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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
시몬 베유 Simone Weit 1909 ~ 1943
「프랑스의 철학자, 신비주의자, 정치 활동가이다. 20세기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이례적인 행보를 선택한 그는 점차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생 동안 글을 썼지만, 대부분의 글은 사망 전까지는 많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1950년대, 1960년대에 들어 그의 글들이 유럽 대륙과 영어권 세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사상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학문적 주제를 다룬다. 알베르 카뮈는 그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하였고, 이때 그녀는 뉴욕을 방문하고 그곳에 큰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쓰러진 시몬 베유는 1943년에 켄트주 애시포드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
[옮긴이의 글]
시몬 베유가 1940년대에 쓴 글들 가운데, 이미 번역돼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제가 좋아하는 글들을 골라 옮겨보았습니다. 시몬 베유는 1938년에 신비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글들은 신학적인 것들이 많고, 신학적인 내용의 것이 아니더라도 신학적 관점이 투영된 것들이 많습니다.
앞의 네 편의 글은 신학적인 글들입니다. 이 글들은 신에 가닿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 통로는 어떤 것들인지, 가짜 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네 편의 글 곳곳에서 언제나 보석처럼 빛나는 것들을 마주치고 거듭 감동을 받습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글은 중세 남프랑스의 카타리즘과 관련된 글들입니다. 저는 카타리즘에서 그리스도교의 보다 순수하고 평화로운 비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보기 때문에 이 글들을 옮겼습니다. 베유는 이 글들에서 카타리즘을 자신의 철학사적 관점에 편입시키지만, 카타리즘 자체에 대해선 본격적 논의를 펼치지 못합니다.
일곱 번째 글은 철학적 성찰이란 어떤 것인지를 다룹니다. 하지만 철학적 성찰은 모든 가치에서 예외 없이 빠져나오기를 요구하고 그런 빠져나오기는 일종의 기적이라고 하고 있듯이, 신학적 관점이 전제가 된 글입니다.
여덟 번째 글은 베유가 드골이 이끄는 망명 정부의 기안자로 일할 때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구상하며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 베유는 정당이 만들어내는 집합적 정념에 사람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들을 제시하고, 정당은 진실의 조건들을 파괴하는 악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글 또한 정치학적인 글처럼 보이지만 신학적 관점이 배후에 깔려 있습니다.
[1장]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
「1942년 4월 말에 쓴 미발표 원고로, 뒤에 실린 <신의 사랑에 대한 무질서한 성찰들>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신을 믿는 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 이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가짜 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첫째로 미래를 선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장소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는 현재와 똑같은 직물로 짜여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 재화, 부, 권력, 평판, 지식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사랑, 그들의 번영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습니다. 언젠가 좀 더 많이 갖게 되면 만족하리라고요. 그런데 그처럼 믿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병이나 가난이나 불행으로 고통 받을 때면, 그것들이 멈추면 만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 또한 거짓임을.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익숙해지면 다시 다른 것을 원하게 될 것임을.
둘째로, 필요를 선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살기 위해 필요하다고 우리가 믿는 많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거짓입니다.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 믿음이 진짜더라도, 그것들이 없으면 죽거나 생명의 에너지를 상실할 수 있더라도, 그것들이 선 일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그저 사는 것에 오래도록 만족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걸 바랍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위해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기 이곳엔 우리가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하는 그 무엇이 전혀 없음을 알려면,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됩니다. 성취한 모든 욕망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조금만 지나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내 다른 걸 원할 겁니다. 또는 무엇을 할지 몰라 불행해질 겁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통해서만 지탱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삶이 참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그렇다고 운명에 저항하지도 않으면서, 바깥에서부터, 즉 시간의 바깥에 위치한 어떤 곳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
사람은 모두 악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악은 고통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악은 그 둘 모두이거나, 그 둘에 공통되는 어떤 것입니다. 그 둘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고통을 주고, 고통은 더 나쁘게 만듭니다. 고통과 죄의 이런 분리될 수 없는 뒤섞임이 악입니다. 우린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악 속에 있고, 자신이 악 속에 있음에 대해 질겁합니다.
우리는 주시하거나 욕망하는 대상들에게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일부를 떠넘깁니다. 그러면 대상들은 그 악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보냅니다. 그 악이 대상들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악이 우리를 삼킴 장소들을 우리가 증오하고 혐오하는 건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우리는 그 장소들 자체가 우리를 악 속에 가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들의 방이나 주변을 미워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들이 그 주변을 채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종종 그들의 공장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시나 욕망을 통해 악의 일부를 완전히 순수한 어떤 사물에 떠넘겨도, 완전히 순수한 것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순수한 것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순수한 사물은 순수하게 머물고, 우리에게 악을 되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악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우리 안의 악들도 유한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삶이 충분히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언젠가 모든 악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조차 말입니다.
주기도문을 이루는 말들은 완전하게 순수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아무런 다른 의도 없이,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암송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우리가 아무리 적더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악에서 빠져나왔음을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거기 있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아무런 생각 없이 성체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요.
이 세계에 순수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다음의 것들일 것입니다. 성스런 사물들이나 텍스트들, 환상을 투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의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좀 더 낮은 수준에선, 신이 머무는 사람들 그리고 신적 영감에서 생겨난 예술작품들. 완전히 순수한 것은 여기 이곳에 현존하는 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신이 아니라면 결코 순수할 수 없겠지요. 만일 신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순수함과 그렇게 접촉한 마음속에선, 자신의 악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신적인 순수함에 대한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막달라 마리아나 선한 도둑은 사랑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두려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이 과정에 대한 유일한 장애물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신의 더러움이 순수함과 만나는 일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다음 방법뿐입니다. 즉 자신의 더러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지요. 자신이 어떻든 간에, 순수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기뻐하는 것이지요. 순수함과의 접촉은 악을 변화시킵니다. 고통과 죄의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은 오직 이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순수함과의 접촉으로 인해, 고통은 서서히 죄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른 한편, 죄는 단순한 고통으로 변합니다. 우린 이런 초자연적 작용을 회개라 칭하지요. 그러면 기쁨이 우리가 지닌 악에 빛을 비춥니다.
완전히 순수한 어떤 존재가 지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신의 어린 양일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를 둘러싼 악의 최대치가 고통의 형태로 그에게 집중될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그가 그 속에서 현존했던 완전히 순수한 것들을 자신에 대한 기억으로 남겼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것들의 순수함은 악과 접촉한 끝에 고갈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초자연적인 일이 특별히 필요합니다. 악을 자기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일상생활의 장소들, 특히 노동의 장소들에서 완수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생활과 노동의 정황들 속에서 신적 진실들을 읽어내는 상징적 독해를 행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편지의 문장들을 읽듯 말입니다. 상징들은 자의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상징들은 싀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물들의 본성에 새겨진 은총의 효과로서. 복음서의 비유들은 그런 상징성의 예들입니다.
