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털링 브릿지 전투
잉글랜드의 군사력에 맞서 윌리엄 웰레스와 앤드류 머레이는 스털링 성 밑 반 마일 정도에 위치한 포스 강을 건널 좁은 다리에서 북쪽으로 1마일 거리에 위치한 크레이그(Craig) 수도원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였다. 그 다리의 북쪽 끝에서부터 크레이그 수도원까지는 연결된 강둑길이 있었는데, 지반이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 이동을 받아 기병을 배치하기에는 부적합 하였다. 이러한 앤드류 머레이와 윌리엄 웰레스의 군대 배치는 워렌과 휴 크레싱햄 군대의 전면을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형태였다. 이는 스털링 브릿지를 건너는 길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군의 움직임은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잔뼈가 굵은 서리 백작 워렌은, 그러나 스털링 브릿지 전투가 벌어질 1297년에는 66세의 노령이었다. 지휘관이 늦잠을 자버렸기 때문에, 예정대로 움직였던 잉글랜드 병사들은 공격 계획을 취소시키고 그들의 사령관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몇 차례의 불협화음으로 전투는 늦쳐졌고, 서리 백작은 두 명의 도미니쿠스 수도사를 파견하여 윌리엄 웰레스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월레스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네 사령관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우리 왕국의 자유를 위해서 너희들과 전투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답변을 전해 들은 접한 워렌 백작은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 기사였던 리처드 런디(Sir Richard Lundie)만은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우회 기동을 제안했다. 하지만 크레싱햄은 예산의 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틀림없이 그는 잉글랜드 보병들이 즉각적인 공격으로 다리를 쉽게 건널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빠른 시간 내에 건너기에는 다리의 폭은 너무나 좁았다. 겨우 2, 3명이 나란히 건널 수밖에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윌리엄 웰레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 군과 그렇지 못한 군사들을 둘로 갈라놓기 위하여 강둑길을 따라 언덕 아래로 부대를 재빠르게 전진, 배치시켰다. 이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잉글랜드 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다리를 이미 건넌 병사들은 양쪽 측면에서 공격을 받았으며, 아직 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앞선의 동료들을 지원할 수 없었다. 던바 전투에서 적군을 물리쳤던 잉글랜드의 기사들은 늪지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평민 창병의 밀집부대인 실트론(Schiltrons)은 잉글랜드 기병들의 공격을 용감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2)
드디어 윌리엄 웰레스와 앤드류 머레이의 군대가 완벽하게 대승을 거둔 것이다. 웨일즈 궁병들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휴 크레싱햄은 피살되었고, 워렌 백작은 겨우 버웍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는 남쪽 사면에서 다리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던 군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도피할 수 있었다. 스털링 성은 함락되었고, 곧이어 잉글랜드인이 장악하고 있던 에딘버러, 던바, 록스버러, 버웍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도. 이에 끝나지 않고 스코틀랜드 군대는 10월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의 국경 지대를 침입 하는데 이르렀다.
스털링 브릿지 전투는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잉글랜드의 기사들이 결코 무적이 아니며, 무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시킨 전투였다. 이로 인해 스코트인들은 1296년 던바 전투에서 잃은 자신감과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유력한 지도자였던 앤드류 머레이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후에 사망한 것은 치명적이었으나, 토지 없는 농민들로만 구성된 아마추어적인 윌리엄 웰레스의 군대는 전문적인 기병을 무찔렀다.
