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대표적인 조선소 코콤 사가 1990년 불황으로 문을 닫으면서 나온 매물이 크레인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골리앗크레인이라 쉽게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10여 년간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이 거대 구조물을 철거, 운반해서 재설치하려면 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러한 사정을 알고 달려던 기업이 현대중공업이었다. 단돈 미화 1달러라는 상징적 가격에 인수되어 2002년 철거되던 날, 조선소가 있던 말뫼 시민들은 크레인의 마지막 해체 모습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조선 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 이 크레인은 말뫼시의 보물이자 상징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스웨덴 국영방송은 아쉬움과 눈물로 철거 장면을 중계했고, 다른 언론들도 이에 질세라 '말뫼가 울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개항 140년의 부산항 최고 유물로 통하는 세관기중기. 부산세관 감시선계류장 입구에 있으며, 보관 상태가 좋아 지금도 가 동 된다.
이 크레인은 이후 '말뫼의 눈물'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에 울산만에서 새 둥지를 튼 크레인은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상징물이 되어 한동안 '울산의 웃음'이 되었다.
산업현장에는 무거운 중량물을 들었다 내리는 크레인이 즐비하다. 아파트 공사장의 타워크레인, 항만의 갠트리크레인, 조선소의 골리앗크레인 등이 대표 얼굴이다. 그러다 보니 부산항을 비롯한 인근 거제·울산에는 크레인의 힘을 빌리는 산업이 많다.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듯한 이들 크레인이 웅비의 기세로 힘을 발휘하며 가동될 때면 부산 주변의 실물경기도 힘을 싣게 되고, 반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라 경제가 어둡다. IMF 사태가 왔을 때 이들 크레인이 우리나라 경제를 얼마나 떠받쳐 주었던가! 그러나 요즘 부산항 주변의 경기는 예전 같지 않다. 조선업이 그렇고 해운선사가 그렇다. 무겁게 내려앉은 이들 산업을 힘차게 들어 올릴 '대안(代案)의 크레인'을 찾을 때다.
크레인을 우리말로 하면 기중기(起重機)다. 부산항에 최초로 기중기가 설치된 것은 1906년 부산해관 공사를 하면서다. 종전의 포구 개념의 항만에서 화물선이 접안하는 근대식 부두가 만들어지면서 늘어나는 물동량을 처리하기 위해 기계의 힘이 필요했다. 부두에 창고와 물양장이 들어서고 여기에 3t과 10t짜리 수동식 기중기도 함께 설치됐다. 그 가운데 10t짜리는 태풍으로 유실되어 없어졌으나 다행히 작은 3t짜리는 보존이 되어 항만의 최고유물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기중기를 사용하려면 '세관기중기 사용규칙'에 따라 세관허가를 받은 후 사용료를 지급했는데 3t짜리의 경우 시간당 40전(錢)이었다.
컨테이너시대가 열리면서 최초로 설치가 된 갠트리크레인은 1978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자성대컨테이너부두의 하역장비였다. 국산화가 된 최초의 크레인은 1982년 삼성중공업이 일본 가와사키중공업과 기술제휴로 생산한 싱글 크레인으로서, 부산항 제6부두에 4대가 설치됐다. 근래에 와서는 40피트 컨테이너 2개를 동시 처리하는 탠덤(Tandem) 갠트리크레인은 2009년 부산 신항이 개장되면서 한진해운터미널에 설치됐다.
이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항만을 지켜오던 다양한 하역설비들은 새로운 기능이 장치된 장비에 교체되면서 밀려난다. 어디 크레인뿐이겠는가? 경쟁력이 없으면 '말뫼의 눈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닥친 아픔을 딛고 고민 속에 미래를 펼치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