[2] 신의 사랑에 대한 무질서한 성찰들
「1942년 4월 말에 쓴 미발표 원고입니다. <전집>Ⅳ-1권과 폴리오folio문고판<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 2013>에 실렸습니다.」
우리를 향한 신의 사랑은 매순간 우리의 존재 자네의 직물을 이루고 실체를 이룹니다. 우리를 실존 속에서 떠받치는 신의 창조적 사랑은 관대함으로 넘쳐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또한 포기이고 희생입니다. 수난은 그 완성일 뿐이지요. 창조자인 신이 자신의 신성을 스스로 비워내듯 말입니다. 신은 노예의 형태를 취합니다. 신은 필연성에 종속됩니다. 신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신의 사랑은 실존 속에서 지속됩니다. 그 자신이 아닌, 선하지 않은, 보잘것 없는 존재들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실존 속에서. 사랑으로 신은 그 존재들을 불행과 죄 속에 내던집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현존은 불꽃이 나비를 태워 죽이듯 그들에게서 ‘존재’를 제거할 것입니다.
이 세계 도처에 불행과 범죄의 형태로 드러나는 악은 우리가 신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잇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리는 사랑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악을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악을 통해서 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가 놀다가 귀중한 물건을 망가트렸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일을 사랑하지 않지요.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흘러 아이가 먼 곳으로 떠났거나 죽었다면, 어머니는 그때의 일을 한량없는 따뜻함을 갖고 떠올릴 겁니다. 이제는 그 일에서 그 아이가 실존했던 자취만을 볼 뿐이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아무런 차별 없이 좋고 나쁜 모든 걸 통해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직 선한 것을 통해서만 사랑을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의 어떤 것인가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칭할 뿐인 것이지요. 어떤 변제나 정당화를 통해 악을 선으로 만들려 해서도 안 됩니다. 벌어지는 악을 통해 신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벌어지는 모든 건 현실이고, 모든 현실 뒤엔 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실들은 다소간 투명하고, 어떤 현실들은 완전히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현실 뒤엔 어디서건 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신이 존재하는 지점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투명한 현실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신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현실이 투명하다면, 우리는 신이 아니라 빛의 감각만을 사랑할 겁니다. 우리가 신을 보지 못하면, 신을 사랑하기 위해선 진짜로 자기 바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시선이 선을 향해야 합니다. 꼼짝도 않은 채로,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알 수 있겠습니까? 검은 장막이 빛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움직이면 안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행동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건 물질의 부동성이 아니라 영적 부동성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진 말아야 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안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첫째로는, 엄격한 구속에 의해 강제되는 것만을 향해야 합니다. 둘째로, 신이 내게 명령한다고 진실로 여겨지는 것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불확정의 영역에선, 우리를 밀어붙이는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야 합니다.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행동의 영역에서 의지적 노력을 하는 것은 오직 엄격한 구속으로 인한 경우여야 합니다. 자연적 흐름에 따른 행동에선 애써 힘을 들일 필요가 없겠지요. 신에 복종하는 일들에서는, 우리는 다만 수동적일 따름입니다. 그에 따른 고통이 크더라도 그 일들은 정확한 뜻에서의 노력, 능동적인 노력보다는 오히려 인내를 요구합니다. 견뎌내고 고통 받는 능력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모델이지요. 물론 바깥에서 볼 땐 복종의 그런 행위를 큰 활동이 펼쳐지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마음속엔 수동적인 고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해야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힘든 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동의 영역에 속한 게 아닙니다. 신을 향하게 우리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 것, 시선이 멀어지면 다시 붙잡아 데려다 놓는 것, 매순간 모든 힘을 다해 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힘든 이유는 우리 자신의 거의 전부인, 우리 자신인, 우리가 우리의 자아라고 명령하는 것인, 우리 자신의 가장 보잘것 없은 부분의 시선을 신에게 고정시킬 때 죽음에 처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부분은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항합니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거짓말을 지어내면서.
그런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신이라 칭하는 가짜 신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그들에게 신에 대해 말해준 특정한 사람들, 어떤 사회적 모임, 어떤 생활 습관, 또는 마음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 감각적인 기쁨. 희망, 위안, 위로의 어떤 원천 등을 좋아할 뿐인데, 신을 생각한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때 마음의 보잘것없는 부분은 완전한 안전을 누립니다. 기도도 그것을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
또 다른 거짓말은 쾌락과 고통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쾌락의 끌림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촉발한 행동이나 회피가 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그처럼 말려들 때, 우리는 쾌락이나 고통에 굴복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종종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많은 경우 감각적인 쾌락과 고통은 우리의 보잘것없는 부분이 우리를 신에게서 빼돌리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쾌락과 고통은 그 자체로선 그처럼 강력한 게 아닙니다. 우리를 휘감는 쾌락을 포기하는 거나 격심한 고통을 떠멑는 게 그다지 힘겨운 일은 아닙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일상적으로 행하지요. 하지만 오직 신을 위해서라면, 아주 작은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나 아주 작은 고통을 당하는 것도 한없이 힘듭니다. 진짜 신, 다른 어딘가가 아닌 천국에 있는 진짜 신을 위해서라면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죽음, 자연마저도 똑같이 겁먹게 하는 죽음을 향해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나’라고 말하는 것의 죽음이 그것이지요.
우리는 가끔씩 살(몸)이 우리로 하여금 신에게서 등을 돌리게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건 종종 거꾸로 입니다. 신의 치명적인 현존, 그로 인한 화상(火傷)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마음이 오히려 육체 뒤로 도망가는 것이지요. 육체를 차단막처럼 사용하면서요. 이런 경우 신을 잊게 하는 건 육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신을 잊으려고 육체 속으로 숨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결함이 있었던 게 아니라 배반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배반은 언제나 행해집니다. 마음의 보잘 r서 없는 부분이 순수한 부분을 압도하는 한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배반을 필할 수 있는 건 노력을 통해서도, 자신에게 폭력을 가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한 선택을 통해섭니다. 즉 신으로부터 tan으려는 자신의 부분을 낯선 존재처럼, 적처럼 바라보면 됩니다. 그 부분이 우리 자신의 거의 전부더라도, 우리 자신이더라도 말입니다. 붇나히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합니다. 신의 편에 선 부분에 t고해야 한다고 그 부분이 무한하게 작더라도 말이지요. 그처럼 무한하게 작은 것도 우리가 속하게 되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됩니다.
