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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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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8(2017)년 6월 17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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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意事項 ;
1. 이 글은 초고본(草稿本)으로 오류(誤謬)가 다수 있을 수 있음으로 참고로 읽어주시고 인용을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는 교단 최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필자의 실험적인 주해이다. 교단의 공식적인 해석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주해이므로, 필자의 개인적인 주해에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3.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의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가 포덕 158(2017)년 2월 25일에, 관련 게시판에 게재한 바가 있기 때문에, 1972년도 판의 第 二 編 人生觀. P 161까지(1968년도 판의 第 二 編 人生觀. P 270.까지)를 제외한. 1968년도 판에 수록되지 않은 부분만(1972년도 판. PP.165-287) 다루었다. 그 이유는「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에서 어느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사료되어 제외 시켰다. 그러나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이번에 발표되는「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와 같은 형식으로 註解書를 만들어 발표할 생각입니다.
4. 1972년도 판 『東學之人生觀』의 인쇄에 있어, 단점은 國漢文混用에 있어 독자들이 쉽게 읽어 이해할 수 있는 記述方法을 활용해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여 오히려 이해에 방해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한자로 기술함으로서 읽는 데 매우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고, 반면에 한자를 사용하면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어들을 한글로 기술함으로써 더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독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1940년대 중반에 기술된 글인데도 불구하고 야뢰의 개인적인 개성일 수 있으나 1920-3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난해한 문장 표현의 文套(어떤 사람이 글을 쓸 때 나타내는 表現上의 버릇)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현대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漢文套의 표현 때문에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야뢰의 입장에서 동학과 천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위한 설명과 독자적인 해석을 하기 위하여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겠지만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임의로, 야뢰식 매우 난해한 新造語를 많이 만들어 가며 설명하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단어는 , 그러므로, -할지라도, 어쨌든, -라고 말한다. 를 이름이다, 등등이다. 뿐만 아니라 佛敎에서만 사용되는 特殊 用語들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매우 難解한 글로, 水雲先生께서 論學文에서 말씀하신, 東學과 天道敎만의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 의 獨特한 敎義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많은 障碍를 주고 있다고 思料된다.
5. 註 00 ; 를 설명하는데 있어 “---와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이라고 기술한 의도는, 주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내용들을 여기저기에서 해당 내용들을 뽑아내어 설명의 순서와 誤, 脫字를 바로 잡고, 단어나 구절들의 해석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어서 정리하는데 있었다.
『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
목차.
1. 들어가는 말.
2. 『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 內容.
3. 나가는 말.
4. 참고문헌 자료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독자 여러분들께 한 바가 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번에 주해서를 올립니다.
‘야뢰 이돈화의 교리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等等은 전문 철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敎義 解說書이다. 이러한 교서를 읽어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체계를 세워 교화와 포덕에 활용하려면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서에 앞서 관련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이상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이해와 熟知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교서들에서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生疎한 용어들, 구절, 문장 등의 出典에 사용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교서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야뢰 이돈화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이긴 하지만, 인용에서 가장 중요한 原典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는 조금씩 다른 것들이 많아 이해에 혼란을 주고 있다. 또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함에 있어, 신, 성사님들께서 사용했던 용어들을 바탕으로 하여 설득했더라면 오히려 이해가 훨씬 쉬웠을 부분들이, 서양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함으로써 難解하고 난삽(難澁)하게 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儒彿仙의 특수 또는 핵심용어들을 아무런 事前 설명도 없이 인용함으로서 더욱 난해하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이번에 『東學之人生觀』의 비교 분석 연구에서는 출전과 오류를 철저히 찾아서 밝혀 『東學之人生觀』하나만이라도 정확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한 인간의 品格과 思想을 상세히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판단의 매개체(媒介體)가 된다. 그 사람의 言行(말과 행동)과 그의 著作(글)을 통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言行과 著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삶과 사물에 대한 가치기준이 무엇인가와 그가 읽은 書冊의 분야와 내용들인 것이다. 어떤 분야의 책들을 얼마나 읽었으며(다양한 분야의 범위와 독서량)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수가 있다.
