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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 Ⅴ』
1) 1920년대 시문학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로 한민족 앞에 닥쳐 온 현실은 암담· 실망· 피로· 퇴폐로 점철된 세기말적(世紀末的)인 분위기뿐이었다. 정신적으로 패배 의식과 방황의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경제적으로도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한국 민중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서구(西歐)의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등이 한국에 유입되어 문예사조(文藝思潮)가 정립되었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3·1운동을 전후하여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이전의 문학과 크게 다른 양상이 나타나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
1920년대는 현대문학사상(現代文學史上)에 있어서 혼류(混流)된 문학사조(文學思潮)를 느끼게 하는 시대다. 1920년대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안서(岸曙)에 의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통해 프랑스 시단(詩壇)의 고답파(高踏派)와 퇴폐파(頹廢派)가 소개된 데 이어 상징주의(象徵主義)도 소개되었다.
―정한숙, 『현대한국문학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2, p.24.
일본 유학파인 김억·주요한 등은 『학지광(學之光)』·『청춘(靑春)』·『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등에 시를 발표했다. 서구의 상징주의 시에 많은 영향을 받은 주요한 등은 자유시 형식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고, 민요조 서정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시조 등 정형적인 시형식을 추구했다. 3.1운동 직후 암울하고 좌절적인 분위기가 시 작품에서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풍조로 표현되어 낭만주의 시들이 나타났다. 1918년 9월 26일 창간되어 1919년 2월 17일 통권 16호로 폐간된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통해 현대시로서 처음 눈길을 끌게 한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자유시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토착화 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억은『태서문예신보』에 창작시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의 산문시(散文詩, prose poem)로부터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에 이르기까지 번역시를 폭넓게 발표했다. 김억 외에 황석우 등이 『태서문예신보』에 자유시를 발표했다. 1919년 2월 1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창간되어 1921년 5월 30일 통권 9호로 폐간된 『창조(創造)』는 김동인·주요한·전영택 등을 동인(同人)으로 한, 한국 최초의 종합문예 동인지이다. 한국 최초의 시 전문 잡지인 『장미촌(薔薇村)』(1921년)에는 황석우·변영로·오상순·박종화·노자영·박영희 등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퇴폐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을 보이며 염상섭·오상순·남궁벽 등을 동인으로 한 『폐허』(1920년), 박종화·홍사용·이상화·박영희· 나도향 등을 동인으로 하여 낭만주의 경향을 보인 순문예 동인지 『백조』(1922년), 양주동·이장희·유엽 등을 동인으로 하여 낭만주의 경향을 보인 『금성』(1924년) 등도 1920년대 전반기에 발행되었다.
또한 김억, 김소월, 이상화, 현진건 등 신경향파 작가들이 주로 활동하여 계급주의를 표방한 잡지인 『개벽』 중신의 계급주의 시에 대하여 민족문학의 방향을 제시하며 최남선·이은상·이병기 등을 중심으로 1926년부터 시조부흥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다.『창조』의 후신으로 김소월· 주요한· 김억· 전영택 등이 활동한 『영대』, 동인지의 성격을 탈피한 최초의 종합 잡지로 이광수· 김억·김동인·주요한· 최학송(최서해)·방인근 등이 활동했으며, 경향파와 반대되는 입장을 대변한 『조선문단』 등도 1920년대에 발행되었다. 그밖에 외국 문학에 대한 최초의 번역 소개지인 『해외문학』을 통해 김진섭(독문학)· 정인섭(영문학)· 손우성(불문학)· 이하윤(영문학)· 이선근(노문학) ·김광섭(영문학) 등이 계급주의 시의 개념성 ·전투성· 공격성을 비판하며 순수시를 소개했으며, 계급주의의 ’개벽파‘와 민족주의의 ’조선문단파‘를 절충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던 『문예공론』을 통해 양주동이 활동했다.
