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어느 개신교 목사님은 신문 기고에 '요즈음 집회나 기도모임에 가면 성도들의 기도가 우려할 정도로 순수성을 잃고 겉포장만 멋있게 꾸밀 뿐 진정 하느님과 소통은 별로 중요시 하지 않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고 걱정스럽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문제의 기도 유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미사여구를 남발하면서 아름다운 말로 꾸미는 기도, -남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유창한 말솜씨를 뽐내는 기도, -지나친 경건과 존칭으로 포장한 기도, -기도인지 설교인지 헷갈리는 기도, -자기 흥에 취해 목청을 높이고 몸부림치면서 웅변하듯 하는 기도, -기도 주제나 취지와 전혀 맞지 않게 자기 자랑만 늘어 놓는 기도 등
모두 순수성과 진실성이 결여되고 남에게 과시하기위한 기도라는 것이지요.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과의 소통이자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미사여구로 꾸민 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소통이나 약속보다는 자신의 기도 실력을 자랑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5~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혼자 조용히 올리는 묵상기도가 아닌 집회나 예배모임 또는 교회행사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어렵고 나름대로 훈련이 필요하며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흔히 논리적으로는 찬양, 고백, 감사, 간구를 적절히 배합해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대로 기도에 진정성이 담기고 간절함이 담길 때 비로소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것이지 미사여구로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간구보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고 과시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기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설교는 인간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고. 설교는 시간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영원을 움직인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실려 있는 기도, 진심이 실려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사여구를 지나치게 남발하고 자아도취에 빠져 신이 나서 올리는 기도가 과연 하느님과 대화이고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가정에서 가령 아들이 “아버지 용돈 좀 주세요” 하면 되는데 미사여구를 지나치게 사용한다면 얼마나 가식으로 들릴까요. “인자하시고 훌륭하신 아버지, 용돈이 필요하여 아버지께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오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옵고 기쁜 마음으로 용돈을 주시옵기 바랍니다.” 과연 아버지가 감동하시고 기뻐하실까요? 간단하게 한마디의 기도를 지나친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거창하고 장황하게 기도를 드린다면 과연 하느님께서 감동하실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얘기는 다르지만 떄때로 기도를 편리하게 써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사람은 급전이 필요해 부유한 동생에게 돈을 꿔달라고 했습니다. 금방 꿔줄 것 같던 동생이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 신앙심이 남다르고 매사에 하느님 말씀을 입에 달고사는 동생은 “형님, 돈을 꿔줘도 좋다는 하느님의 응답이 아직 없습니다.” “야이 새끼야 그만 둬” 이게 마지막 대화입니다. 확신하건데 하느님의 답변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고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도 기도를 드릴 때 멋지게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우리 성공회 교인들은 기도가 약함을 교인 스스로 시인합니다. 좌우간 멋지고 유창하게 기도하는 교우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듣기 좋은 미사여구를 남발하여 우유보다 매끄럽고 부드럽게 기도를 올릴지라도 진실성이 없는 기도는 결국 하느님도 사람도 감동시키지 못하고 소통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A place called morn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