함흥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군을 따라 올라서 혜산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레 중공군이 나타나 철수를 하게 되는데 함흥부둣가에 피난민이 산처럼 몰려들어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모두가 아우성으로 살려달라고 매달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탄 배는 개인소총은 휴대하되 웬만한 것은 다 바다물속으로 수장 시키고 단 하사람이라도 더 태우라는 상부지시로 배가 사람으로 뒤덮혀 서서 몸도 돌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거제도로 와서 다시 부산으로 올라가 수도사단으로 갔다.
"운명은 하늘의 뜻, 3발의 총알을 맞고도 살아난 할아버지"
부산에 잠깐 머물던 시기에 어떻게 연락이 되어 살아있는 모습을 한번 온 가족이 보게 되었다. 부대에 포천에서 알고 지내던 특무상사가 한분 있어서 마침 어렵지않게 면회를 하였다.
그런데 발을 보니 얼어서 녹아 내리는지 진물이 흐르고 있고 사타구니 밑에는 무슨 압박붕대를 하고 있기에 연유를 들어보니 함경도에서 워낙 추워서 동상에 걸렸다 한다.
압박붕대는 철수 과정에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이 한조각 허벅지 살에 박혀 있어 제거하고 붙인거라 한다. 요행이도 그곳은 다치지 않았다.
다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간다며 이제 미군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국군과 함께 움직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나가는 남편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안타까움이 더 컷다고 한다
어느날 연락이 왔다.
육군 병원에 있다고 하며 크게 다친 것은 아니고 한 한달 치료받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급히 있는 곳을 알아내 시부모님과 시동생 한분이랑 함께 갔더니 어깨에 총살이 뚫고 지나갔는데 천만다행으로 뼈는 문제가 없고 인대만 파열되어 괜찮다고 한다.
그러더니 또 다시 전선으로 간다며 설악산으로 들어간다고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는 수도사단 기갑연대로 대관령에서도 전투를 하고 건봉령 밑에서 전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성으로 간다고 하더니 일정기간 연락이 끊겨버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날이 지나간다.
이제 피난 길에서 시동생과 시아버지가 포천에 갔다온다고 올라가더니 연락이 왔다.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는 것이 났겠다는 내용이다.
할머니는 가족들을 따라 부산에서 포천으로 올라온다. 걷기도 하고 우마차를 타기도 하고 같은 지역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북으로 올라온다.
길거리에는 사람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불타 버린 집들의 앙상한 모습, 지금의 거지는 양반이다. 그때는 손도 씨꺼멓고 옷은 다 헤진 상태로 두더기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대한민국 모두가 집시들이었다. 지금의 길거리에에서 잠드시는 분들은 양방인 셈이란다.
올라 오면서 배가 고파 때로는 있어 보이는 집에 들러 얻어 먹기도 하고 봄이 지나는 철이라 들에 난 잡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이거 살자니 아무것도 창피하지 안했다.
어린 아이들은 그래도 좋은양 장난을 치며 천진스런 모습이 바보같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포천 가까이 다 왔는데 아직 살고 있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군인들이 통제선을 그어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를 하는데 바로 보이는 집을 놓고 다시 길가에서 몇 일을 기다리다 어떻게 집에 들어가 농사도 짓고 집을 정리 하는데 그나마 집이 불에 안타고 남아 있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동네 집이 대부분 다 타버렸고 집을 뒤져서 먹을 것이나 돈이 될만한 것으 다 가져가 버렸다.
북한군이 그랬는지 중공군이 그랬는지 빨갱이가 그랬는지 알 수도 없다.
무럭고개 너머에는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죽어서 있다는 소문도 돌고 아직도 국사봉에는 중공군이 남아서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동네는 완전히 페허가 되어 있고 여기저기 죽어서 있는 군인의 시체가 동네 개들의 밥이 되어 있다.
경찰들이 들어와 자치대를 구성하고 사람들을 불러내 치우기도 하는데 이건 세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다시 병원에 들어간 남편으로부터 집으로 연락이 왔다.
한계령인지 현리인지 하는 곳에서 부상을 입어 후송되어 경주에 있다고 한다. 시아버지와 몇이 대구로 내려갓다 올라 왔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두어달 치료하면 된다고 한다.
이거 내 남편인데 아이들 때문에 만나러 가지도 못하고 그때는 모두가 그런 세상이라 불평도 할줄 몰랐고 살아있다는 것이 하늘의 복이라 생각하는 시절이다.