승리의 기반은 워렌 백작의 건강, 그리고 승리에 항상 따라붙기 마련인 운의 도움이 있었지만 윌리엄 웰레스의 군사 장악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군율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승리 이후 웰레스는 곧바로 4인 작통법(quatemion)을 통해 농민군을 통제하였다. 패배한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잉글랜드는 전비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점에 시달렸으며, 적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보급품이 부족했으며, 겨울이 닥치고 있던 시점인 9월의 전투란 자연히 그 기후에 익숙한 스코틀랜드 군인들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3)
스털링 브릿지 전투 이후 10개월 동안 윌리엄 웰레스는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했다. 그의 통치 시기에 발행된 4개의 영장과 칙서가 이를 증명한다. 1297년 10월 11일에 앤드류 머레이와 월리엄 웰레스는 신의 은총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이 전쟁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리는 편지를 뤼벡(Lubeck)과 함부르크(hamburg)의 시장들과 코뮌에 보냈다.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왜나하면 신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내 스코틀랜드 왕국은 자유를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4) 이후 헥셈 소수도원(Hexham Priory)의 보호를 위해 쓴 편지에서도 앤드류 머레이와 윌리엄 웰레스의 이름은 나란히 언급되는데, 그들은 "존 1세의 이름으로, 왕국의 공동체의 동의 하에"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5개월 후 앤드류 머레이가 사망하고 나서 발표된 특허장에서는 '기사이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보호자이고 군대의 사령관인 윌리엄 웰레스가 존 1세의 이름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공동체의 동의 하에' 라는 문장이 보인다. 머레이의 사망 이후 윌리엄 웰레스는 권력을 독점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들에 담긴 일관성은 바로 윌리엄 웰레스의 권력이 스코틀랜드 공동체로부터 나온 것이고, 이를 존 1세의 이름으로 행사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비록 던바 전투의 패배로 존 1세가 폐위되고 잉글랜드에 인질로 잡혀 갔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웰레스는 그의 통치가 계속되고 있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윌리엄 웰레스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법적인 국왕의 부재 속에서도 실질적 통치자는 왕국의 공동체에 책임을 져야만 하고 공동체의 동의 속에서 그의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이 1305년 에드워드 1세가 월리엄 웰레스를 체포하여 재판을 진행할 때, 그에게 사적 독재권을 세운 책임을 지우지 못한 근거이기도 하다. *5) 윌리엄 웰레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발행한 영장과 동등한 영장을 발부하였으나, 스코틀랜드의 통치권은 존 1세에게 있다는 점을 초지일관 강조하였다.
스털링 브릿지 전투 이후, 월리엄 웰레스는 던디 시를 공격하고 버윅 시를 점령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잉글랜드 동쪽과 서쪽 경계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략했으며, 당대의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귀스버러는 스털링 브릿지의 패배 이후 노섬벌랜드에 닥쳐진 공포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였다.
"노섬벌랜드인들은 공포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부인과 자녀들을 재산과 함께 시골로 피난시켰다. 당시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소리가 뉴캐슬로부터 칼라일에 이르는 수도원들과 교회들에서 멈추었다. 수도사들도 스코틀랜드인들의 면전에서 도피하였다." *6)
다른 연대기에서는 "윌리엄 웰레스는 그의 앞에서 수녀들을 발가벗겨 춤추게 한 괴물과 같은 존재이다." *7) 라고 언급했다. 당초 윌리엄 웰레스는 뉴새클과 카라일의 전략적 이점에 끌렸고 칼라일에 대해서는 항복의 요구를 하였으나, 그 지역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는 주저하였다. 이는 그의 부대가 양 지역을 점령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방향을 바꾸어 잉글랜드 북서부의 컴벌랜드를 침략해 황폐화 시키고 스코틀랜드에 귀환하였다. 귀환 도중 헥섬 수도원의 제단이 있던 성배를 병사들이 훔치는 일이 발생했는데, "윌리엄 웰레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병사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수도사들에게 사죄하였다." *8)
그러나 웰레스의 전성기는 강적의 출현으로 인해 금세 위태로워졌다. 1297년 8월 22일, 스코틀랜드에 앞서 군사적 원정을 시도한 플랑드르에서 에드워드 1세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으며, 1299년 1월 6일까지 프랑스와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은 스털링 브릿지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그의 분노를 브리튼의 북방에 토해낼만한 여력이 생긴 것이었다. 비록 프랑스나 플랑드르 지역의 군사적 원정, 잉글랜드 바론들의 저항, 그리고 전비 마련을 위한 경제적 어려움 등이 있더라도, 그는 항상 윌리엄 월레스보다 강력한 대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1) Chronicle of Guisborough, p. 300
*2)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145
*3)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14
*4) Ibid pp.115
*5) Wallace Docs., pp. 191 - 192
*6) Chronicle of Guisborough, pp. 304 - 305.
*7) Chronicle of Lanercost, pp. 190.
*8) Chronicle of Guisborough, pp. 305 - 306.
첫댓글 브레이브 하트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잘 봤습니다~
freedom~~~~
전쟁사를 보다보면 이기는 쪽은 이길만한 준비가 있었고 진쪽은 질수밖에 없는 실수들이 있었던 같습니다. 좋은 자료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