이번에 필자가 밝히는『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를 통하여, 야뢰의 광범위한 지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와 야뢰의 교의해석에 있어 虛實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리라 믿는다. 동시에 필자가 構築한 필자의 獨自的인 思想과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敎義解釋과 萬事萬物에 대한 지식의 한계 그리고 삶과 사물에 대한 가치기준 등등이 독자들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아래의 글은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1)」의 말미(末尾)에 실었던 내용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옮겼다. ‘아래에 소개되는 1972년도 판에 수록된 내용은 原典 그대로일까? 원본이 필자에게는 없으므로, 원본에 대한 평가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연구태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에 주해를 달고 있는 부분의 내용 중, 상당부분이 야뢰 선생의 원전의 내용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주해를 시작하였다는 점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서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된 附錄本 『東學之人生觀』은 (未完) P.270.의 상태로 끝이 났으므로, 더 이상의 비교분석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래에 소개되는 1972년도 판에 수록된 내용은 原典 그대로일까? 원본이 필자에게는 없으므로 원본에 대한 평가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비교분석 연구에서 느껴지고 추측되는 것은, 원문에 많은 添削과 加筆을 했을 뿐만 아니라 重刊者의 私見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疑懼心과 불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附錄으로 수록된 『敎政雙全』도 원문이 없어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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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目次는,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 後尾에 附錄으로/ PP. 215-270. 수록된 附錄本에는, 이 目次와 內容이 揭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새로 추가된 자료이다. 1972년도 판에 수록된 내용의 전체 목차이다.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127.
四 死와 來世; 146.
五 運命觀
第 三 編 人生問題(福念編); 163.
第一章 念의 造化; 165.
一 念; 165.
二 善과 惡; 168.
三 念과 苦樂 및 禍福; 171.
四 念과 業因; 181.
第二章 人間五福; 183.
一 濟人疾病; 184.
二 長生不死; 190.
三 萬事如意; 198.
四 道成德立; 206.
五 布德廣濟; 214.
第三章 同歸一體; 219.
一 社會와 個體; 219.
二 社會와 精神; 221.
三 同歸一體의 社會; 224.
第 四 編 人生問題(夜雷 對 正菴 問答編); 229.
一 進化와 創造; 231
二 無神論; 235.
三 旣成宗敎; 238.
四 福善禍淫; 240.
五 攸好德; 246.
六 精神統一; 255.
七 法悅; 261.
八 樂天과 厭世; 266.
九 利己와 利他; 271.
十 無窮我; 275
附錄 敎政雙全; PP.289-333.
2. 『東學之人生觀』의 註解書 內容.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P.127.
四 死와 來世. P.146.
死와 來世는 종교의 생명이다. 死와 來世는 人生 悲哀를 풀어주는 不死藥이요 大宇宙 大悲壯을 해결하는 靈通的 隧道(굴-턴넬)이다. 만약 인간 세상에 死와 來世의 문제가 없다면 인생은 암흑의 지옥절벽에 面墻直立한 죄수의 무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죽은 후에 문제보다도 오히려 生前의 문제이다. 과거와 생전의 길도 끊어 놓고 來世의 길도 막아 놓고 현재라는 찰나적인 극소의 입장에서 부단한 惡 투쟁으로 멸망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산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세상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來世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信者의 幻影일런지 모르는 것이며 信者 이외에 곧이 들을 사람은 없다. 부활한 사람의 고백이 없다고 하여 그것으로 來世의 有無를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왜 그러냐하면 세상에 만일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기적이 나타난다면 세상의 因果生活은 즉시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註 00 ; 死와 來世는 人生 悲哀를 풀어주는 不死藥이요 大宇宙 大悲壯을 해결하는 靈通的 隧道(굴-턴넬)이다. - 인간에게 죽음과 내세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비애를 위로해주는 불사약과 같은 존재요, 대 우주의 커다란 슬픈 마음을 달래주는 신통하고 교묘하게 잘 통과 할 수 있는 터널과 같은 것이 된다. /신통하게 통과할 수 있는 터널과 같은 것이다.
