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2015년 봄호.
우리 문학의 순간들
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茉莉書舍)>
맹문재
1.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이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차린 서점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해방이 된 해를 넘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인환은 아버지한테 3만원을 얻고 이모한테 2만원을 얻어 종로3가 2번지, 즉 낙원동 입구에 서점을 차렸는데, 그 옆에는 이모부의 포목점이 있었다. 박인환이 서점을 차린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를 바랐을 뿐이고 실제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시를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시와 영화 등에 빠져 경기중학교 2학년 때 자퇴한 사실을 보면 이와 같은 면은 충분히 유추된다.
양병식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마리서사에는 마치 외국 서점의 분위기를 느낄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가령 앙드레 브르통의 책, 폴 엘뤼아르의 시집, 마리 로랑생 시집, 콕토 시집, 일본 고오세이가꾸에서 나온 『현대의 예술과 비평』 총서, 하루야마 유키오가 편찬한 『시와 시론』, 가마쿠라 문고에서 나온 『세계 문화』,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인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 등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1) 박인환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들을 내다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는 책을 좋아했던 것이다.
2.
박인환 시인이 마리서사를 차린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서점을 차린 때가 스무 살이므로 한창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다. 그리하여 박인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배웠고 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갔다.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길영주(화자), 김광균, 김기림, 김병욱, 김수영, 박영준, 박일영, 배인철, 설정식, 송기태, 송지영, 양병식, 오장환, 이봉구, 이시우, 이한직, 이흡, 임호권, 조우식, 최재덕(화가) 등이었다. 물론 뒷날 부인이 된 이정숙 여사도 빼놓을 수 없다. 박인환은 그들과 어울려 시와 예술을 논하고 동인을 구상하고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는 박일영(朴一英)이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마리서사의 간판부터 내부 시설에 이르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정숙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박일영은 임호권 시인의 동네인 재동 근처에 살았는데, 화가로서 입신하기보다는 영화관의 광고 간판을 그리며 살아갔다. 박인환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인 김현경 여사의 증언은 더 구체적이다. 박일영의 본명은 박준경이었고 사람들이 ‘복상’이라고 불렀다. 복상이란 일본 말로 박 씨라는 뜻이다. 그는 종로3가 쪽 와룡동에서 살았는데 몸이 약하고 결혼도 안 했다. 주로 극장의 간판을 그리거나 무대 장치를 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박인환이나 김수영은 박일영과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그가 예술가로서 철저한 은자(隱者)였기 때문에 좋아했다. 박일영은 단순히 간판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콕토, 자코브, 도고 세이지, 브르통, 트리스탄 차라 등 전위시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세계에 눈뜨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김수영에게는 예술가의 양심과 세상의 허위를 가르쳐주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김수영 시인 역시 주목된다. 김수영은 자신의 헌책을 팔려고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러는 동안 박인환을 통해 미기시 세츠코, 안자이 후유에, 기타조노 가츠에, 곤도 아즈마 같이 난해한 시를 쓰는 일본의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박인환의 습작시들을 의무적(?)으로 읽어보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박인환이 일본말이 서툴고 조선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식물, 동물, 기계, 정치, 경제, 수학, 철학, 천문학, 종교 분야에 사용하는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시에 쓰는 것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 김수영이 시인이 시어를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이렇듯 박인환의 영향이 컸다.
3.
서점의 이름이 ‘마리서사(茉莉書舍)’인 데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한 가지는 김수영 시인이 「마리서사」라는 산문에서 밝혔듯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의 첫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인들에게 관심을 받았던 안자이 후유에는 1929년 시집을 간행했는데, 『군함말리(軍艦茉莉)』의 발음이 ‘군칸마리’였기 때문에 빌려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의 견해는 박인환 시인의 아내인 이정숙 여사가 증언한 것으로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이정숙 여사는 박인환 시인이 마리 로랑생을 좋아해 그녀의 이름을 서점에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마리 로랑생은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의 연인으로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정을 표현한 화가이다. 마리 로랑생과 아폴리네르는 서로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이 두 가지의 견해 중에서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쪽이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이정숙 여사의 증언이 있는데다가 마리서사를 배경으로 임호권 시인과 찍은 사인을 보면 서점의 출입문 유리에 불어로 쓴 광고들이 많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리 로랑생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박인환 시인은 마리 로랑생 같은 여성을 자신의 시세계에 영감을 주는 연인이자 이상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박인환이 ‘마리’의 한자 표기를 고민하다가 『군함말리』에서 빌려왔을 수도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인 박일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의 주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두 가지의 견해 모두 마리서사의 이름을 짓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리(茉莉)는 물푸레나뭇과의 상록 관목으로 키는 1미터 정도이고 여름에 희고 누런 통꽃이 피는데, 잎은 식용하고 꽃의 향기가 있어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4.
마리서사가 한국 문단사에 남긴 의의는 김수영 시인의 진단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이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에 예술 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문명(文名)이 있는 소설가 아무개보다는 복쌍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더 무게를 가졌던 시절이”2)었다고 회고했다.
김광균 시인이 회고한 대로 마리서사는 2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서점이었다.3) 그리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서점이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마리서사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책을 사거나 파는 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문학청년들이었다. 그리하여 마리서사는 그들이 모여 예술을 이야기하며 노는 소굴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만남이 있었기에 좌우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던 시대에도 정치에 함몰되지 않는 예술이 존재할 수 있었다. 박인환의 마리서사가 그 아지트를 제공해준 것이다.
* 사진 설명
1947년 3월 마리서사 앞에서 임호권 시인과 함께
맹문재 약력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안양대 국문과 교수. 시집 『기룬 어린 양들』『사과를 내밀다』『책이 무거운 이유』 등.
2015년 01월(마리서사, 대산문화).hwp
1) 양병식, 「한국 모더니스트의 영광과 비참」, 『세월이 가면』(김광균 외), 근역서재 1982, 94쪽.
2) 김수영, 「말리서사」, 『김수영 전집 ������ 산문』, 민음사, 1995, 74쪽.
3) 김광균, 「마리서사 주변」, 『세월이 가면』(김광균 외), 근역서재 1982,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