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 사건과 광주 학생 운동
김채중, 40세. 김기수, 38세. 김봉수, 38세. 김용숙, 39세.
김보석, 36세. 김돈수, 38세. 김석숭, 38세. 김석호, 38세.
‧ 1923년 9월 1일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은 한인 폭동설을 조작하여 5000여명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 1926년 4월 26일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이 승하했다.
일제에 대한 민족 투쟁이 국내에 격화되고 있던 차에,
사회주의 운동자들을 중심으로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준으로 반일 시위를 계획하였다.
지도력 있는 인사들이 사전에 검거되어 가두 시위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족적 시위의 연속으로 동맹휴학이 계속 일어났다.
1929년 광주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일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는 모역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1월 3일 양측 학생의 격돌사건이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되고,
일본인 교사까지 가담하여
한인학생을 탄압하자 항일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까지 시위에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참가 학생 수 54,000명,
퇴학처분 582명, 무기정학 2,339명, 피검자 1,642명이다.
1943년 11월 27일, 국외‧ 국내에서 독립투사들의 항전에 힘입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1945년 4월 얄타회담과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 의해 한국의 독립인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조국은 광복되었다.
김채중(采中, 40세)은
당시 광주고보 4학년으로 주동자로 주목되어 퇴학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김기수(麒洙, 38세)는
2학년으로 참가했으나 퇴학당하였다.
김봉수(鳳洙, 38세)는
광주농고 4학년으로 ,농고 주동자로 참가하여 퇴학을 당하였다.
김용숙(容淑, 39세)은
중등중학교에 재학생이었지만, 광주로 내려와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
만보산 사건에 교내에서 동맹휴학을 선동하다가 3학년 때 퇴학을 당하였다.
김보석(寶錫, 36세)은
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때 참가하여 퇴학을 당하였다.
김돈수(燉洙, 38세)는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참가 투쟁하였다.
김석숭(碩崇, 38세)은
석호의 형으로 평북 선천에서 왜경을 구타하다가 구속되었다.
김석호(碩虎, 38세)는
석숭의 동생으로 신의주 고보사건, 철도 호텔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항일의 용감한 형제다.
석승,석호 형제는 임시정부 요인을 지낸 김석룡으로 혁명가의 집안이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