註 00 ; 만약 인간 세상에 死와 來世의 문제가 없다면 인생은 암흑의 지옥절벽에 面墻直立한 죄수의 무리가 되고 말 것이다. - 만약에 인간 세상에 죽음과 내세의 문제가 없다면 인생은 암흑과 같은 지옥의 절벽과 같은 높이 쌓은 담장 앞에 똑바로 마주 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탈출할 방도가 없는) 한 무리의 죄수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 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재정리.
註 00 ; 面牆直立·/ 面墻直立 - 면장은, 집 앞쪽에 쌓은 담. 또는 담장이나 울타리를 대한다는 뜻으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거나 견식(見識)이 좁음을 비유적으로 쓰는 말이다, 면장직립이란, 높이 쌓은 담장 앞에 똑바로 마주 선 모양으로 막막한 심정을 드러내거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 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재정리.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서 來世의 존재를 믿게 되는가? 나는 來世의 존재를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우선 내가 死後 生活을 믿게 된 이유를 참고적으로 몇 가지 적어보자. P.147.
➀ 慰安 ; 來世문제가 이상하게도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그 첫째 까닭이다. 그 문제를 믿음으로 인하여 자살하려는 위기를 갱생부활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兄弟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 來世의 有無를 토론하는데 兄은 있다고 주장하고 아우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곁에서 듣고 있든 부친이 형제에게 물었다. 兄에게 「네가 죽어 보니까 來世가 있든가?」 하고 물으니 아니라고 하면서 있을듯해서 한 소리라고 하였다. 다음은 동생에게 「너도 죽어 보니까 來世가 없드냐?」하고 물은즉 역시 아니라고 하면서 없을듯해서 한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아버지 되는 學者는 兄弟에게 일러 가로되 「네 두사람의 말이 있을듯하다는 것이나 없을듯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뜻이 아니냐. 마찬가지 뜻이라면 있을듯하다는 것이 없을듯하다는 것보다 낳지 않느냐」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없을듯하다」는 것이 「있을듯하다」는 것보다 낳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심의 本情으로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이 형의 말을 쫒게 되리라. 말 自體에 理가 있고 만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 / PP.148-149.
註解 ; 나는 來世의 존재를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 야뢰는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➀ 慰安 ➁ 聖訓 ➂ 直覺 ➃ 靈界通信 등의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야뢰가 사후 생활을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는 야뢰의 주장이 너무나도 我田引水格이요, 固陋하고 世俗的이며 旣成宗敎들이 교도들을 속여 盲信토록 하는 弊端을 자초하는데 사용되어 오는 주장에 불과 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例文은 出典도 확실하지도 않고 너무나 진부(陳腐)하고 상투적(常套的)이다.
더욱이나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水雲心法 어디에도 내세에 대한 믿음이 동학의 이치라고 설명한 바가 없다. 어디까지나 야뢰 개인의 믿음이고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말 自體에 理가 있고 만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진리가 아닐까?’라는 마지막 결론은, 교리해석의 대가로서 일인자로 추앙받고 있는 야뢰가 말해서는 안 되는 斷言이었다. 세계역사는 물론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많이 만나게 되는 성인과 선구자들의 주장들이 생존의 시대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아 순교나 처형을 받아 목숨을 앓거나 유배, 추방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이 떠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인류에 회자(膾炙)된 사상의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니다. 우리들의 신,성사님들도 그 반열(班列/품계(品階)나 신분, 등급 따위의 차례.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地位나 位置-오암)에 올라 있는 것이다.
말 自體에 理(언어 본래의 의미-오암)가 있지도 않고, 만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 하여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상식인 세상이다. 오늘날 集團知性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荒唐)한 것이라는, 즉 對策 없는 群衆心理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자신과 자신들이 숙명적으로 속해 있는 집단에 대한 自害行爲라는 것을 모르는, 대중의 集團無知의 한 현상인 것이다. 만약 集團無知인 集團知性이 時代精神이라면 그 나라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 진리가 될 것이다.