우리는 신의 편에 선 부분에 t고하길 거부해서 그런 성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의지를 마음의 육체적 부분의 무질서한 운동에 맞서 사용하질 않아서 그런 성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그것이 아루어질 때면, 우리 자신이 없이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을 다음처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발을 모아 뛰면서, 점점 더 높이 뛰다보면 결국은 어느 날엔가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 가운데, <용감한 꼬마 재봉사>가 있습니다. 그 동화에서 꼬마 재본사는 겅니과 시합을 하지요. 거인은 돌을 하늘 옾이 던집니다. 너무 높이 던져서 떨어질 때까지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립니다.하지만 호주머니에 새를 넣어둔 꼬마 재봉사는 자기가 훨씬 잘 할 수 있다고, 자기가 던지는 돌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고선 새를 놓아주지요. 날개가 없는 것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늘을 향해 두발을 모아 뛰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느라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시선만이 이런 일에선 유일하게 결실을 맺습니다. 시선만이 신을 내려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내려오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날개를 달아줍니다. 우리의 근육 운동이 효과 있고 정당하게 사용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방해하는 모든 걸 피해가거나 없애기 위한 경우일 뿐입니다. 결국은 부정적인 용법이지요. ~~~신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부분은, 짖고 물고 모든 걸 교란하는 갣르에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개들을 길들이려면 채찍을 휘둘러야 합니다.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길 거부하는 데는 어떤 믿음도 필요 없습니다. 이를 알려면, 모든 마음에 자명한 것을 확인하면 됩니다. 즉 과거의 것이건 오늘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실의 것이건 상상적인 것이건 지금 여기의 것들은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무한하고 완전한 선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조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
「<선집. 1999>과 문고판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에 실려 있습니다. 부스케(1897~1950는 프랑스의 작가로, 제 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척추를 관통하는 총상을 당하고 하반신이 마비대 생을 마칠 때까지 침대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달몰이>(봄날의 책 2015)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1942년 5월 12일
친구님,
~~~12년 전부터 제 신경계의 중심 지점, 즉 마음과 몸의 연결 지점이 고통에 시달리는 데, 이 고통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지속되고 일 초도 멈추질 않습니다. 10년 동안을 그랬고, 저는 녹초가 된 듯한 상태에 이릅니다. 그래서 주의를 집중해야 할 일이나 지적 작업에선 거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열네 살 때부터 가진 믿음으로 견뎌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탈진과 격심한 고통으로 온 마음이 처참히 파괴되리라는 위협을 느낀 시점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몇 주에 걸쳐 불안스럽게 제게 물었습니다. 죽어야 하는 게 내게 주어진 가장 긴급한 의무가 아닐까 하고. 공포 속에서 삶을 끝내는 게 두려웠지만 말입니다. 당신에게 이미 말했듯,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각오만이 제게 평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이 시작되고 몇 년 뒤, 저는 파리 지역의 기계 공장에서 일 년 가까이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 자신과 구분될 수 없게 뒤섞인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호감과 저의 개인적 경험이 결합해서, 제 가슴 깊은 곳에 사회적 몰락의 불행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제가 언제나 노예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모든 시간 동안 신이라는 말은 제 생각 속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삼 년 반쯤 전 어느 날 저는 신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어요. 강도 높은 육체적 고통 속에 있던 어떤 순간, 저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요. 제가 그 사랑에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다곤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예요. 그런데 저는 그때까지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그 어떤 인간 존재보다도 더 밀접하고 더 확실하고 더 현실적인 현존을 느꼈어요. 그 현존은 감각이나 상상을 통해 가 닿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사랑을 누리는 존재의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과 유사한 것이었지요. 그 순간부터 신의 이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점점 더 거부할 수 없게 제 생각에 섞여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제 유일한 믿음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마르쿠스-아우엘리우스가 이해한 대로의, 운명에 대한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걸 언제나 성실하게 실천했었습니다. 세계의 수도, 고향, 온 마음으로 아끼는 아름답고 귀중한 조국을 그 토대를 이루는 질서와 필연성의 완전한 전체성 속에서,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과 함께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고통 및 불행에 따른 미움과 혐오의 견고한 양(量)이 모두 저 자신에게 되돌려지는 것, 그건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모든 생각의 뿌리에 예외 없이 존재하는 고통과 연결된 것이었으니까요.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누군가가 제게 우정을 가진다는 걸 상상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어요. 제가 당신의 우정을 믿는 건, 당신을 신뢰하고 또 당신이 우정의 확약을 해줘서 제 이성이 그걸 믿으라고 속삭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제 상상 속에선 그건 여전히 불가능하지요.
그렇게 상상하기 때문에, 저는 제게 우정을 갖는 이 불가능성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따뜻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정이란 제게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이고, 은유적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뜻에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은 고통에 완전히 중독된 몸과 마음을 떠나 다른 데로 이사를 해야 합니다. 제 생각은 짧은 시간 동안만 신의 품안에 거주하라고, 자주 사물들 속에 거주하지요.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 인간적인 어떤 것 속엔 결코 거주하지 않는다는 건 자연에 반하는 일일 겁니다. 그래서 우정은 신이나 세계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지 않는 생명의 나머지 전체를 네 생각에 가져다줍니다.
제가 당신께 읽어드렸던 영국 시 ‘사랑’을 동봉합니다. 이 시는 제 삶에 큰 역할을 했어요. 그리스도가 처음 저를 붙잡으러ㅕ 왔을 때 이 시를 암송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이 시를 계속해서 암송하려 하고 있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거였죠.
-사랑-
사랑은 내게 들어오라 하네. 하지만 먼지와 죄로 가득 찬
내 영혼은 뒷걸음치네.
그러나 눈 빠른 사랑은
들어오자마자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가까이 다가와 다정하게 물으시네.
뭔가 빠진 게 있냐고.
나는 대답하네.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사람이 결여되어 있어요.
사랑은 말하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이 몰인정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제가 말입니까? 아,
저는 당신을 쳐다볼 수조차 없어요.
사랑은 내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대답하네.
제가 아니라면 누가 그 눈을 만들었겠어요?
맞습니다. 주님. 그러나 저는 그 눈을 더럽혔어요. 제 부끄러움에
걸맞은 장소로 가게 해주세요.
사랑은 말하네. 당신은 모르시나요. 누가 잘못을 떠맡았는지?
사랑이시여, 그러면 제가 당신을 섬기겠어요.
사랑은 말하네. 여기 앉아서 제 살을 먹으세요.
그래서 나는 앉아서 먹었네.
조지 허버트(1593~1633)
[4] 개인성과 성스러움
「1943년 런던에서 쓴 미완성 우너고로, <전집>Ⅴ-1구너과 리바주문고판 <개인성과 성스러움.2017>에 실려 있습니다. 」
나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 잔임함을 지니지 않고선, 정의를 손상하지 않고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건넬 순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개인성에 관심이 없어. 이런 말은 가까운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에서도 건네질 수 있습니다. 우정의 아주 미묘한 그늘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저의 개인성은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저는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을 순 없지요.
이는 이른바 인격주의라는 현대적 사고 조류의 어휘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합니다. 어휘의 큰 오류가 있는 영역에서 생각의 큰 오류가 없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에겐 성스러운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성은 아닙니다. 또 인격적 개인성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그, 즉 사람입니다.
그에게서 성스러운 건 그의 개인성도 아니고, 그의 안에 있는 인격적 개인성도 아닙니다. 그에게서 성스러운 건 그 자신, 전체인 그입니다. 팔, 눈, 생각 전체 말입니다. 저는 무한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선, 그 가운데 어떤 것도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격적 개인성에 대한 존중을 정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단지 말로 정의하는 것만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많은 빛나는 개념들이 말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적 개인성은 개념 자체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엔, 그가 보고 겪고 고통당한 모든 피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굴하지 않고 기다리는 무엇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성스러운 건 다른 어떤 게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선은 성스러움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오직 선만이, 그리고 선에 연관된 것만이 성스럽습니다. 언제나 선을 기다리는 마음의 이 깊고도 어린이 같은 부분은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반면, 형제가 더 큰 과자를 막지 않는지 질투의 눈으로 살피는 어린 소년은 보다 피상적인 마음의 압력에 굴복합니다. 정의라는 말은 마음의 이 두 부분에 연결된 상이한 두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오직 첫 번째 의미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물질적인 필연성과 주변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제한들을 상상 속에서 밀어내는 모든 건 쾌감을 줍니다. 그래서 장애물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모든 것엔 쾌감이 있지요. 그 때문에, 인간 존재들의 현실성을 제거하거나 인형처럼 만드는 전쟁이나 내전 같은 격변은 사람들을 열광케 합니다. 그래서 노예제는 주인들에게 참 쾌적한 것이지요.