주요한
1919년 『창조』 창간호에 주요한은 「불놀이」를 발표했다. 그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 걸쳐 본격적으로 근대시의 양식을 확립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놀이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빗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은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 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4월(四月)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壁),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였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 오는 ‘이즘’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 ―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우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오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靑年)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주요한, 「불놀이」 『한국 대표시인 100인 선집 2·불놀이』, 미래사, 1991, pp.11∼13.
『창조』 창간호(1919. 2)에 실린 「불놀이」는 시적 화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내재율의 형식을 지향하고 있는 자유시로 계몽적인 문학 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서정을 지향한 서정시요 상징시(象徵詩)라고 할 수 있다.
「불놀이」는 4월 초파일에 군중에서 떨어져 앉아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던 시적 화자가 불놀이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삶의 의지를 회복한다는 서사구조를 갖고 있는 자유시이다. “언뜻 보아 산문(散文)의 형태를 취한 듯하지만 좀더 자세히 율독(律讀)해 보면, 삼음절(三音節 사음절(四音節) 오음절(五音節)을 율격단위(律格單位)로 한 삼음보(三音步)의 자유시(自由詩)임을 알 수 있는”(정한숙, 『현대한국문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2, p.56) 「불놀이」는 “연극적(演劇的) 장면묘사(場面描寫)를 더듬어 볼 수 있지만 서정적(抒情的) 회상(回想)이라기보다는 극적(劇的) 파토스가 강하여 시적(詩的) 형상화(形象化)에는 다소 미흡하다.”(정한숙, 『현대한국문학사』, p.56)고 평가받고 있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어둡고 괴로운 심리 상태에서 님을 그리워하면서 슬픔에 잠겨 있으나 이를 극복하여 궁극적으로는 삶에의 의지를 표출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한용운
『창조』·『장미촌』·『폐허』·『백조』·『금성』 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시인들의 시학적 경향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시창작 활동을 한 시인으로 한용운과 김소월이 있다. 한용운은 차원 높은 불교의식과 예술의식의 교차점에서 진정한 개인의식과 치열한 사회의식을 접맥시켜 역사의식으로까지 고양시켰다. 한용운의 시를 해석할 때 그가 일제 강점기 때 승려였다는 전기적 사실에 입각하여 ‘님’을 부처로 해석하고, ‘조국’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한용운의 시에 나타난 사랑을 우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읽어도 무방하다.”(김인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 열림원, 2003, p.14)는 견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초판본에는 ‘산빗’으로 표기]을 깨치고[깨뜨리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향하여] 난 적은 길[작은 길]을 걸어서 참아[참어. ‘참다’의 부사형] 떨치고[세게 흔들어서 떨어지게 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정수리]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사랑에서 샘솟듯 저절로 우러나오는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 서정시학, 2009, pp.32∼33.
한용운의「님의 침묵(沈默)」은 1925년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서 쓰여져서 1926년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간행한 시집 『님의 침묵』 88편 가운데 첫 시이다. 시집 『님의 침묵』은 불교의 윤회설(輪廻說)과 공사상(空思想)에 바탕을 둔 연작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님의 침묵(沈默)」은 1∼4행(기)은 님과의 이별을 제시하고 있고, 5∼6행(승)은 님과의 이별 후의 슬픔과 고통을 노래하고 있고, 7∼8행(전)은 슬픔과 고통의 새 희망으로의 전이를 그리고 있고, 9∼10행(결)은 만남의 의지와 사랑의 성취를 노래하고 있다. “불교 사상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김인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 열림원, 2003, p.79) 한용운의 문학은 불교 사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김흥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불교사상과 연관시켜 『중론(中論)』과 『유마경(維摩經)』을 통하여 님의 정체를 해명하였다.
그의 시를 애정의 노래, 종교적 구원을 향한 증도(證道)의 노래, 또는 민족해방의 과제를 향한 투사의 노래 등 어느 하나로 국한하여 이해하는 것이 전혀 틀린 일만은 아닐지라도 매우 부적절한 해석임을 말하여 준다. 그의 시에서 님은 개별적으로 파악된 이들 의미 중의 어느 하나도 아니면서 보다 큰 종합 속에서 그 전체에 모두 관련된다. 『님의 침묵』은 단순한 종교시도 증도가도 아니다. 굳이 그것을 증도가라 한다면 역사적 삶의 진정한 모습을 향한 유마적 증도가라 해야 할 것이다.