➁ 聖訓 ; 千羊之皮가 一狐의 腋만 같지 못하고 千人의 대답(諾)이 한사람의 곧은 말(諤)만 못한 법이다. 한사람의 聖者의 直言이 萬人劣者(어리석고 모자라는 수많은 사람들-오암)의 주장을 이기는 것이다. 天下 百代의 學者로 칭하는 석가, 예수, 마호멧트, 崔水雲 등 이들의 敎訓중에는 어느것이든지 來世의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가? 項羽, 나폴레옹 등 阿修羅界의 인물들이 來世가 없다는 주장에 비하여 어느 것이 진리이겠는가? 우리는 來世와 같은 直覺의 문제는 오직 聖者의 말 뿐에 限하여 있을 문제어늘 왕왕이 그와 반대되는 욕심쟁이, 권모술수가, 영웅정치가, 영웅군략가 등의 언어 행적에서 그 眞否를 판단코저 하였다. 그렇잖으면 고집불통의 學者의 理論에서 그 眞否를 찾고저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學者의 말에 의거하여 來世의 존재를 믿는 것이 보통사람으로서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 P.149.
註 00 ; 千羊之皮가 一狐의 腋만 같지 못하고 千人의 대답(諾)이 한사람의 곧은 말(諤)만 못한 법이다. - 이 말의 원문은, 千羊之皮 不如一狐之掖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로 「史記」의 商君列傳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알려진 문장이다. / 腋은 掖의 통자. 諾 : 대답할 낙. 諤 : 곧은 말할 악.
이 말에 담겨진 뜻은, 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네, 네'하고 대답하는 것은, 한 명의 뜻있는 사람이 나서서 반대의 의사를 말하는 것만 못하다. 는 내용으로 천명의 아부하는 소리가 한 명의 정직한 충고만 못하다는 말이다. 商君列傳에 나오는 고사는 다음과 같다.
상앙(商鞅)은 위(衛)나라 임금의 후궁 소생으로 공손(公孫)으로 행세했고, 조국을 떠난 뒤부터는 위앙(衛鞅)으로 행세를 했다. 그 뒤 진효공(秦孝公)의 재상으로 크게 공을 세워 상군(商君)에 봉해짐으로써 상앙(商鞅)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앙(商鞅)이 임금의 신임 아래 일인독재를 10년 동안 계속하자 살얼음판 같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나라만은 부강해 지고 있었다.
하루는 옛날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던 조양(趙良)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상앙(商鞅)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며 백리해(百里奚)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나으냐고 물었다. 백리해(百里奚)는 진목공(秦穆公)을 도와 천하를 제패한 어진 재상이다. 조양(趙良)은 먼저, “천 마리의 양의 가죽이 한 마리의 여우의 겨드랑이만 못하고, 천 사람의 네네 하는 것이 한 선비의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千羊之皮 不如一狐之掖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라고 전제한 다음, 그의 잘못된 정치와 그릇된 망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곧 선후책을 강구하여 머지않아 밀어닥칠 화를 미연에 방지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상앙(商鞅)은 조양(趙良)의 충고대로 벼슬과 봉지를 나라에 도로 바칠 생각은 없었다.
조양(趙良)이 다녀간 다섯 달 후에, 효공(孝公)이 죽고 태자가 뒤를 잇자 원수진 사람들이 상앙(商鞅)을 반역자로 고발했다. 이리하여 그는 함양시가에서 다섯 마리 소가 끄는 수레에 머리와 사지가 찢기어 죽는 참혹한 형을 받아 최후를 마쳤다./ 관련 자료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註 00 ; 阿修羅界 - 아수라계(阿修羅界)는 수미산 옆의 큰 바다 밑에 있다. 네 종류의 아수라계가 겹쳐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아수라계는 바다 밑 2만 1천 유순에 있고 나후아수라왕(羅?阿修羅王)이 다스린다. 둘째는 이 나후 아수라계에서 2만 1천 유순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용건아수라왕(勇健阿修羅王)이 지배하고 있다. 셋째는 화만아수라왕(華?阿修羅王)이 다스린다. 용건아수라계에서 지하로 2만 1천 유순 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역시 화만아수라계에서 지하 2만 1천 유순 깊이에 있다. 비마질다아수라왕(毘摩質多阿修羅王)이 다스리고 있다. 아수라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과 분위기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여자들도 많다. 조금도 심심하거나 따분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살 만한 곳이 아수라계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아수라에게는 전설이 하나 따라 다니고 있다. 아수라만큼 회한과 애증이 서린 신(神)도 드물다. / '수미산은 그 높이가 8만 유순(由旬)'이라 한다. 1유순은 약 15km이기 때문에 8만 유순(由旬)은 약 120만km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용어사전과 관련 자료에서 정리함.