어떤 어린이가 덧셈을 틀렸다면, 그 실수는 어린이의 개인성의 흔적을 지닙니다. 반면, 어떤 어린이가 완벽하게 정확한 방식으로 덧셈을 해냈다면, 그 계산에서 그의 개인성은 부재합니다. 완전함은 비개인적입니다. 우리의 개인성은 우리 안의 실수와 죄의 부분입니다. 여태껏 신비주의자들이 바친 모든 노력의 목표는 ‘나’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들의 마음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려 깊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제게 한 일은 정의롭지 않아요”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이 말은 주의력 있는 사랑의 정신을 두드려 그 원천에서부터 깨워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할 권리가 있어요“ 나 ”당신은.......할 권리가 없어요“ 같은 말들은 그렇지 않지요. 그런 말들은 잠재적인 전쟁을 내포하고 전쟁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권리의 개념이 사회적 갈등의 핵심에 위치하게 되면, 쌍방은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모든 여지를 잃게 됩니다.
권리 개념이 거의 전적으로 사용되면, 진짜 문제는 실종됩니다. 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달걀을 싼 값에 팔라고 은연중에 압력을 넣으면, 농부는 “적당한 값을 내지 않으면 저는 달걀을 팔지 않을 권리가 있어요.”라고 아주 온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창가에 잡혀와 팔려 넘어갈 위기에 처한 어떤 여성이 그의 권리를 말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권리라는 단어는 그 부족함으로 인해 우스꽝스럽습니다. 이 둘째 상황과 유사한 사회적 비극은,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따라 오히려 첫째 상황과 유사한 것처럼 잘못 비춰집니다.
권리라는 말은, 창자 깊은 곳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어야 마땅한 것을 순수하지도 않고 결실도 없을 요구로 내뱉는 성가신 불평으로 만들어버리지요.
[5] 데오다 로셰에게 보낸 편지
「1941년 1월 23일에 쓴 편지로, 데오다 롯P는 카타리즘의 전문가입니다. <전집>Ⅳ-2권의 부록에 실려 있습니다.」
발라르 선생님을 통해 이번 오크Oc2 특집호에 실린, 카타르파의 정신적 사랑에 대한 선생님의 아름다운 연구를 읽었습니다. 또 저는 이전에 역시 발라르 선생님 덕분에 카타리즘에 대한 선생님의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글은 제게 강렬한 인상을 줬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카타르파에게 r아하게 끌렸습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제가 그처럼 끌렸던 주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구약에 대한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선 논문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너무 잘 해주셨어요. 히브리인들이 권력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선악 개념을 상실했다고 지적하시면서 말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으로 기득한 성스런 텍스트의 이야기들은 저를 언제나 그리스도교로부터 밀쳐냈어요. 이십 세기나 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교적 사고의 흐름들에 영향을 미쳐왔으니까요.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교라는 말로 오늘날 그 명칭 아래 포함된 모든 교회들을 뜻한다면 말입니다.
[6] 옥타비아적 영감이란 어떤 것일까
「1943년 <남부평론>의 특별 호인 (오크 문명의 천재성과 지중해적 dslrks)에 발표된 글」
미래를 향하는 대신 왜 과거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수 세기 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과거를 관조contemplation합니다. 많이 지쳤고 거의 절망 직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관조하는 데에는 더 견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몇 세기 전부터 우리는 진보의 이념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고난은 이 이념을 우리의 감성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이젠 어떤 장막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진보의 이념이 이성과 무관한 것임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보의 이념이 과학적 세계관과 연결돼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진보의 이념과는 반대되는 것이고, 진정한 철학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철학은 플라톤과 함께 가르칩니다.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만들어낼 수 없고, 더 못한 것은 더 좋은 걸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진보의 이념은 시간 속에서 더 못한 것이 더 좋은 걸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이념입니다. 과학은 드러냅니다. 에너지의 증가는 에너지의 외적 원천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을. 낮은 에너지를 높은 에너지로 변형시키는 건 적어도 똑같은 양의 높은 에너지를 낮은 에너지로 변형시킨 결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언제나 하강 운동이 상승 운동의 조건입니다. 유사한 법칙이 정신의 영역도 지배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나은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만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을 미래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미래는 텅 빈 것이고, 우리의 상상력이 그것을 채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완전성은 우리 자신을 척도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 자신과 똑같이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보다 더 나은 머리털로 만들어진 게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는 완전성을 현재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것 또는 질 나쁜 것과 뒤섞인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식별 능력은 우리 자신만큼이나 불완전합니다. 과거는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식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시간 속에서 흔들림 없듯이, 시간의 단순한 흐름만이 영원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애착과 열정은 영원성을 식별하는 능력을 어둠으로 가립니다. 하지만 어둠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관련해선 덜 두렵지요. 이미 소멸해서 우리의 열정에 어떤 수액도 공급하지 않는 과거에 대해선 특히 그렇습니다.
이미 소멸한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누구도 오크 Oc어의 나라를 되살릴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그런 희망은 철저히 말살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려를 표했지만, 그런 충성심이 프랑스의 통일성을 위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국에 위험이 된다면 w니실을 가려도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생각은 의심스럽고 그럴 필요더 없습니다. 이미 사멸했고 애도할 가치가 있는 그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고취하는 영감은 유럽의 영토 분할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영감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운명과 관련될 뿐입니다.
로마 이전 고대의 각 나라들은, 전적으론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진실의 어떤 측면을 향한 소명과 계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소명은 신의 단일성이었고, 강박적이어서 굳어진 이념을 만들어냈지요. 메소포타미아와 관련해선 그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됐습니다. 페르시아에선 선악의 대립과 투쟁이었지요. 인도에선 완전한 상태에 이른 영혼이 신과 신비로운 결합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선 신의 고유한 작용이었지요. 가득 찬 행위인 신의 비 행위, 가득 찬 현존의 신의 부재가 그것입니다. 이집트에서 그 소명은 이웃 사랑이었고,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순수함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었지요.
옥시타니아의 시는 흠결 없는 완성도를 가진 몇몇 경우에 그리스의 시에 비견할 만한 순수함을 갖습니다.