―김흥규, 『문학과 역사적 인간』, 창작과 비평사, 1980, p.36.
한용운의 사상적· 시적 성취의 기본을 이룬 것이 불교적 바탕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고전적 정신을 발전시켜 전통의 맥락을 계승하고 아울러 은유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시사적(詩史的) 의의가 있다.
김소월
서민적 생활 감정을 표현한 향토성(鄕土性), 7·5조 3·4조로 주조(主調)를 이룬 민요조(民謠調)의 전통적 율조(律調), 사모(思慕)와 정한(情恨)의 감정을 표현한 전통적 정서(情緖)를 문학적 특성으로 하는 김소월의 시 경향은 「초혼(招魂)」·「접동새」 ·「산유화(山有花)」·「진달래꽃」 같은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夕陽)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해가 저물 때, 저녁때]에
새라새로운[새롭고 새롭다] 탄식(歎息)을 얻으면서.
동(東)이랴, 남북(南北)이랴,
내 몸은 떠나가니, 볼지어다.
희망(希望)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心情)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비교적 조금] 가느른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山)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 오하근 편, 『정본 김소월전집』, 집문당, 1995, p. 104.
경작할 토지에 대한 이상과 현실 극복 의지가 선명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은 전통성을 중시한 김소월의 시 경향과는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4연 16행의 자유시인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은 1925년 12월 간행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되었다. 1연은 잃어버리고 없는 즐거운 노동에 대한 꿈을, 2연은 집과 땅을 잃어버리고 유랑하는 현실을, 3연은 희망이 없는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을, 4연은 노동의 미래를 향한 의지를 각각 노래하고 있다.
옷과 밥과 자유(自由)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 있고 짓[깃, 날개에 난 털]이 있지.
밭에는 밭 곡석[밭곡식]
논에는 물벼[논벼].
눌하게[누렇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초산(楚山)지나 적유령(狄踰靈)[평북 희천과 강계 사이에 있는 재. 963m]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늬?
(『백치(白雉)』, 1928.7)
―김소월,「옷과 밥과 자유(自由)」, 오하근 편, 『정본 김소월전집』, 집문당, 1995, p. 228.
김소월이 평양에서 발행된 동인지 『백치(白雉)』(1928.7)에 발표한 「옷과 밥과 자유(自由)」의 1연에서 시적 화자는 공중에 떠다니는 새는 털과 깃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면서 우리 민족이 헐벗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2연에서 시적화자는 밭곡식과 논벼가 누렇게 익어서 수그러져 있어도 그것이 그림 속의 떡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3연에서 나그네로 보이는 시적 화자는 짐을 싣고 적유령을 넘는 나귀에게서 바로 자신과 이웃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늬?'란 반문 속에 시적 화자의 고단한 삶과 자유를 구속하는 굴레에 얽힌 긴 사연이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세상을 보다 풍요한 삶이 약속된 내세로 가는 눈물의 골짜기로 보는 종교관이나 궁핍과 자유없음을 근원적인 인간 조건이라고 보는 철학사상과 무연(無緣)했던 소월에게 있어 옷과 밥과 자유를 모두 빼앗긴 상황이 헐벗고 굶주리고 자유없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이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유종호, 「임과 집과 길―소월(素月)의 시」, 김학동 편, 『한국문학의 현대적 해석 2·김소월』,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8, p. 21.
일제 식민지 시대의 옷과 밥과 자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상황이 헐벗고 굶주리고 자유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옷과 밥과 자유(自由)」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무리벌 노래」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 민족이 처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옷과 밥과 자유」는 김소월의 시 경향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전통적인 낭만적 정서와 당대의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나무리벌 노래
신재령(新載寧)에도 나무리벌[황해도 재령군에 있는 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벌판]
물도 많고
땅 좋은 곳
만주(滿洲) 봉천(奉天)은 못 살 곳.
