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考歙谷縣令府君夫人柳氏墓合表(조고흡곡현령부군부인류씨묘합표)
< 출처 : 청강집, 저자 이제신(1536-1583, 전의이씨로 이예장의 고손) >
我國重世閥有數者。必曰三韓之甲。惟天降子靑木中。專畀我有東。峕則英雄奔走服力。誕翊以登之。全義人李公諱棹。通木道濟師。位大師。儒州人柳公諱車達。出車秉運餽。位大丞。同策統合功。各爲兩家初祖。大師之世曰大將軍康兵部尙書秀英,大將軍文景,刑部侍郞允寬,保勝別將順知,禮部事仟,密直司事子華,典法佐郞得榮,戶曹典書丘直,孝靖公貞幹,觀察使士寬,襄簡公恕長,副正允純凡十三。仁孝名家。克生賢嗣。寔我王考。妣卽漢城庶尹南公任之女。 大丞之世曰左尹孝金,大將軍金奐,大將軍盧一,少監寶春,少監寵,文簡公公權,左僕射澤,文正公璥,貞愼公陞,章敬公墩,代言總,判府事曼殊,中樞院使殷之,文城君洙,府使季孫凡十五。忠烈耀門。克生淑媛。寔我王毋。妣卽義州牧使張公孟昌之女。王考諱仁孫。字宗孝。以門地。歷成歡,金泉等道察訪,北部司䆃寺豐儲倉,南部典獄署等司主簿,聞慶靑陽高靈縣監,歙谷縣令,司憲府監察。壽六十七歲卒。嘉靖癸卯六月壬辰也。王母與享祿位。以命婦爲淑人。壽八十三歲卒。嘉靖癸亥十一月壬午也。合葬于衿川馬場 原大墓兆後。王考天性恭儉。事親以誠。奉祭以謹。承基傳緖。甚得理義。王母資識明達。克裕內蠱。遇有艱疑。所助尤深。善慶攸鍾。媲美作求。宜錫不匱。卒蔑有續。以我先君諱某後之。乃襄簡公之兄。平簡公禮長之曾孫。判決事時寶孫。楊州牧使諱公達第三子也。曾分虎符。節度累道。視秩追崇。竝命二親戶曹參判。妣皆封貞夫人。曾祖副正府君。亦贈刑曹參議。王毋逮奉恩麻。泣曰。我始婦於女家。術者謂乃祖雖無血胤。當膺子貴。豈知泉下廿載。有此戾契。每感奉養勤至。歎曰。脫使老身。生子不賢。寧享是孝乎。國 家亦命有司。月繼酒肉。其享天恩。又至矣。嗚呼。孤孫某。以奉褓兒。最承恩愛。薦名儒科。曾穢臺省。繄遣訓是承。敬述先志。琢玆密石。備列勳德之高貴有自。以揭吾門之不但三韓甲姓而已。某且有子耆俊,壽俊,耈俊,命俊。有孫重基,厚基。恪守宗事。庶幾無忝云。萬曆四年歲次丙子九月庚寅朔八日丁酉。孤孫前中訓大夫。司憲府持平,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某。泣血謹表。
1. 위 묘표는 이예장(1406-1456)의 고손자인 이제신(1536-1583)의 본인의 조모이신 문화류씨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신의 조모는 문화류씨 류계손의 딸이고 류계손의 아버지는 류수(1415-1481)입니다.
2. 전의이씨인 이제신의 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득영 -이구직(1339-1394)-이정간(1360-1439)-이사관(1382-1440)-이예장(1406-1456), 이서장등 이사관은 7남2녀를 두어 다 현달하였음
(2) 이제신(1536-1583)의 아버지는 이문성(1503-1575)이고 이문성이고 원래 이문성은 이예장의 증손자로 이예장-이시보-이공달-이문성-이제신인데 이문성은 이예장의 동생인 이서장의 손자인 이인손이 아들이 없자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이인손의 배위가 문화류씨 류계손의 딸이고 류계손의 아버지는 문성군 류수입니다.
3. 위 묘표를 이제신이 언제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대중반에 쓴 것으로 추정(묘표 하단 만력 4년이 나온 것으로 보아 1576년정도?)되나 위 묘표에서는 조모이신 문화류씨 계보가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신의 나이를 고려하면 문화류씨 가정보가 1562년에 간행되었으므로 이를 보고 참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남자의 경우에는 4대조 정도 여자의 경우에는 2대조 정도만 기술하는 것이 관례로 알고 있으나 이제신의 친조모도 아닌 문화류씨에 대하여 그 계보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4. 제가 이 묘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제신이 전의이씨로 이예장, 이서장의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예장, 이함장, 이서장등 몇몇 전의이씨가 차원부 설원기에 등장하고 있고 이예장은 응제시에서 류-차동원을 밝히는 주석을 낸 장본인입니다. 참고로 이예장은 1456.2.25. 사망했음
5. 만약 이예장의 응제시에 있는 류-차 동원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전의이씨 가승등에 의하여 그 후손인 이제신이 조모의 묘표를 쓸 때 이런 사실을 한번 쯤 쓸 법 한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6. 고려말부터 조선초기까지 문화류씨는 전의이씨와는 많은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1562년에 간행된 문화류씨 가정보를 보면 전의이씨 관련 내용이 상당한 분량으로 나옵니다. 예를들어 이구직의 아버지인 이득영은 문화류씨 류정(지후사공파 류인수의 장자)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구직은 김인관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인관의 문화류씨 류돈의 사위이고, 이정간은 문달한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문달한의 아버지 문경이 문화류씨 류당의 사위이고, 이정간의 셋째 아들인 이사신은 윤보로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윤보로의 아버지는 윤수미이고 윤수미의 장인이 문화류씨 류사눌입니다. 그리고 이정간의 넷째 아들인 이사민의 아들이 이병정이고 이병정의 사위가 문화류씨 류계선(문화류씨 좌상공파 판관공으로 저희 문중)입니다. 그리고 이 묘표에 나오는 이인손의 장인이 문화류씨 류계손이고 류계손의 아버지가 문성군 류수(문화류씨 좌상공파 문성공종중)입니다. 이와 같은 문화류씨와 전의이씨의 혼인관계는 대표적인 것만 간추린 것이고 더 찾아보면 더 많은 있을 것입니다.
7. 문화류씨 가정보에는 그 당시 사대부 집안의 5만여명의 사람이 나오고 과거 급제자중 70%이상의 인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차원부가 1388년 왕,차,류 족보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차원부가 혼자 골방에서 붓을 휘갈려 족보를 만들어서는 그런지 몰라도 문화류씨 영락보, 문화류씨 가정보, 기타 1600년 이전 족보, 문헌등에는 류-차 동원이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차원부 설원기와 응제시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어찌보면 문화류씨 가정보에 대부분 등재된 인물로 추정되는데 1562년 문화류씨 가정보를 류희잠께서는 혼자 골방에서 앉아서 만든 것도 아니고 근 30여년간 300여명의 사람이 만든 족보인데 그 사람들이 연안차씨와 무슨 원수지간이라고 류-차 동원이 사실이라면 왜 그런 내용을 족보에 담지 않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