“나는 종달새가 햇살을 향해 기쁨에 찬
날개를 펴는 걸 바라보네
그러면 새는 자신을 잊은 듯
가슴에서 우러난 따뜻함을 지니고서 내려오네.“
[7] 가치의 개념을 둘러싼 몇 가지 성찰
「1941년 1월과 2월에 미발표 원고로<전집>Ⅳ-1권과 <선집Oeuvres>에 실려 있습니다.」
가치의 개념은 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가치 개념은 모든 사람 머릿속에 항상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어떤 선(善)을 향해 있듯이 말입니다. ~~~가치는 전적으로 성찰의 대상일 뿐, 경험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삶의 법칙은 먼저 철학 하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선택을 하는 건 그 자체가 가치들에 대한 비교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선택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준은 최고의 필요성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최고로 필요한 것인지는 구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 인식은 가설적입니다. 논증들은 공리들이나 앞서 논증된 정리들로부터만 도출되고 감각기관들을 통해 확인된 사실들은 다른 사실들과 연결돼야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가치는 가설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치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매 순간 우리 삶은 어떤 가치 체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이끄는 바로 그 순간에서의 가치 체계는 결코 어떤 조건하에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식은 조건적이고, 그래서 가치들은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치들에 대한 인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포기는 가치들을 믿는 걸 포기하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무언가를 향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중심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가치를 갖는 사물이 진짜로 있기나 한가? 모든 건 똑같이 가치가 없지 않을까?”와 같은 질문에 그(정신)가 아직도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 질문들은 무의미합니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방법이 없기도 하고, 더 깊은 이유가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말들을 엮어내는 능력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신은 그런 질문을 진정으로 제기할 수 없습니다. 가치의 개념이 허구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불확실할 수 없습니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건, 가치를 향한 끌림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은 자신의 존재를 불확실하게 여기는 한에서만, 가치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성찰을 통해 확립된 가치들 사이의 질서를 불확실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 질서의 원리 자체가 그걸 가로막습니다. 어떤 특정의 가치가 다른 모든 것들- 이미 가치가 부여돼서 알고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서-의 가치의 조건을 이루는 것처럼, 내 생각들이 내게 어떤 질서를 제공해주는데,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생각을, 내가 머릿속에서 분류해 놓은 걸 부정하는 더 진실한 어떤 생각을 전제해야 하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관념에 대한 가치 비교는 그 둘 모두를 생각하는 동일한 정신을 전제합니다. 즉 가정된 관념은 나에 의해 생각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관념을 관념들의 위계 속에 분류할 수 있는 것으로, 앞선 것보단 뒤에 오고 가치가 더 적은 것으로 여길 겁니다. 가치는 내 생각의 특질이기 때문에, 내가 가치들 사이에 설정하는 위계는 확실합니다. 내 생각에 외재적인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진리란 생각의 가치일 뿐임을 떠올리면 됩니다. 진리라는 단어는 다른 뜻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적 성찰은 오류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철학적 성찰은, 실천되는 한에선, 오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 조건은 엄밀한 의미의 성찰을 실천하는 걸 거의 불가능하게 합니다. 가치에 대한 끌림인 wdjtls은 어떻게 가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가치를 고려하고 판단하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위치 짓는 게 정신의 일이라면 말입니다. 그런 빠져나오기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정신의 모든 노력은 가치에 끌려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치에서 빠져나오려면, 장신은 그런 빠져나오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빠져나오기를 다른 모든 걸 넘어서는 가치로 여기려면, 다른 모든 것들에서 이미 빠져나와 있어야 합니다. 이는 악순환이므로, 성찰의 실천은 기적과 같습니다. 은총이란 단어는 이런 기적적 성격을 표현합니다. 빠져나왔다는 환상은 종종 생겨납니다. 단순히 가치가 바뀐 걸 빠져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숨 가쁜 긴장 상태에서 게임에 한참 몰두한 도박꾼은 왜 이기려 하는지, 이기는 게 왜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묻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물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몇 시간의 긴장 상태가 지난 뒤엔 그런 질문이 마음에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빠져나온 건 아닙니다. 그는 이제 탈진해서, 돈을 뜨는 게 아니라 휴식에 가치를 두게 되었을 뿐입니다. 철학적 성찰이 요구하는 빠져나오기는 한 시간 전에, 어제에, 일 년 전에 택했던 가치에서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가치에서 예외 없이 빠져나오는 겁니다. 지금 현제 끌리는 가치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돈을 따려고 몰두한 시점에서 도박꾼이 돈 따는 것을 휴식, 맛있는 걸 먹으려는 욕망, 잘 마무리된 일, 우정 그리고 그밖에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과 동등하게 여기고, 그런 다양한 모든 걸 공정히 비교한다고 해봅시다. 빠져나오기란 그런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적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은 과학처럼 인식을 획득하려는 게 아니라 마음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것임을 말입니다. 가치는 인식 뿐 만 아니라 감성과 행위에도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감성과 삶의 실천에 본질적인 변화, 즉 삶의 가장 평범한 상황에서나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똑같은 효력을 가질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철학적 성찰이 아닙니다.p136
가치는 마음의 지향일 뿐이므로, 어떤 가치를 내세우는 것과 그 가치에 이끌리는 것은 단 하나의 똑같은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시에 두 가지 가치를 생각한다면, 분열이 생겨날 수도 잇지만, 더 높이 평가하는 가치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겠지요. 성찰은 우리가 빠져나오기라고 명명한, 마음의 지향에서의 변화를 전제합니다. 성찰의 대상은 가치들의 위계 속에 순서를 확립하는 것, 마음의 새로운 지향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오기는 가능한 모든 목표를 예외 없이 포기하는 것,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렇게 하듯 미래가 있어야 할 곳에 진공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고대의 신비 속에서, 플라톤의 철학에서, 산스크리트 문헌들에서, 그리스도교에서, 그리고 아마도 언제 어디에서나, 빠져나오기는 항상 죽음과 비교됐고. 죽음을 통과하는 지혜로의 입문과 비교됐습니다. 이런 관념은 인간의 생각에 관해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랜 문헌들 속에, 즉 이집트 문헌들 속에 존재합니다. 그런 관념은 틀림없이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지혜에 대한 모든 탐구는 죽음을 향해 있습니다. 이런 관념은 인간의 생각에 관해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랜 문헌들 속에, 즉 이집트 문헌들 속에 존재합니다. 그런 관념은 틀림없이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지혜에 대한 모든 탐구는 죽음을 향해 있습니다.p137
하지만 지금 관건인 빠져나오기는 대상이 없는 게 아닙니다. 빠져 나온 뒤 생각이 지니는 대상은 가치들 사이의, 모든 가치들의, 참된 위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빠져 나온 뒤 생각의 대상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지금 이 세계에서의 삶의 방식, 즉 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순서가 매겨진 가치들은 이 세계의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철학은 가치를 향해 있고,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찰을 통해 확립된 가치들의 순서가 한꺼번에 전적으로 확립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그 순서를 생각할 때만, 오직 성찰의 노동을 통해 그 순서를 생각할 때만, 그 순서에 부합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삶이 죽음을 위해 부단히 고동치는 것, 그렇게 고동치지 않는다면 추락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믿습니다. 철학자 개개인은 다른 모든 체계와 대립하는 하나의 체계를 갖는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쩌면 인류만큼 오래됐고 희망컨대 인류만큼 오래 지속될 하나의 철학적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철학자라 칭하는 모든 사람이 이 전통을 공통의 원천처럼 여기고 뒤쫓진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이 전통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거의 같은 내용을 가질 정도로 말입니다. 틀림없이 플라톤이 이 전통의 제일 완벽한 대변자입니다. <바가와드 기따>도 똑같이 이 전통에 속합니다. 또 우리는 그에 필적하는 이집트와 중국의 문헌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유럽의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 데카르트와 칸트가 있고, 최근의 사상가들 가운데에선 라뇨와 알랭, 독일에 훗설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철학이라 칭하는 건 바로 이 철학적 전통입니다. 사람들이 이 전통의 다양성을 비난하더라도, 이 전통은 하나이고 영원하며, 진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갱신이 가능하다면, 표현과 괸련 될 뿐입니다. ~~~철학적 저술은 어떤 그림들과도 같습니다. 그 그림들은 어떤 지점에 이르러 모든 게 정돈될 때까진 색깔들의 무질서한 집합일 뿐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 철학은 생각들의 목록을 만들 뿐입니다. 그 목록 속에서 모순을 마주치더라도, 거짓말을 하면서 그것을 제거하는 건 철학의 일이 아닙니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덕분에 생각의 본잘적으로 모순되는 성격을(....), 하나의 명제와 그 반대 명제를 똑같이 손쉽게 입증하는 기법을 창안했으며, 아무것도 입증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유용한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재능 있는 모든 그리스 청년들이 독재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유용성을 추구하고 역능을 추구하는 건 선(善) 을 믿는 것이고, 가치들의 순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 맞서 손쉬운 대답을 내놓습니다. 즉 생각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말로만 이를 부인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진리의 지표를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즉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정신에게 불가능한 모든 것이 참이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기가 내게 불가능한 게 만일 거짓이라면(※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만약 거짓이라면- 편집) , 내 생각 전체가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내 생각은 계속 잘못된 것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표가 바로 데카르트의 것이기도 합니다. 데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어쩌면 다소 불편하게, 명료함을 정의합니다. 정신이 내버릴 수 없는 모든 게 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지표를 적용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내버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어떤 예외도 없이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중의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 너무 강렬해서 생각을 하는 데 그게 필수적이라고 여기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믿음을 내버렸다고 믿지만 실제론 여전히 간직하고 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썬 모든 걸 부정할 수 잇어서입니다. “아니다”라는 말은 어떤 문장에든 삽입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생각들에 거리를 두기 전에, 그것들을 형식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2+2가 4인지 5d니지를 진짜로 불확실하게 여길 순 없습니다. 하지만 67x28이 1867인지 1976인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계산을 할 때까진 둘 다 받아들이거나 거부해야 합니다. 또 계산이 잘못될 것도 염두에 둬야합니다.
