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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 : 1 - 7, 하나님이 받으신 감사
오늘도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 멘
오늘은 우리 교회생일입니다. 다음 주는 보통 추수감사절로 드립니다. 감사 축제가 연속되어져서 우리는 추수감사와 함께 설립감사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추수감사절, 무엇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가 될 수 있으며 또 온전한 축복이 되는 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예물과 감사를 드리고도 축복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예로 행5:1절 이하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다가 거액의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인 죄로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막12:42절과 눅21:2절의 말씀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는데 한 렙돈은 1,172원밖에 안 되고 과부가 넣은 2렙돈은 2,344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막12:42-44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또 흠이 없고 정결한 것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미6:7-8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그 유래를 생각할 때
1620년 청교도들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알미니우스파의 반대에 부딪쳐 그들은 1620년 12월에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 매사추세츠 주에 상륙하여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안 으로부터 배워서 가꾼 옥수수와 호박 등을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제로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1884년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추수감사 절기도 함께 지키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 광야에 머물 때 모세를 명하여 율법들을 주셨는데 그 때에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4-16절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거둔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와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 절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마침내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때부터 맥추절도 지키고 수장절,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창3:17-19절에서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초로 농사를 지은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로 아담의 직업(가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업은 아담의 장남인 가인이 이어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이 말씀은 ‘와예히 믹케츠 야밈’으로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이 있었다. 즉 인생의 날들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추수의 결산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끝에는 자신이 거둔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께서 받으시는 것이 있고 물리치는 것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자신들이 수고한 것을 거두고 결산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것 중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는 받으시고 하나는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거절당하자 가인은 자기의 성질을 참지 못하여 안색이 변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결국 시기심과 분노로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을까요? 하는 의문에 우리는 부딪치게 됩니다. 이 땅에서 그 어떤 해석도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찾아 보아야 합니다.
원어에서 제물로 번역된 ‘민하’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존경심 혹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을 말합니다. 이것은 꼭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고 일반 세속에서 사람에게도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존경심이나 감사가 빠지면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감사가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올려 드린 제물에는 하나님을 향한 존경심이나 감사가 없는 형식적인 제물이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삼상16:7) 많은 주석이나 목사님들이 설교 하실 때 양의 피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들을 근거로서 말씀하시지만 히11:4절에는“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어떻게 제물을 드렸을까요.
아벨이 양 새끼를 바친 이유는 본인의 생업이기 때문입니다.
창9:3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육식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양을 치는 것은 먹기 위해서 기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은 옷은 짐승을 잡아서 만든 가죽옷 밖에 없었습니다. 즉 가인은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담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입을 것을 위하여 양을 기르고 그 가죽을 벗기고 그것으로 곡식을 바꾸어 먹으며 살았다고 유추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 새끼 밖에는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 새끼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치 않으신 이유가 그 제물이 양이냐 곡식이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그 드리는 사람이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15:8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받으실 때 제물의 종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농산물이기 때문에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과 뜻과 믿음과 나아가서는 그의 인격과 신앙까지를 보십니다. 아벨의 제물을 살펴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에서 첫 새끼‘밉베코로트’ 단수가 아닌 복수로 가장 뛰어나고 좋은 것을 한 마리가 아니라 첫 새끼들 중 몇 마리를 잡아서 기름과 고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과 달리 제물을 고를 때서부터 최고의 것으로 드릴려고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가인은 그냥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리고. 가인은 최고로 좋은 것을 골라 드렸다는 말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대충 드린 것입니다. 정성이 빠진 대충 하는 예배는 하나님 안 받으신다 하시는 것입니다. 왜 대충할 까요. 하나님의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도원에 좀 모자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같은 동료 수도사들은 놀리고 왕따를 시켰지만 원장 수도사님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수도원장님이 새를 한 마리씩 주면서 아무도 안보는데서 죽여 오라 했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다 죽여 왔는데 이 멍청한 수도사는 해가 질때쯤 왔는데 그의 손에는 새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원장님이 물으셨습니다. 왜 너는 새를 살려서 가져 왔느냐.
그러자 그 멍청이 수도사는 말하기를 아무리 다녀 보아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데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장님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그 수도사는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고 했습니다. 열납은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납’히‘와이솨’는 ‘응시하다. 둘러보다’로 최고의 제사를 드린 아벨을 응시하시고 주의 깊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신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님의 깊은 관심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히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혹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4: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죄를 용서받고는 다시 나가 또 죄를 짓고 그러고는 또 다시 제물을 드리는 이와 같은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아무쪼록 금년 우리모두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림으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셔서 기쁨으로 받으시고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으시는 놀라운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 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
글을 읽으신후 댓글은 사랑의 표현 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