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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全懿 ]
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1230년(고종 17) 8월 최우(崔瑀)의 동생 최향(崔珦)이 충청도 홍주(洪州)로 귀양 간 이후 지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전의(全懿)는 당시 안찰사(按察使)(주1)로서 병마사(兵馬使) 채송년(蔡松年)(주2)이 지휘하는 정부군을 보좌하며 난의 토벌에 앞장섰다.
그는 최향의 당파였던 김수연(金壽延), 박문재(朴文梓)를 사로잡았으며 경상도 상주(尙州) 등에 공문을 보내어 유송절(柳松節)(주3) 등을 체포해서 죽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의 [Jeon Eui, 全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국통감 권31 고려기(東國通鑑 卷31 高麗紀) 고려 고종 17년, 경인년(庚寅年), 12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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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안찰사[ 按察使 ]
고려 때 도(道) 단위로 파견되었던 외관.
고려의 지방제도는 전국의 주요지역에 목(牧)·도호부 등의 계수관을 두고 이를 통해 주위의 군현을 통할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전국을 일정한 행정구획으로 구분하는 도제(道制)를 실시하여 효율적인 지방통제를 꾀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는데, 이러한 가운데 예종조 이후에는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의 5도를 단위로 안찰사가 파견되었다. 안찰사는 이전에도 서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나 예종 때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파견되었다.
안찰사는 초기에는 주현을 순찰하는 감찰관으로서 임기는 6개월이었으며, 이들이 파견되는 단위였던 도의 소관구역과 명칭도 수시로 변동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면 도의 소관구역이 고정화되고 지방행정상 안찰사의 비중이 높아져 감찰임무에서 행정관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임기는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되고 그 아래에 경력사(經歷司)라는 사무기구까지 설치하고 관직명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칭되어 도 장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찰사 [按察使]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주2)채송년[ 蔡松年 ]
채송년(蔡松年)1)은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의 평강현(平康縣 :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사람이다. 어전행수(御殿行首)를 지내다가 낭장(郞將)에 임명된 후 한참이나 관함을 바꾸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자, 곁의 사람이,
“그의 아비가 아직 참직(叅職)2)이 되지 못했는데, 만약 관함을 바꾸고 조정의 벼슬길로 나갈 경우 아비가 멀리서 보고 자기 자식인줄 모르고 말에서 내려 피해 달아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고 일러 주었다. 최충헌이 옳은 일이라 여기고서 곧 그의 부친에게 참직을 주었다. 채송년은 이 일로 최충헌의 인정을 받아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어사대부(御史大夫)·참지정사(叅知政事)로 계속 승진했으며, 고종 38년(1251)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끝으로 죽었다. 그는 자태가 단아 수려하였고 성품이 온화해 시종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시호는 경평(景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채송년 [蔡松年]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주3)유송절[ Ryu Songjeol , 柳松節 ]
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유송절(柳松節)은 최충헌(崔忠獻)의 심복으로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는데, 최충헌의 심복이었던 것으로 보아 도방(都房) 무신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최충헌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대장군(大將軍) 최준문(崔俊文)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 이외에도 상장군(上將軍) 지윤심(池允深), 낭장(郎將) 김덕명(金德明) 등과 긴밀한 관계였다.
유송절은 1219년(고종 6)최충헌이 노환으로 사망할 것으로 보이자, 후계자로 지목받은 최우(崔瑀)에게 숙청당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최준문·지윤심 등과 더불어 최충헌의 막내 아들 최향(崔珦)을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뜻을 같이 하였던 김덕명이 이 사실을 최이에게 몰래 알려줌으로써 최향 추대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최우 세력에 의해 최준문은 죽임을 당하고 유송절 등은 남해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홍주(洪州)로 귀양 간 최향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유송절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자 내응하였다. 최향의 반란이 진압되자 유송절은 안찰사(按察使) 전의(全懿)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송절 [Ryu Songjeol, 柳松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