[8] 모든 정당의 폐기에 대한 노트
「1943년에 쓴 미발표 원고로 <전집>Ⅴ-1권에 실려 있습니다」
앵글로 색슨 정당들은 놀이나 스포츠의 요소를 갖는데, 귀족적 기원을 갖는 제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반면 평민적 기원을 갖는 제도에선 모든 게 진지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1789년의 정치적 관점에선 정당이라는 생각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피해야할 악으로나 여겨졌다고 할까요. 물론 자코뱅들의 클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자유로운 토론의 장소였을 뿐입니다. 그 성격을 변화시킨 건 어떤 필연적인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클럽을 전체주의적 정당으로 만든 건 전쟁의 압박과 기요틴일 뿐입니다.
공포 정치 아래서 분파들의 투쟁을 지배한 건 톰스키가 말했듯 한 정당만 권력을 갖고 다른 정당들은 모두 감옥에 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대륙에서 정당들은 전체주의를 원죄로 갖습니다.
정당들에겐 손톱만큼이라도 선이 있을까요? 정당들은 순수한 형태의 악 또는 거의 그러한 악이 아닐까요? 정당들이 악이라면 실제로, 실천 속에서, 악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썩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우리의 공화주의적 이상은 전적으로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 개념은 거의 곧바로 의미를 잃었는데, 복잡하고 주의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장을 예외로 친다면 사회계약론 만큼 아름답고 강력하고 명석하고 명확한 책은 드뭅니다. 사람들은 그 책만큼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드물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은 듯이 일들이 벌어지고 또 벌어집니다.
루소는 두 가지 자명함에서 출발합니다. 첫째로, 이성은 정의와 결백한 유용성을 간파하고 선택하지만, 모든 범죄는 정념passion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둘째로,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하지만, 정념은 대부분의 경우 다르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일반적 문제를 사람들이 홀로 성찰해 의견을 표명한다고 해봅시다. 그 의견들을 비교해보면 아마도 올바르고 합리적인 부분은 서로 일치할 것이고, 부당하고 잘못된 부분들은 서로 다를 겁니다.
보편적 합의가 진실을 가리킨다고 우리가 인정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런 종류의 추론 때문입니다. 진실은 하나입니다. 정의도 하나입니다. 반면 오류나 불의는 무한히 다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바름과 진실 속에 모입니다. 반면 거짓과 범죄는 사람들을 끝없이 흩어지게 합니다. 결합은 물질적인 힘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다음의 것을 찾기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범죄나 오류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강력한 진실과 정의를 지금 여기서 실현할 수 있는 원천이 그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적합한 메커니즘이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그런 메커니즘이라면 좋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쁜 것입니다. 루소가 보기엔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불공정한 의지가 한 개인의 불공정한 의지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옳았습니다. 다만 루소는 다음처럼 생각했을 뿐입니다. 특수한 정념들이 서로 중화되고 상쇄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국민 전체에 공통되는 의지가 정의에 부합한다고. 오직 이 때문에 그는 특수의지보다 국민의지를 선호했습니다.
일반의지 개념을 적용하는 데는 몇 가지 불가결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는, 국민들이 그들의 의지를 의식하고 표현할 때, 어떤 집합적 정념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합적 정념이 개입하면 루소의 추론이 실패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루소는 이를 잘 알고 있었지요. 집합적 정념은 어떤 개인적 정념보다도 무한히 더 강력한 범죄와 거짓에의 충동입니다. 이 경우 나쁜 정념들은 상쇄되지 않고 서로를 천 배나 더 강화시킵니다. 그 압력은 거의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짜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한 가지 집합적 정념이 어떤 나라를 완전히 사로잡으면, 나라 전체가 범죄에 동의합니다. 둘, 넷, 다섯 또는 열의 집합적 정념이 나라를 갈라놓으면, 나라는 여럿의 범죄 집단으로 찢어집니다. 이런 상이한 정념들은 개인적 정념의 부스러기들이 큰 덩어리에 녹아들듯 상쇄되지 않습니다. 상쇄되기엔 숫자가 너무 적고 각각의 힘은 너무 큽니다. 싸움은 정념들을 격화시킵니다. 정념들은 지옥의 굉음을 내며 부딪치고, 사람들은 거의 지각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정의와 진실의 소리를 1초도 들을 수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 집합적 정념이 있으면 아무런 특수의지도 일반의지보다 정의와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희화화(戱畵化)된 일반의지보다 말입니다. 둘째 조건은, 국민들이 공공적 삶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물들을 선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말입니다. 무책임한 집단들을 선택하는 건 더더욱 의미가 없습니다. 일반의지는 그런 선택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정당들을 진실, 정의, 공공선의 지표에 따라 평가하려면, 먼저 그 기본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세 가지를 다음처럼 제시해 봅니다. ①정당은 집합적 정념을 만들어내는 기계라는 것. ②정당은 각각의 당원들의 생각에 집합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것. ③모든 정당의 첫째 목적이자 궁극적인 유일한 목적은 무한한 자기 확장이라는 것.
바로 이 세 가지 성격으로 인해 정당은 그 싹에서부터 그리고 그 열망에서 전체주의적입니다. 그렇지 않은 유일한 경우는, 정당을 둘러 싼 것들이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일 경우입니다. 이 세 성격은 정당의 활동을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에겐 너무 확실한 진실입니다.
원칙적으로 정당은 특정한 공공선의 관념에 봉사하는 도구입니다. 어떤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에 연결된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해관계와 공공선이 일치할 수 있는 건 공공선에 대한 특정한 관념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공선에 대한 그런 관념은 극도로 모호합니다. 예외 없이, 정도의 차이도 없이 말입니다. 제일 일관성이 없는 정당이건 제일 엄격하게 조직된 정당이건 독트린의 모호성에선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를 아무리 심도 깊게 연구한 사람이라도 한 정당의 독트린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제시할 순 없습니다. 자기가 속한 정당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스스로에게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일 그걸 드러낸다면 순진하게도 자신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여길 텐데, 정당의 독트린이란 표현이 애초부터 무의미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동안 이념 문제에 대해 쓰고 연구한 사람도 독트린을 갖기 힘듭니다. 더욱이 집합체는 결코 독트린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독트린은 집합적 상품이 아닙니다.