왜 왔느냐
왜 왔느냐
자곡자곡이 피땀이라
고향산천(故鄕山川)이 어디메냐.
황해도(黃海道)
신재령(新載寧)
나무리벌
두 몸이 김매며 살았지요.
올벼 논에 닿은 물은
츠렁츠렁
벼 자란다
신재령(新載寧)에도 나무리벌.
(『백치(白雉)』, 1928년 7월)
―김소월,「나무리벌 노래」, 오하근 편,『정본 김소월전집』, 집문당, 1995, p.230.
「나무리벌 노래」는 김소월이 동인지 『백치(白雉)』(1928년 7월)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는 나무리벌(餘物坪여물평: 재령평야)이라는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 있는 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나무리벌에서 생산된 쌀은 품질이 좋아 진상품으로 쓰였다고 한다.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라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라고 전해지는 나무리벌(餘物坪여물평: 재령평야)은 조선 인조(재위 1623년∼1649년) 때 저습지(低濕地)를 개간(開墾)하여 농토로 바꾸기 시작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농장(東拓農場)이 들어섰던 곳이다.
재령지방(載寧地方)의 동척농장(東拓農場)은 동군(同郡)의 북율면(北栗面)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조선후기에는 餘物里(남을리)로 불리던 곳으로서 왕실의 장토(庄土)가 발달하고 있었다. 이른바 여물리언답(餘物里堰畓) 여물평장토(餘物坪庄土)가 그것으로서 이 장토는 왕실의 농장(農莊)으로서는 각별히 중요한 곳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장토의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곳 장토에서의 생산물의 용도가 다른 곳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였다.
―김용섭, 「한말(韓末) ·일제하(日帝下)의 지주제(地主制)」, 윤병석 외 편, 『한국근대사론』,1, 지식산업사, 1977, p.167.
장토의 면적이 넓고, 소출이 많아 조선 왕실에서 각별하게 중요하게 여겼던 나무리벌(載寧餘物坪)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후 1926년 안녕수리조합(安寧水利組合)·재신수리조합(載信水利組合) 등이 설립되면서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나무리벌(餘物坪)은 기름진 땅, 잘 갖추어진 수리시설, 재령강(載寧江)을 통해 농자재나 농산물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수운(水運)의 편리 때문에 일찍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눈독을 들여 마침내 나무리벌(餘物坪), 즉 재령군 북율면의 6, 891, 690여 평 약 2, 300정보나 되는 농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하게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23년 나무리벌의 동척 농장(東拓農場)에 동척주재원(東拓駐在員)을 두고 일본 각처에서 선발되어 온 일본인 ‘동척 이민 지주(東拓移民地主)’가 경영하는 지주경영(地主經營)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나무리벌의 소작농민들에 대한 동척주재원 및 그들에게 고용된 조선인 농감(農監)과 어용소작농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척은 소작농민들에게 7~8할 또는 그 이상이라는 고율(高率)의 소작료(小作料)를 받아 챙겼고, 고율의 소작료를 납부하지 못하면 소작권을 박탈하는 등 동척의 수탈은 점점 심해졌다. 이것은 일본자본주의의 한국 농업지배의 기본 특징의 하나이기도 했다(김용섭, 「한말(韓末) ·일제하(日帝下)의 지주제(地主制)」, 윤병석 외 편, 『한국근대사론』,1, 지식산업사, 1977, pp.183∼192 참조). 급기야는 1925년 2월 6일 4백여 소작인과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인들이 엽총으로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동척이 원래 농업 이민을 통한 농민 착취를 본질로 한 국책회사였으므로 개인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 보다 목적 성취가 어려웠는데 그것은 방법의 측면에서도 경찰의 절대적 비호와 지사· 지점 ·주재소로 이어지는 지주적 조직 때문에 개인을 상대로 하기보다 복잡했고, 따라서 성취 문제도 비교적 소박한 농민으로서 어려울 수밖에 없었기”(조동걸,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 한길사, 1980, p147) 때문에 나무리벌, 즉 북율면의 소작쟁의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동양척식회사(동척)은 저항적인 소작농민들을 동척농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일본인들을 대거 입주시켜 1927년 나무리벌(餘物坪)에 ‘소일본(小日本)'을 건설했다. 소작 농지를 박탈당한 소작농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유량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무리벌 노래」는 1924년 황해도 재령군 나무리벌(載寧餘物坪)에서 발생한 동양척식회사 농장(東拓農場) 소작농민(小作農民)들의 대지주(對地主) 농민투쟁(農民鬪爭)에서 취재한 작품이다.