다시 남편은 전쟁터러 떠나고 벌써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리산으로 공비소탕하러 간다고 한다. 여수로 배를 타고 가서 지리산일대에서 공비들과 전투를 하는 동안에 한번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 만났다.
그 큰 키가 그대로 있고 체격이 좋았는데 비짝 말라서 대꼬챙이처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도는데 아이들을 안아 보며 "아빠다 아빠다"하는 모습에 찡한 가슴은 더욱 슬프게 했다.
할머니는 함께한 가족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무슨 골짜기에 빨갱이 소굴이 있다며 일망타진하러 출동해야 한다고 한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헤어지고 겨울이 지나는데 '52년도 봄이 오고 있는데 전방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올라간 곳이 지금의 화천 북방인데 무슨 수도고지인가 금성강 위에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 여름과 가을 내내 전투를 했다고 한다.
가을 추수가 다 끝나가는 어느 날인데 갑짜기 양주에 와 있다고 하여 집안식구들이 모두 몰려가 보았다. 그런데 부대 병원에 이번에도 누워 있다. 크게는 아니지만 파편이 종아리에 박혀 있다고 한다.
벌써 3번째 부상인데 정말 하늘이 보우하사 살아난 전쟁터의 영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또 다시 화천북방으로 들어가야한다는데 이번에는 부대에서 간부 한명이 어떻게 해서 집에서 하룻 밤을 자고 가는 특혜가 주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포천에서 군에 간 간부로 시아버지가 아는 분이였다고 한다.
"죽었다고 연락이 왔는데 살아온 할아버지다"
다시 부대로 돌아가고 오성산이 보이는 곳에서 전쟁을 한다고 하는데 '53년도 초여름까지는 크게 문제없이 잘 있다고 하고 곧 휴전이 되면 돌아온다고 하는 희망이 보였다.
모두가 전쟁은 이제 끝난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전방에 통제되었던 피난민들도 일부 본 고향으로 들어가는 조치가 취해져 분위기는 무르익어 잇는데 갑작스레 중공군이 최후발악으로 또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들뜬 휴전 기분에서 이제 제수없이 막바지에 죽지나 않는지......
그런데 비보가 날라들었다.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이청동인지 어딘지 연대장도 죽고 기갑연대가 완전히 당하여 몇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단다.
하늘이 드디어 무너져 내렸다.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 처량하게 보인다.
무슨 죄로 이렇게 기구한 운명으로 처자식 남편의 운명을 갈라 놓는건지 천지신명님께 빌고 빌었다. "우리 아빠 살아오게 도와 주세요~!"
그리고 또 갑자스레 휴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돌아오지않고 정말 죽은 전사자가 되어 시신을 찾지못한 실종으로 처ㅣ되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나 북한에서 포로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는데 지금 ㅈ유의 다리에 나가 몇일이고 기다렸다. 혹시나 살아어 올수도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키가 유난히 크기에 다가서서오니 남편이다.
시아버지랑 시댁식구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정말 살아서 온 것이다.
이렇게살아 귀환한 할아버지는 바로 집으로 오지않고 다시 거제도로 가서 뭘 조사하는지 어쨌든 3개월이나 지나서 집으로 왔다가 부대에 복귀하였다.
"3번이나 총알을 맞고 살아온 할아버지 만세!"
그런 할아버지가 이제 일어서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웠는데 말하고 먹는 것은 문제없는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도 넘어지면 뼈가 자꾸만 부러져 걷지를 못한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전쟁이야기를 더 잘하고 있다. 평생을 함께하며 들어온 전쟁 이야기다.
거제도 피닌민촌에서 발생한 북한군 프락치들의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죽어나가는 모습이며 북한에 비록 두달여 포로로 가 있었지만 그들의 악랄한 꼬시기 작전과 부상자들이 많은데 치료를 안해줘 죽어나가는 인원이 하루에만도 10명이 넘을 때도 있는데 그들은 눈하나 까닥도 안한다.
"살만치 살았으면 소리없이 가는 것이 본인에게나 가족들에게 좋아요."
집안이 못사는 것은 아니니 그런대로 살아왔는데 이제 나이가 90이 넘어가니 그 총알맞은 후휴증과 고생한 것들이 뭉쳐서 정신과 말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무슨 남자가 뚝 하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가고 침대에서도 도와주지 안으면 내려서지도 못한단다.
