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종이 달>(요시다 다이하치, 스릴러/드라마, 15세, 2014)
<종이 달>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 소설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 가쿠다 미스요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소설도 뛰어나지만 영화 역시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부분에서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종이 달’이란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남녀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종이로 초승달을 만들어 사진의 배경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다. 영화는 소설에서와는 전혀 다른 서술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또한 소설에는 없는 캐릭터를 등장시킬 정도로 과감한 각색을 거쳐 태어났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도 소설과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2014년 일본 NHK 방송에서 5부작으로 방영된 바 있다. 같은 해에 영화로 나왔으니 그 인기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매체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느낌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첫 부분은 다소 긴 서두가 될 것 같은데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 생각하길 바라며 독자들의 인내를 구한다.
1.
일을 하는 자나 일자리를 찾는 자에게 물어보자. 왜 일을 하는지, 왜 일을 하려고 하는지. 여유를 갖고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물어보자.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왜 그렇게 사는지. 아마도 비슷한 대답을 들을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혹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다. 아니 미래의 행복을 준비하거나 생각하며 사는 동안 현재는 행복한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며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도 있으니 더욱 힘이 난다.
미래에셋의 광고 중에 노후 연금을 마련한 두 남녀가 각각 기쁨에 겨워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노후 연금이 보장된다고 해서 행복해질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는 현실에서 노후 연금이 있다고 해서 노후에 행복을 누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없는 사람에 비해선 그나마 낫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과 행복은 별개의 일이다. 엄밀히 말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에 느끼는 행복이나 미래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행복 모두는 실제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산다는 말은-만일 그 일이 현실이 된다면-행복은 준비될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고, 또 지위도 높아져 명예를 얻으며 권력을 얻게 되니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말에는 행복이 돈의 축적을 통해 혹은 명예욕의 충족을 통해 혹은 권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에 어긋나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명예와 권력과 돈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행복을 위해 일하는 동안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삶을 사는 것이고, 여기에 행복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체 누가 알 것인가? 이런 회의적인 질문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며 사는 삶이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사실 최근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적어도 그런 깨달음이 확산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현대인은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거나 유보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사람이 그날 벌어 그날 쓸 수 없는 까닭은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미래가 안전하게 보장된다면, 무엇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할 것인가?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더라도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획득하여 안전한 미래를 보장받으려 한다.
2.
서두가 길어졌으나 <종이 달> 이해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뒷부분부터 시작하면, 은행 계약직으로 일하는 리카는 선배 스미에게 횡령사실이 발각되어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전락된다. 조사를 받고 앉아 있는 리카를 보고 스미는 오히려 자신을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평생 미래에 대한 꿈만 꾸었을 뿐, 결코 실제로 누려보지 못했는데, 리카는 비록 잘못된 방법이었다 해도 원하는 삶을 실제로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삶을 맘껏 살다가 마침내 붙잡혀 범죄자의 신분이 된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보지 못한 꿈만을 가진 채 가상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더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만일 이것을 현실로 옮긴다면, 세상은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범죄가 넘쳐나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의 행복에 올인하는 삶은 적어도 계몽된 인간에겐 결코 적합하지 않다. 만일 이런 일이 현실이 된다면, 루소가 말한 괴물 리바이어던의 출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도덕과 윤리가 허용하는 범위에서’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는 한, 스미의 말을 결코 수긍할 수 없다. 영화는 이렇듯 윤리적으로 꽤나 많은 논란이 될 화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리카 자신은 스미가 말한 바와 달리 그동안 고객의 돈을 갖고 화려하게 살았던 삶을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쉽게 지워지는 삶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모든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 ‘종이 달’은 가장 행복했던 때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은 돈을 비유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곧 리카는 고객의 돈이긴 해도 그것으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남의 돈으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맘껏 누렸으면서도 그것을 가짜로 생각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혹시 고액의 돈을 버는 일에서 책임 있는 삶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삶은 그것이 어떤 형태라도 실제가 아님을 역설하는 것일까? 돈을 기초로 사는 삶을 겨낭한 말일까?