이 시[「나무리벌 노래」]는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농민들의 억울한 사연을 그들의 처절한 육성에 담고 있다. 전반부에서 묘사된 참담한 현실은 수탈 이전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동의 장면을 그린 후반부의 풍경과 대조를 이루면서 장소 상실의 비극적 정황을 재현한다.
―이혜원, 「김소월과 장소의 시학」, 『생명의 거미줄』, 소명출판, 2007, pp.136∼137.
「나무리벌 노래」는 민요풍의 율격과 님이 사라진 시대에 님이 사라진 정한(情恨)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세계에서는 드물게 민족이 처한 현실 인식과 시인이 꿈꾸었던 세계가 드러나 있다. 한국전통시가와 근대시 사이의 이질감과 공백을 민요시로서 극복한 김소월은 한국어 어휘· 가락· 정조를 가장 잘 살려내어 평민문학적인 전통을 이어간 시인이었다.
김동환
1920년대에 민족 현실에 대한 자각을 전통적인 시 정신에 입각하여 형상화하여 전통적인 서정시를 쓴 시인에는 한용운· 김소월 이외에도 김동환이 있다. 1924년 『금성』에 시「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나온 김동환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며 1925년 첫 시집『국경의 밤』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했다. 최초의 현대 장편 서사시인 『국경의 밤』은 3부 72절로 구성되어 있다.
국경(國境)의 밤
1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강안(國境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경이
왔다 갔다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마차(密輸出馬車)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 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脈)이 풀려서
파아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젊은 아낙네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 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길 가는 병자의 부르짖은 같은
애처로운 바람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 이어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젊은 여인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맞은 남편의 일이라고
문지방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을 따라
고기잡이 얼음짱 끄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수수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아, 밤이 점점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 가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가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젊은 여인의 마음을 홧! 홧! 놀래놓으면서.
6
전선이 운다 이잉 이잉하고
국교(國交)하라 가는 전신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백양도, 산곡(山谷)도, 오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따라 간도(間島) 이도(移徒)꾼도 별로 없지.
얼음짱 깔린 강 위를
바가지 달아 매고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보이지.
회령(會寧)서는 벌써 마지막 차(車)고동이 울렸는데.
7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 줄 모르는
간 건너 산천으로부터
바람에 눈보라가 쏠려서
강 한복판에
진시왕릉(秦始王陵) 같은 무덤을 쌓아놓고는
이내 안압지(雁鴨池)[경북 경주시 동북쪽에 있는 연못으로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졌다]를 파고 달아난다,
하늘 땅 모두 회명(晦暝)[어두컴컴함]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백설(白雪)로 오백리, 동광(同光)으로 삼천리.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하략---
김동환, 『국경의 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최동호 편, 『한국명시·상』, 한길사, 1996, pp. 318∼321]
시인 자신이 시의 제목에 ‘장편 서사시’라는 주석을 달고 있는 『국경의 밤』은 1925년 3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되었다. 3부 72장, 총 900여 행에 달하는 장시인 『국경의 밤』에서 1부의 7장까지만을 옮겨놓은 것이다. 제1부에서는 두만강 근처에 살고 있는 젊은 여인이 일제의 경찰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 밀수하러 떠난 남편을 걱정하는 심정이 묘사되어 있다. 하룻밤과 그 이튿날 낮까지에 걸쳐‘현재-과거회상-현재’의 서사 구조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국경의 밤』은 경계가 삼엄한 한만(韓滿) 국경지방의 두만강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이야기’를 도입하여 당시 우리 민족의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과 나라를 잃고 떠도는 유랑민의 삶을 형상화 낸 서사시이다. 김동환은 “당시 우리 시단(詩壇)을 일종의 타성에 젖은 따분한 지역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 청신한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욕망과 함께 시작활동(詩作活動)을 벌린 셈”(정한모·김용직 공저, 『한국현대시요람』, 박영사, 1974, p.284)이었다. 