그러니 참전용사라는 국가 유공자로 치료비는 그렇게 드는 것이 없지만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니 자식놈들은 다 바쁘게 살아가고 결국 큰 며느리가 자주 들려 집일을 하고 있다지만 그들도 자식을 길러야 하니 그리 쉽지가 않다고 한다.
할머니는 여자 몸이라 어떻게 할아버지를 부축하기도 힘들고 할머니도 무릎이 안좋아 오늘 병원에 오셨다 한다. 할아버지는 이미 병원에 입원하여 있고......
그러시면서 너무 오래 살아도 안좋다며 한 80이면 적당하게 아프지않고 살다 한순간 눈감고 가는 것이 최고라며 이거 오래 살아 지옥이라 하신다.
보혼헤택도 치료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걷지도 못하는 인원들을 위한 대책도 있어야지 청춘을 조국을 위해 바쳤는데 이제 그 후휴증으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나이 먹고 살아있는 것이 죄인이요~!"
가슴아픈 사연이다.
76세 할머니는 2남3녀를 두었다고 한다.
북한지역 창도리(지금은 북한 김화군과 금강군 사이에 있음)에 살았는데 6살에 전쟁이 터졌지만 그 당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군인들이 나타나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가지않고 있다가 나중에 알았지만 국군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 올 때에 함께 월남하여 피난민으로 살다가 지금의 지포리(철원군 갈말읍)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북에 있을 때에 기억은 코가 큰 쏘련군이 가끔 동네에 나타났고 잘 산다고 하는 집은 대부분 쫒겨나고 면장이던 선생이던 공직자들 집은 어디론지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어린 나이에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자주가던 큰집이랑 외가집이 어느날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살아 가지 못하게 되어버려 알았지요."
"그럼 집은 어떤 피해를 안받았나요?"
"잘 살지 못하고 높은 관직도 없으니 붙잡혀 갈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는 한순간에 남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나 큰소리 지르고 다니고 매일 밤이오면 한 곳에 모이는데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 다니던 기억이 나고 누군가 나서서 소리지르고 만세를 부르면 동네 사람들이 따라서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한다.
졸지에 동네가 서로를 감시하고 쉬쉬하고 다니는데 서서히 군인들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 신기해서 구경도 하러 갔다고 한다.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라고 하여 동네사람들이 매일 방공호를 파고 치안대란 사람들이 찾아와 판 것을 조사도 하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숨는 연습도 하였는데 할머니는 신기해서 동네 같은 또레들과 숨바꼭질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이 나중에 보니 비행기에서 불폭탄을 쏘아대면 숨는 곳이였다.
그런 어느날에 집안은 남으로 내려가는 국군을 따라 모두가 걸어서 걸어서 간 곳이 나중에 알았지만 풍기로 인삼이 유명한 동네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할머니는 잘 모른다. 그당시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골짜기마다 왠만한 야산에 다들 거적같은 것으로 움막처럼 하고 살다보니 어린 마음에 그러는가 싶었지 뭐 전쟁이나서 비참하구나 하는 생각은 훨씬 후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휴전이라하여 그래도 고향가까이 간다고 올라 온 것이 철원이었다.
사실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말로 하면 무작정 상경한 것인데 이곳도 풍기와 비슷하게 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군에서 만들어준 피난민촌에 그래도 들어가게 되어 비는 맞지않고 살게 되어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행복했다 한다.
먹는 것도 미군이 갔다주는 밀가루나 옥수수가루 우유덩어리들이 얼마나 맛있는지 그걸 먹고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었고 집의 아버지나 오빠들은 미군부대나 군부대에 일을 나가 그래도 먹고 살 것을 벌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자라나 성장하여 시집가서 딸 자식을 낳아 길러 지금은 큰 아들이 지포리에서 큰 농장을 하고 있는 먹고 살만한 집안이 되어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이야기는 딸이 최고라며 아들 녀석은 키울때가 자식이지 커놓으니 한여자의 남편일 뿐이란다. 아마도 큰 아들 집에 살고 계시지만 딸들이 사위들과 함께 부모님에게 잘 하고 있는 듯하다. 요즘 세상 참 이상하게 되어간다.
"할머니, 그래도 자식이 있어야 집안의 기둥노릇 하잖아요?"
"아이고 그건 옛날 이야기요. 농사만 짓고 살던 시대지. 지금은 누가 소처럼 일만 하나요?"
"얘들 학교 보낼랴 먹고 살랴 혼자해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어요. 그 옛날에야 다 같이 거지생활이이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어디 그러나요. 부모님 모시고 살겠다는 며느리도 없어요."