이밖에도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문다. 횡령을 행한 동기에 관한 것이다. 회사에서 잘 나가는 남편을 둔 평범한 가정주부인 리카는 왜 그런 범죄에 빠지게 되었을까? 영화에는 분명히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몇 개의 장면을 통해 유추해낼 수밖에 없다. 단서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면서 행복을 느꼈던 어린 시절 리카의 독특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진행되는데, 현재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단서로 과거의 이야기가 사용된다. 리카에게는 어린 시절 태국의 한 아이를 도우면서 스스로 행복해했던 때가 있었다. 반 아이들이 더 이상 기부를 하지 않게 되자, 그 행복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 리카는 반 전체 학생이 모아야 가능한 액수를 혼자서 감당한다. 물론 아버지 지갑에서 훔친 것이었다. 이것을 문제 삼자 리카는 자신이 들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항변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성인이 된 리카의 삶을 이해해보자. 월급이 오르자 남편을 위해 시계를 구입하는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리카는 남편을 기쁘게 해주고,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길 노력한다. 그러나 리카의 노력에 비해 남편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회사 일에만 열심이고, 아내인 리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집안에 대한 관심도 또 아이를 갖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돈을 버는 능력에서 리카가 열등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과시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행복을 줌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싶었던 리카는 적어도 가정에선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자신의 헌신을 받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백화점 화장품코너에서 점원에게 이끌려 고가의 화장품을 사게 된 까닭도 그것이 자신의 공허하고 우울한 마음을 숨겨줄 적당한 방법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곳에서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처음으로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카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코타와의 만남이다. 우연히 고객의 집에서 만난 고객의 손자 코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리카는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의미의 말을 하면서 충동적으로 그와 불륜 관계를 갖게 되는데, 부자인 할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선 거액의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채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코타를 돕기 위해 고객의 거액을 유용한다. 리카는 남편에게서 얻지 못한 무엇인가를 코타로부터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자신의 헌신으로 코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리카는 둘만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객의 돈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수십 억 원의 고객 돈을 가로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집안에 놓인 무질서한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은 점점 피폐해져감에도 불구하고, 리카는 코타가 행복해 하고 또 그런 코타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마침내 그녀는 동료직원 케이코의 말대로, 흔히 일어나는 일쯤으로 여기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리카는 자신의 도움으로 행복해할 줄 알았던 코타가 또래의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헌신으로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즈음에 리카의 범죄행각이 스미에게 발각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가짜였다고 말하면서 창문을 깨고 도주한다.
앞서 제기된 질문은 여기서 반복된다. 도대체 그녀가 말하는 가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돈으로 세워진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할 경우, 그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큰 혼동에 빠지게 된다. 곧, 은행 창문을 부수고 태국으로 도주한 리카는 자신이 어렸을 때 도왔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빠가 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에 돈으로 세워진 세계가 가짜라면, 태국에서 만난 그의 현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가짜일 수 없었다.
사실 이 장면은 리카는 물론이고 영화를 보는 나조차도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아빠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면서까지 기부한 것이나 고객의 돈을 유용하며 살았던 것은 지금까지 이야기로 보면 분명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국에서 그가 실제로 반듯한 가장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충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종이 달>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과는 달리 대답하기보다는 질문을 제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재와 미래, 가짜와 진짜 사이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진짜 삶을 위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메시지는 없을까? 그녀가 태국에서 자신이 도왔던 사람이 파는 사과를 먹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이 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임을 확인하는 행동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분히 성경 속 선악과를 따먹는 하와를 연상케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다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곧, 행복을 위해 현재를 올인하는 삶은 결코 무의미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쾌락을 주는 돈에 기초하려고 한다면, 허무한 결과로 끝날 것이다.
지금까지 내용에 비춰보면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은 특별할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성경구절을 화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나의 행복을 포기 혹은 유보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가치에 근거한 태도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천국을 위해 현실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며 사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한다. 헌신이라고 하고 희생이라고 하고 때로는 순교라고도 한다. 이것을 천국을 위해 보화를 예비해두는 것으로 믿는다.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현재를 즐기고, 고진감래보다 순간의 기쁨을 누리며 산다는 말은 기독교인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만일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은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만일 천국을 위한 존재가 되는 부활이 없다면, 자신이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만큼 바울은 천국을 위해 현재를 올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본다면, 반드시 현실로 경험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