그는 「북청 물장사」(「동아일보」, 1924년 10월 24일), 「산너머 남촌에는」(『조선문단』 18호, 1927년 1월), 「송화강(松花江) 뱃노래」(『삼천리』, 1925년 3월) 같은 북방의 정서와 향토적인 느낌이 짙게 풍기는 민요풍의 시를 꾸준히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상화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서 온 감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태도가 기조를 이룬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이상화는 후기에는 카프의 창립에 가담하여 식민지 현실의 모순구조에 대한 관심을 시적 진술을 통해 비판적으로 제시하여 항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을 발표했다. “현실에의 환멸은 초기에는 가족 제도와 애정 생활 등에서 나오며, 후기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상처에서 나온”(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9, p.240) 이상화의 대표적인 시 작품으로는 「나의 침실로」·「이중(二重)의 사망」·「말세(末世)의 희탄(欷嘆)」·「서러운 해조」·「이별」·「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밧고[받고]
푸른 한울 푸른 들이 맛부튼[맞붙은] 곳으로
가름아[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거러만[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한울아[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갓지를[같지를] 안쿠나[않구나]
네가 끌엇느냐 누가 부르드냐[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한자국도] 섯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종달새]는 울타리 넘의 아가씨가티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밧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든 곱은 비로
너는 삼단 가튼 머리털을 깜앗구나[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갑분하다[가쁜하다].
혼자라도 갓부게나[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엇게춤[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재촉하지 마라].
맨드램이[‘민들레꽃’의 영남 방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김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십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젓가슴과 가튼[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조흔[좋은] 땀조차 흘리고 십다.
강가에 나온 아해[아이]와 같이
쌈도 모르고[현재의 상황, 형편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데로[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슴[웃음] 푸른 설음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로[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접혔나 보다[사로잡힌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것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최동호 편저, 『한국 명시 상』, 한길사, 1996, pp.250∼251.
1926년 『개벽(開闢)』 6월호에 발표되었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 아래에서 창작된 저항시이다, “이상화의 시에서 민족현실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나타낼 때는 직정적인 진술이 사라지고 현실의 왜곡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친화의 세계가 마련되는데”(최동호 편저, 『한국 명시 상』, 한길사, 1996, p.23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빼앗긴 들’은 일제에게 빼앗긴 우리 땅(국토)을 의미하고, ‘봄’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또는 자연의 계절로서의 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그의 자연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다. ‘지금은 남의 땅’인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온몸에 햇살’을 받고 걸어가는 것이 그에게 ‘꿈’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어김없는 자연의 순환 질서를 발견한 기쁨 때문이다. 그곳은 자연과 자연이 친화하는 세계이고 사람과 자연이 친화하는 세계이자 우리에게 익숙하고 아름다운 삶의 공간이다. ‘웃슴’과 ‘설움’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것네”라는 강렬한 울분을 내포하고 있는 이 시는 이상화의 시에 있어서 최고 수준에 도달한 걸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최동호, 「이상화」, 『한국 명시· 상』, 한길사, 1996, pp.235∼236.
전체가 11연으로 구성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주권과 통치권 상실의 울분과 주권과 통치권 회복에 대한 염원을 주제로 한 자유시로 토속적인 시어(詩語)와 방언(方言)을 구사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드러낸 작품이다.
그밖에 1920년대에 활동한 시인으로 대표작으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남긴 홍사용, 최초의 근대적 번역시집인 『오뇌(懊腦)의 무도(舞蹈)』(광익서관, 1921년)와 최초의 개인 창작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주식회사, 1923년)를 상자한 김억, 난해한 상징시를 쓴 시인으로 대표작이 「벽모(碧毛)의 묘(猫)」인 황석우 등이 있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