두분의 할머니가 합세하여 나를 공격하신다. 요즘 세상 별난 세상이라 나도 생각하지만 부모님을 모시기 싫고 조상 제사 안지내고 그러면서 있는 재산 탐내고 힘든 일은 안하고 그러니 여성들이 과거처럼 집에 있으면서 자식 기르고 남편위해 봉사하는 시대는 가버렸다.
이러다 보니 직장도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갈 곳이 당연히 적어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여성들이 밖으로 나가면 그 집안 망한다는 말은 옛날 구석기 시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기득권 층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다 현모양처의 집안에서 자란 분들이 많다.
시대의 흐름이겠지만 남녀의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가운데 갑작스런 고도의 산업화가 가져온 핵가족 제도의 모습이 결국 지금 저출산문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피닌민에 주어진 단칸방에서 그래도 5~6명씩 애낳고 가르치고 다 했던 우리 부모님들이다."
할머니가 들어와 철원에 왔을 때는 10살이 넘어서 들어왔는데 그때는 지금의 노동당사가 있는 곳은 갈 수 없는 곳이였고 동송일대까지만 들어가게 되어 일부 피난민중에는 고향집으로 들어간 분도 있고 지금 고석정에서 동송에 이르는 벌판에 판자집이 죽 늘어서 피난민들이 일정기간 살았다 한다.
그러다 마을마다 군에서 피난민을 위한 일자형 집을 방하나에 부엌있는 단칸방 집을 요즘 아파트처럼 분양하여 들어가 사는게 이런 속에서도 다 애 잘낳고 잘 키워 훌륭한 판검사도 나오고 박사도 나오고 했단다.
이런 식으로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살라하면 아마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정말 우리네 어머니들, 아버지지들은 고생하며 본인들의 삶은 없이 자식위해 희생해 온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하다고 하며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했다고 한다.
...... .
천차만별의 인연이 머무는 세상에 억울함도 많고 고생도 많고 행복도 많았던 시절이 그립다.
참 이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내 어머니같은 분에게 듣는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다. 삶의 진실이다.
비록 병원에 와 진료를 기다리며 6.25전쟁관련 그 시대를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은 훌륭한 어머니다.
또한 이런 글을 담아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하고픈 말을 추스리는 아름다운 새벽이 주는 때묻지않은 공기, 참 벅차고 행복하다.
"자식놈 키워봐야 다 필요없어요. 딸자식이 부모님에는 훠씬 잘해요."
"할머니 그러면 나라는 누가 지켜요, 또 전쟁나면 이젠 피난도 못 가실텐데..."
할머님이 웃으신다. "그도 그렇네..."
세상아 청춘들아, "우리 급하게 가지말고 천천히 걸어요, 주어진 운명이야 어쩔수 없는 것이니 남의 시선 두렵다 말고 정의롭게 세상살이 함께 살아가요. 오늘이 있는 것은 다 피흘려 나라를 찾고 지킨 순국선열과 호국용사님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아요. 전쟁의 폐허로부터 피땀흘려 고생하여 그 보릿고개를 견뎌낸 아버지 할아버지 시대가 있었다는 것 기억해야 해요. 지금은 조금 아프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병들어 고생하니 자주 병원에도 찾아가 진료를 받고 정말 조금씩만 남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너무 많이 먹으려하지 말고 함께 나누어 갖는 슬기로움을 지녀요. 뒤에서 욕하고 반목질시를 선동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앞에서 말하고 책임지는 배짱있는 삶을 살자구요."
제법 종다리도 높이 오르고 까마귀와 까치는 서로 둥지를 지키려 아침을 떠들썩하게 한다
그러고 보니 달래는 벌써 꽃이 피고 산 모퉁이에 진달래꽃 피었다.
나도 모르게 우리집 금낭화도 피워 봄은 벌써 익어가고 있는 길목이다.
"내가 뿌린 파의 씨앗이 움을 트고 얼굴을 내밀고 옥수수도 뽀족히 예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 ^^
봄비가 내리려 하늘이 뭉글뭉글 합니다
온갖 봄의 향연에 이곳은 아직 높은 산위에 흰눈이 보이는 시절입니다
기다림으로 오는 한주가 즐겁게 갑니다
고추밭 비닐하우스 앞에 차양막도 만들어 올 여름은 조금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꼼지락거리며 봄을 즐기고 세월앞에 순응하는 농부의 길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ㅎㅎ
항상 감사하고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