원래의 아수라는 천상계에서 살았다. 그러면 처음부터 천상계에서 살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사실 아수라는 인도의 신이었다. 그것도 정의의 신이었다. 그런데 인도의 신들이 불교를 맞이하면서 천상계로 올라온 것이다. 하여간 정의의 신으로 멋지게 살았던 아수라에게 비극의 조짐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리천(?利天) 선견성(善見城)에서 살던 제석천(帝釋天) 때문이었다. 제석천이 어느 날 아수라의 아름다운 딸 사지(舍脂)를 만났다. 보자마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곤 아수라에게 딸을 달라고 간청했다. 아수라가 생각해보니 신들의 제왕인 제석천의 왕비가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말 그대로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란다는 뜻.-오암)이라 그 자리에서 허락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위대한 불법수호신인 제석천이 어느 날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만 아름다운 사지를 보자 참지를 못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는 절차도 밟지 않고 궁으로 데려가 버렸다. 물론 머지않아 결혼할 사람이지만 지나친 것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의의 신 제석천은 분기탱천(憤氣撑天-분한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이 격렬하게 솟구쳐 오름-오암)했다. 여기에서부터 불교사에 둘도 없을 대 전쟁이 벌어진다. 이른바 제석천과 아수라의 대 전쟁이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거인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나 기간토마키아와 같은 것이었다. 이름하여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된 것이다. 바로 이 말의 유래와 기원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신화에서 천둥바람둥이 제우스를 이길 수 없듯이 결국엔 제석천의 승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참으로 아수라에겐 억울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아름다운 심해에 그럴듯한 용궁을 짓고 살았다. 그 용궁은 전부가 칠보로 장식되어 있어서 칠보성(七寶城)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수라는 강력한 해양세력으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렇지만 천상계에 대한 미련과 회한은 몹시 깊은 것이었다. 그래서 종종 심술도 부리곤 했다. 태양신인 일천(日天)과 달의 신인 월천(月天)이 머리위로 지나가면 가끔 잡아먹어 버리곤 했다. 이것을 세상에선 일식(日蝕)이니 월식(月蝕)이니 불렀다. 모두가 아수라의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용어사전에서 정리.
註解 ; 項羽, 나폴레옹 등 阿修羅界의 인물들이 來世가 없다는 주장 -項羽나 나폴레옹을 누가 阿修羅界의 인물들이라고 평가했으며, 그들이 언제 어디서 來世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말을,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는 今時初聞의 일이다. 前提 자체가 잘못된 虛構이다.
세계 역사상 악명 높은 사람이 項羽, 나폴레옹 뿐이랴? 춘추전국시대의 대도적 도척(盜跖). 분서갱유를 한 진시황,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독재정부를 운영한 이태리의 무솔리니, 유태인 6백여 만 명을 학살했다고 알려진 독일의 히틀러, 무고한 생명을 수없이 죽이고 투옥시킨 소련의 스타린, 조선의 순조로운 建國과 發興을 위하여 수많은 살생을 서슴지 않았던 태조 등등은 阿修羅界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들이 한 결 같이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혹한 정치를 했다고 확증할 자료가 있는가?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악한 사람은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선한 사람은 내세가 있다고 철저히 믿고 산다. 는 추론은, 兩斷論法의 盲點인 것이다.
註 00 ; 도척(盜跖)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大盜賊). 도척(盜蹠)이라고도 쓴다.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었다는 설(說)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실재인물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성격이 포악하여 날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사람의 간을 생으로 먹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수천의 부하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고 여러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전한다.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공자와 도척이 가공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註 00 ; 분서갱유(焚書坑儒) - 중국의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이듬해 유생들을 생매장한 일./어학사전들에서.
註 00 ; 양단논법(兩斷論法) - 槪念의 外延을 어떤 일정한 特徵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어학사전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
➂ 直覺 ; 來世 有無의 문제는 학자의 理論에서 증명할 문제가 아니요, 영웅의 언어 행적으로 판단할 문제도 아니다. 오직 자아의 직각으로 그것을 느낄 문제이다.
