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버포스와 클래함 공동체 비전 크리스천 CEO 과정 ① / 한 홍 목사
4년 전에 하용조 목사님과 함께 비전그룹, 평신도 리더십 컨퍼런스에 대한 꿈을 꾸면서 벤치마킹할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1759 ~1833)입니다. 저는 오늘 윌리엄 윌버포스와 클래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EO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윌버포스 18세기 말, 윌리엄 윌버포스가 태어나서 활약하던 시절의 영국은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는 영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의 미국과 중국을 합한 것만큼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던 나라가 영국입니다.
영국의 가장 큰 죄악은 노예제도를 현실화 시킨 것입니다.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2백만 명이 넘는 흑인들을 미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사실 살아남은 자가 2백만 명이지 실제로는 6백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혹독한 대서양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고기밥으로 던져졌을 것이란 것입니다. 윌버포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는 1759년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출생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소위 말하는 ‘재벌 2세’였습니다. 게다가 언변과 머리가 좋아서 21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됩니다. 그 후로 41년간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윌버포스는 20대 중반에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가 회심하고 나서 평생을 아침 식사 전에 매일 2시간씩 기도와 성경묵상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윌버포스는 그 습관을 평생 지켰습니다. 그는 상류사회 문화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지켰다고 합니다.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윌버포스가 어느 날 정치에 회의를 느낀다면서 존 뉴턴 목사를 찾아와 신학교에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존 뉴턴 목사는 노예선 선장 출신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훌륭한 목사였습니다. 이 때 존 뉴턴 목사는 윌버포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의 부르심은 교회가 아니라 국회다. 국회가 당신의 목회지다. 그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 이 시대와 나라를 위해 영국 국회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
윌버포스와 클래팜 공동체 그리고 70세가 넘은 부흥의 아버지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가 윌버포스를 아들 같이 격려했습니다. 이런 영적 멘토를 잘 만나서 심각하게 인생을 고민하던 중 28살인 1787년 아침에 큐티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때 윌버포스는 이렇게 일기를 썼습니다. 영국의 노예제도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국고 수입의 30~40 %가 노예수송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국에게 노예제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에게 IT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버리라고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노예를 둘러싸고 있는 상류층과 정치인들의 결탁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윌버포스로 인해 국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람들은 윌버포스를 힐난했습니다. 그 때 윌버포스는 영국 헌정사에 남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의 제목이 ‘무엇이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가’입니다. “내 애국심을 의심하지 마라. 나는 영국 국기 아래서 죽을 것이다. 프랑스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을 높이는 피의 혁명을 일으켰다면 영국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황금에 눈이 어두워져있다. 영국이 정말 위대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고도 오래 살아남은 나라는 역사에 없다. 내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영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윌버포스는 150회가 넘는 국회 연설을 통해 노예제도와 싸웁니다. 이 싸움이 끝나기까지 꼬박 45년이 걸립니다.
클래팜 공동체의 영향력 이런 것은 윌버포스 혼자의 힘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살펴보기 원하는 것이 그의 친구들이 있었던 클래팜(Clapham)공동체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마을이 클래팜입니다. 클래팜 공동체에는 국회의원, 사업가, 군인, 농장주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영국 수상도 클래팜 같은 스태프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류층이면서도 독실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만나 교제하면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 솔직하게 나누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이 항상 해준 것은 각자의 분야에서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 준 것입니다. 클래팜 공동체의 기록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솔직하게 서로에게 조언을 해줍니다. 윌버포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노예제도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죽기 일주일 전에 법안이 통과됩니다. 영국이 더 이상 노예를 제공하지 않으니까 미국도 더 이상 노예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윌버포스의 사상이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미국이 노예전쟁을 통해 제도를 폐지하게 합니다.
배워야 할 것들 그들의 개혁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둘째, 언론과 국민 여론을 조성해야 합니다. 윌버포스는 대국회연설로만은 안된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연구 자료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TV가 없으니까 신문과 잡지, 팸플릿 등으로 각 지역마다 크리스천 오피니언 그룹을 만들어 간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과격한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정부의 권위 질서를 존중하는 균형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혁명의 시대여서 프랑스혁명에 자극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원했습니다. 윌버포스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혁명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라며 그들을 절제시켰습니다. 넷째, 깨끗한 인격과 신념입니다. 당시 클래팜 공동체를 본 사람들은 ‘저들은 우리에게 설교하지 않지만 삶으로 감동을 준다. 그들의 모임을 보고 있으면 누구든지 그들의 활발함과 순수함과 현실을 성경의 눈으로 보는 지혜를 느끼게 된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는 말도 했습니다. 클래팜 공동체는 상류 사회의 퇴폐문화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가정을 건강하게 지켰습니다. 다섯째, 자신의 위치를 부인하지 않는 삶의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깨끗한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상류층 생활을 청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포기 하지 않음으로 영국 상류사회에 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섯째, 이들은 항상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요한 웨슬레나 존 뉴턴 같은 좋은 목회자들의 기도를 받았고,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클래팜은 좋은 목회자들을 멘토로 삼아 팀워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 이 강의는 지난 7일(화) 시작한 크리스천CEO 과정의 첫날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출처: http://news.onnuri.or.kr/sub.asp?gubun=18&idx=4910&mode=view&pubnum=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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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는 찾았네 원문보기 글쓴이: j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