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李熙容)의 『쌍석유고(雙石遺稿)』
『雙石遺稿』는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권1에는 20首의 詩와 松沙 奇宇萬, 勉菴 崔益鉉, 植齋 奇宰, 弦窩 高光善 등에게 보낸 70여 편의 편지글이 실려 있다. 권2에는 雜著,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이희용의 「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20여 인의 서문과 작품이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이어 松沙가 보낸 17편의 편지인 「長洞往復」 와 勉菴이 보낸 6편의 편지글 「長德徃復」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金珍鉉이 쓴 행장과 尹丁鍑이 쓴 묘갈명,魏啓道와 李龍鎬가 쓴 발문이 있다.
집필자 : 김봉곤
이희용에 대한 인물 정보
자는 國瑞, 호는 雙石, 본관은 全義로, 1853년 1월 27일光州 黑石洞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독실하게 배웠다. 1874년 약관에 長城의 蘆沙의 문하에 들어가, 1875년 莘塢 金祿休와 사귐을 맺고 노사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1879년 勉菴 崔益鉉을 만났다. 1879년 12월에 노사선생이 별세한 후로는 老先生을 섬기는 마음으로 松沙 奇宇萬을 모셨다. 1884년 어머니 상을 당했으며, 1891년 式年試 進士에 급제했다. 1896년 송사 기우만이 격문을 각 읍에 띄워 의병을 모집할 때 시종 같이 일하다가 해산의 왕명을 받고 통곡하고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낚시로 소일했다. 1898년 경술국치를 분통해 하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모가 주신 머리털을 훼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단발을 하지 않았다.
그의 10대조 石灘 李愼儀를 위해 遺愛祠 옛터에 藏閣을 건립했다. 또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城市의 티끌에 발을 들어놓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정원 앞에 雙石亭을 세우고 花鳥雲月에 마음을 붙쳤다. 이 雙石亭에서 弦窩 高光善․石陰 朴魯述․後石 吳駿善․植齋 奇宰․普山 奇宇承 등의 일대 명사들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스스로 실천궁행의 학문에 힘쓰다 79세의 일기로 1931년 6월 30일에 타계했다.
부인 長興高氏 사이에서 敎一과 敎翼 2남과 2녀를 두었다.
집필자 : 김봉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