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5 광복
김영기, 37세. 김영헌, 37세. 김용근, 39세. 김용해, 39세.
김창헌, 36세. 김영남, 37세. 김영수, 37세. 김영규, 39세.
김선기, 41세. 김용각, 39세. 김필례,
1930년 이후 한국에 있어서 식민지가 안정 되어가자, 일제는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고 전쟁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우리 독립군 소탕작전을 벌렸다.
1937년에는 중, 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까지 침략하였다.
일본은 전쟁을 더욱 학대시켜,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1941년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히기 위해서,
한민족과 그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다.
한민족을 그들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강요당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한민족은 민족 존페의 위기에서 민족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학계와 교육계, 종교계와 예술계 등 각 분야에 걸쳐,
민족 주체의식과 민족문화 전통을 지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리민족은 일제의 통치 기간중
국내외에서 꾸준히 항일 및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나,
우리 힘으로 일본을 물리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일본 식민 통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드디어 광복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광복은 곧 독립으로 연결 되지 못하였다.
제 2차 대전에 승리한 미, 소 두 나라는의 군대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진주하였다.
광복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다시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다.
김영기(永驥, 37세)는
도쿄대학 동문화학원 본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대구사법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 교사였다.
정규시간 외에도 문예부를 중심으로 ‘다초당’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우리 역사를 틈틈이 가르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자각케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다.
비밀 독서회 사건이 탄로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개성에 있는 사립 송도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원로교육자로 대우 받으며 대구 시내 여러 중, 고등학교 교장을 엮임하였다.
건국공로 포상을 받았다.
김영헌(永憲, 37세)은
팔판과 시초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몽양 여운형의 지도하에 독립동지회 소속으로 할동하며.
학생과 그곳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44년에 종로의 광화문 일대에 민족 궐귀 전단을 살포하다가 최포되어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광복을 맞아 출소하였다.
김필례(弼禮,)는
도쿄 여자학원 고등부를 졸업하고
서울 정신여자중학교 교유로 재직하면서 3.1운동을 겪었다.
1922년 그 학교 교감이되어 김활란, 유옥경과 함께
대한 여자기독교 청년연합회(Y.W.C.A)를 창립하였다.
총무가 되어 농촌운동과 여성지위 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
미국에 건너가 네스칼 대학과 컬비아 대학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광주 스피아 여중의 교감이 되었다가, 해방후 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서울 정신여중의 교장을 거처 동교 이사장을 엮임하는 등
여성교육가로 활약하였다.
김용근(容근, 39세)은
영광군 소재의 개량서당 훈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패전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용해(容海, 39세)
는 침례교회의 목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전국 32인 구속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종교계의 항일사례다.
김창현(昌鉉, 36세.)은 일제의 지원병 강요에 반항했다.
김영남(永南, 37세)은
징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화약고 폭파계획을 세우다가,
옥고를 치르고 징병 거부의 항쟁에 앞장섰다.
김영수(永壽, 37세)는
전북 고창인으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헌병대 습격을 기도했다.
김영규(永圭, 39세)는
전남 보성인으로 조선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김선기(善琪, 41세)는
경기 화성인으로 조선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김용각(容珏, 39세)은
창씨개명에 불복하여 계자손십자훈(戒子孫十字訓)을 남겼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