정당의 목적은 모호하고 환상적입니다. 만일 정당의 목적이 현실적이라면, 무척 큰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공공선 관념을 사고 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정당의 존재 자체는 손으로 만져지듯 명백해서 공들여 알아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당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건 불가피합니다. 이때부터 우상숭배가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인 건 오직 신만이 정당하게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당의 본질적 경향은 전체주의적입니다. ~~~정당들은 허구적이고 텅 비었고 현실성 없는 공공선 관념을 지녔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힘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와 거짓말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결합합니다.
모든 정당은 선전을 합니다. 그렇지 않은 정당은 선전을 하는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사라지지요. 모든 정당이 선전을 한다고 시인합니다. 그런데 정당이 대중을 교육하고 국민의 판단력을 함양한다고 말하는 r서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은 없습니다.~~~정당이 하는 일은 교육이 아니라 길들이기입니다. 당신들의 생각을 철저하게 장악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길들이기 말입니다.
의원이건 입후보자건 단순한 열성당원이건 어떤 당원이 공개적으로 다음처럼 선언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약속드립니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건 간에 제가 특정한 집단의 일원임을 완전히 잊고 오직 공공선과 정의만을 위해 저 자신을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발언은 매우 나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마저도 그를 배신자로 여길 것입니다. 덜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는 왜 당에 가입했지?”라고 질문할 겁니다. 정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공공선과 정의만을 추구하는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순박하게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결국 그 당원은 정당에서 축출되거나 권한을 상실할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미 “저는 진실을 증언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요18:37~38). 오직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습니다. 즉 진실이란 오로지 모든 걸 바쳐 전적으로 진실만 염원하는 사람의 정신 속에서 솟아오르는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오류(이 둘은 같은 것이지만)는 진실을 염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들이거나, 진실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함께 염원하는 사람들의 생각들입니다. 예컨대 진실을 염원할 뿐만 아니라 기존 관념들에 부합하기를 동시에 염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실을 염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신비들 가운데 신비입니다. 사람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완전성을 표상하는 신, w니실, 정의와 같은 말들을 어떤 관념도 개입시키지 않고 속으로 열망을 갖고 되뇔 때, 그 말들은 영혼을 상승시켜 빛 속에 머물게 합니다.
미리 내용을 속단치 않고 텅 빈 상태에서 진실을 염원할 때 우리는 빛을 만납니다. 주의를 집중한다는 건 이런 것입니다. 한편으론 진실, 정의, 공공선을 판별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론 단체의 성원에 걸맞은 태도를 유지하면서, 공공적 삶의 극히 복잡한 문제들을 검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생각거리에 동시에 집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에 몰두하는 사람은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정의와 진실을 포기한다고 해서 고통이 주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정당들의 체계는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당원ㄷ르을 제일 가혹하게 처벌합니다. 이런 차별은 거의 모든 것, 즉 경력, 감정, 우정, 명성, 외적 명예, 심지어 가족생활마저도 손상시킵니다. 공산당은 이런 체계를 거의 완전하게 발전 시켰지요.
처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판별 능력이 손상됩니다. 만일 그들이 당의 지배력에 대항한다면, 그런 대항의지 자체가 진실에 낯선 경계해야 할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계 또한 진실에 낯선 것이어서, 점점 빗나가게 됩니다. 진정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건 사람에게 너무 힘들고 폭력적이어서, 작은 감정적 교란만으로도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염원과 두려움의 동요에 맞서, 자신에 내재하는 판별 능력을 보호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몹시 복잡한 계산을 한 뒤 답이 짝수일 때마다 매를 맞아야 한다면,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선 마음의 육체적 부분에 자리 잡은 어떤 것이 항상 홀수를 얻기 위해 계산에 개입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개입하면 짝수가 아닌 곳에서도 짝수를 얻게 됩니다. 흔들리면서 주의력이 손상되는 것이지요. 계산이 매우 복잡해서 최고의 주의력이 필요하다면, 틀림없이 자주 틀리게 됩니다. 그 삶이 아무리 똑똑하고 용기 있고 진실을 사랑해도 소용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매를 때리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려면, 도망쳐야 합니다.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야 합니다.
정당은 놀라운 기구입니다. 정당으로 d니해 한 나라 전체에서 그 어떤 사람도 공공적인 일을 다루면서 선, 정의, 진실을 식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매우 적은 수의 우연의 일치를 제외하곤 공공선, 정의, 진실에 반대하는 조처들만 결정되고 실행됩니다.
가톨릭교회에 처음 나간 초심자는(또는 가톨릭 교회에 계속 머물기로 확고히 결심하는 기성 신자도) 교리를 통해 선악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는 문턱을 넘어서면서 이단으로 단죄 받지 않을 것을 공언합니다. 즉 곧이 곧 대로의 신앙의 모든 조항을 통째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조항들을 하나씩 되새긴 건 아닙니다. 그 조항들을 다 공부하는 건 최고의 지성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 평생을 바쳐도 불가능합니다. 각각의 단죄들이 행해진 역사적 정황을 모두 공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확언들을 받아들이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간단합니다. 그런 확언들을 내뱉는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면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장을 교회의 권위를 통해서만 내세우려 했습니다. 모든 논쟁을 배척하면서 말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다른 것이 더 필요 없고, 그의 주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떤 논쟁으로도 설득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명백함의 내적인 빛은, 진실에의 염원에 대한 보답으로 인간 영혼에 위로부터 주어지는 식별 능ㄹ겨은, 폐물이 됩니다. 사람의 영적 운명에 대한 모든 탐구에서 물러나 덧셈과 같은 눈먼 일이나 하라고 말입니다. 이제 생각의 동기는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염원이 아니라, 미리 확립된 가르침들에 부합하려는 욕망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가 진실의 정신을 그토록 폭넓게 억압했다는 건 비극이 아니러니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종종 알아차렸지요. 종교재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억압이 완전할 수 없었던 건 신비주의 속에 안전한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또 다른 비극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종교재판 체제의 정신적 억압에 맞선 저항운동이 다시 정신적 억압의 길을 뒤따랐던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저항의 두 산물인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3세기 동안의 성숙을 통해 1789년의 정신을 만들어내는 데 많이 기여했습니다. 정당의 게임에 입각한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각각의 정당들은 파문의 위협으로 무장한 세속적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정당의 영향력은 우리 시대의 모든 정신적 삶을 감염시켰습니다.
정당에 가입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 정당의 행동과 선전에서 정의롭고 올바른 어떤 걸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공공적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정당의 입장을 공부하진 않습니다. 그는 정당에 가입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입장들을 수용합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은 당의 권위에 종속됩니다. 조금씩 그 입장들을 알게 될 때 그는 아무 검토도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일 겁니다.
정당들의 또 다른 성격, 즉 집합적 정념을 만들어내는 기계로서의 성격은 너무나 명확해서 논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집합적 정념은 정당들이 당원들의 마음에 압력을 가하고 외적 선전 활동을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입니다.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정당의 맹목적 정신은 정의에 대해 귀를 막게 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결백한 사람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증오하게 만든다고. 사람들은 그것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신을 만들어내는 제도들을 없앨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정당이라는 제도가 거의 순수한 악을 이루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정당들은 원리적으로 나쁘고, 실천적 효과도 나쁩니다. 그러니 정당들의 폐지는 거의 순수한 선(善)일 것입니다. 정당들의 폐지는 원리적으로 매우 정당하고 실천적으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정당에 가입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 사이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반 종교적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뿐이고, 또는 그리스도교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젠 종교의 영역에서도 투사(鬪士)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하물며 초등학교에서도 생각을 자극하려고 찬성 또는 반대를 하는 연습을 시킵니다. 교사는 어린이들에게 유명 작가의 글들을 읽어주고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 찬성이예요, 반대예요? 그 이유를 말해보세요. 하지만 불쌍한 학생들은 세 시간 동안 논술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시험에 대해선, 단 5분도 찬성인지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 글에 대해 묵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말해보세요. 라고 하는 편이 훨씬 편할 텐데요. 이제 거의 모든 곳에서, 심지어 순수하게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당파적 태도를 취하는 것,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을 대체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의 세게에서 나병입니다. 이 나병은 온 나라에 퍼져 생각 전체를 마비시켰습니다. 이제 모든 정당은 폐지하지 않고선, 우리를 죽이는 이 나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Review
얼마 전 ‘칠십대가 인생의 황금기’라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칠십대는 삶의 의무감에서 벗어난 해방감, 여유롭게 시간에 맞추어 살며 스스로 속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에서 행복하다는 것이다. 팔십대가 되면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고, 행동에 제약이 따르고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므로 인생은 또 고달파진다.
성서에서 ‘샬롬’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뜻이다, 성서에는 이 말을 평안, 평강, 평화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 뜻은 모두 같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 목이 마른 자가 해갈을 맛보는 것, 가슴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 구분된다. 말하자면 세상에서의 행복은 손에 든 행복이다. 언제든 놓칠 수 있는 행복,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조건이 함유되어 있는 행복이다. 그러기에 그중 하나라도 결핍이 일어나면 곧바로 잃어버리는 행복이다. 말하자면 칠십대에서 행복하고 팔십대에서 잃어버리는 행복이다. ‘시몬 베유’는 이 책의 서두에서 그 행복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 재화, 부, 권력, 평판, 지식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사랑, 그들의 번영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습니다. 언젠가 좀 더 많이 갖게 되면 만족하리라고요. 그런데 그처럼 믿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본문)
여성 철학자,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으로 농장과 철강회사, 전자 회사의 현장에서 일하며 몸소 노동을 체험했고,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말년엔 프랑스 드골의 자유 프랑스 선언에 반대하며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서른네 살의 짧은 생(1909~1943년)을 그야말로 불꽃 같은 정열로 불태웠다. 그녀가 남긴 수많은 저술은 1950년대, 1960년대에 들어 유럽 대륙과 영어권 세계에서 명성을 얻으며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학문적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알베르 카뮈는 그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그녀가 지닌 여러 호칭 가운데 “신비주의자”라는 점이 강한 호기심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1938년, 서른한 살이 되던 해 노동 현장에서 극심한 노동 현장에서 고통 중에 있을 때의 신비한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 어떤 인간 존재보다도 더 밀접하고 더 확실하고 더 현실적인 현존을 느꼈어요. 그 현존은 감각이나 상상을 통해 가 닿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사랑을 누리는 존재의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과 유사한 것이었지요. 그 순간부터 신의 이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점점 더 거부할 수 없게 제 생각에 섞여들었습니다.”(본문)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 들은 모두 이 무렵에 쓰인 글들로, 앞에 네 개는 신학적인 내용으로 인간이 신(하나님)에 가까이하는 길은 “가짜 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인간은 죄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는 곧 악이며 오직, 순수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죄와 고통의 결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를 속이는 가짜 신(쾌락과 조건적 행복)에게 사랑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함과의 접촉은 악을 변화시킵니다. 고통과 죄의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은 오직 이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순수함과의 접촉으로 인해, 고통은 서서히 죄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른 한편, 죄는 단순한 고통으로 변합니다. 우린 이런 초자연적 작용을 회개라 칭하지요. 그러면 기쁨이 우리가 지닌 악에 빛을 비춥니다.”(본문)
신학적인 글 외에 두 편의 글은 카타리즘에 대한 비평, 그리고 나머지 두 편은 인간이 가치로 여기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드골이 이끄는 망명 정부에서 일할 때, 전후 프랑스 재건을 구상하며 쓴 글로 정당이 만들어내는 집합적 정념의 부조리를 제시한 글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에는 베유의 신학적 배경이 들어 있다.
이 책은 일반 독자들에게 호불호(好不好)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앞의 네 편의 글에서 순수한 신앙의 관점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일반이라면 마지막 글 <모든 정당의 폐기에 대한 노트>에서 요즘처럼 국내 정치에서 정당 간의 극한 대립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본문)
“완전히 순수한 것은 여기 이곳에 현존하는 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신이 아니라면 결코 순수할 수 없겠지요. 만일 신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해야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힘든 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동의 영역에 속한 게 아닙니다. 신을 향하게 우리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 것, 시선이 멀어지면 다시 붙잡아 데려다 놓는 것, 매순간 모든 힘을 다해 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힘든 이유는 우리 자신의 거의 전부인, 우리 자신인, 우리가 우리의 자아라고 명령하는 것인, 우리 자신의 가장 보잘것없는 부분의 시선을 신에게 고정시킬 때 죽음에 처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부분은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항합니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거짓말을 지어내면서.”
“그런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신이라 칭하는 가짜 신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그들에게 신에 대해 말해준 특정한 사람들, 어떤 사회적 모임, 어떤 생활 습관, 또는 마음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 감각적인 기쁨. 희망, 위안, 위로의 어떤 원천 등을 좋아할 뿐인데, 신을 생각한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때 마음의 보잘것없는 부분은 완전한 안전을 누립니다. 기도도 그것을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
“또 다른 거짓말은 쾌락과 고통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쾌락의 끌림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촉발한 행동이나 회피가 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그처럼 말려들 때, 우리는 쾌락이나 고통에 굴복했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엔, 그가 보고 겪고 고통당한 모든 피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굴하지 않고 기다리는 무엇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성스러운 건 다른 어떤 게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선은 성스러움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성찰의 대상은 가치들의 위계 속에 순서를 확립하는 것, 마음의 새로운 지향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오기는 가능한 모든 목표를 예외 없이 포기하는 것,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렇게 하듯 미래가 있어야 할 곳에 진공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당파적 태도를 취하는 것,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을 대체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의 세계에서 나병입니다. 이 나병은 온 나라에 퍼져 생각 전체를 마비시켰습니다. 이제 모든 정당은 폐지하지 않고선, 우리를 죽이는 이 나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결론은 정당이라는 제도가 거의 순수한 악을 이루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정당들은 원리적으로 나쁘고, 실천적 효과도 나쁩니다. 그러니 정당들의 폐지는 거의 순수한 선(善)일 것입니다. 정당들의 폐지는 원리적으로 매우 정당하고 실천적으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
“정당에 가입하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 사이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반 종교적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뿐이고, 또는 그리스도교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젠 종교의 영역에서도 투사(鬪士)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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