나는 거의 直覺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가) 대우주는 무궁하다는 것(有形無形)
(나) 神은 全知全能하다는 것.
(다) 무궁과 전지전능은 無所不在(하나님의 적극적 품성 중의 하나로, 그 존재와 섭리가 있지 않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다 있음을 이르는 말-오암)를 의미한다는 것.
(라) 그러므로 영혼도 존재한다는 것.
(마) 영혼의 존재는 必然으로 영혼 개체 존재를 直覺케 되는 것,
(바) 그러므로 인간의 來世는 있다는 것.
(사) 靈界와 世界는 反對一致의 眞理에 神의 理念으로 연결된다는 것. PP.149-150.
註解 ; 윗글 (가)에서 (사)까지 7개 항목은, 야뢰의 개인적인 직각에 의하여 느낀 것이지만
내세에 대한 유무를 말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준비된 것이므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인 직각에 머무는 느낌이라는 것이 확대되어 일반화가 가능한가이다. 삶의 궤적(軌跡)이 다르고 살아오는 과정에서 생성된 경험과 가치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직각인가이다. 더욱이나 차갑고 날카로운 지성을 바탕으로 한 인식의 판단도 아닌 단순한 개인의 직관이라는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은, 공감과 일반화에 의한 진리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저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의 정도의 느낌일 뿐일 것이다. 항목별로 다시 생각해 볼 방향은 다음과 같다.
(가) 유형무형의 대우주는 정말 무궁한 것인가? 무궁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인가? 인생 백년을 벗어나면 무궁이라 하는가? 수운의 선천 오만 년과 후천 오만 년을 합친 1O여 만 년을 말하는가? 아니면 대우주가 생성에 필요했던 시간만큼 해체에 필요한 시간만큼을 무궁이라 하는가? 대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말한다면, 생성과 소멸은 무궁이 아니라 변전(變轉)인 것이므로 무궁이 아니다. 그리고 대우주가 무궁이던 변전이던, 내세의 유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 일반적으로 神은 全知全能하다는 것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의 권능을 말하는 것으로, 동학과 천도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약 神은 全知全能하다는 것이 동학과 천도교의 내세관과 여일(如一)하다고 한다면 동학과 천도교를 믿을 필요가 없다. ‘神의 全知全能’이라는 전제는, 세계 근현대사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류가 몸소 겪은 혹독한 수많은 전쟁에서 겪은 경험에서 이미 부정되어 오늘의 시대는 ‘神의 不在’의 시대라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믿었던 ‘神은 全知全能하다는 것’에 대하여 그들이 겪어온 역사를 통하여 참혹한 배신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백만 명을 죽인 잔혹한 전쟁은 시비를 가려주거나 생사를 결정짓는 것과 같은 신의 전지전능은 없었다. 다만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신앙자와 비신앙자들을 가리지 않고, 인간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들을 가장 참혹하게 죽이고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 전쟁이 인류에게 준 깊은 교훈이었다. 그래서 신은 죽었고 부재인 것이다.
(다) (나)에서 등장한 ‘神의 不在’의 시대에는 신의 無所不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無所不在이건 아니건 無所不在의 主體인 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 의 영혼 존재설은 (나)(다)가 부정되었으므로 영혼 존재설은 의미가 없다. 다만 개인의 영혼 존재설이나 집단 영혼 존재설에 따라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집단 영혼 존재설을 ‘한 민족이 걸어온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전수되고 있는 특유의 민족성의 존재’ 라고 해석될 수 있다면, 영혼은 존재할 수도 있고 영원할 수도 있다.
(마)의 必然으로 영혼 개체 존재를 直覺케 되는 것은 개체 영혼을 인정하는 기성종교의 특성이다. 동학과 천도교는 기성종교의 특성인 개체 영혼은 부정하고 있다. 동학과 천도교는 한 인간이 인류문화 역사에 기리 남을 개인의 品格이나 成業을 이루어 세계 인류에 존숭(尊崇)의 대상에 올랐을 때, 이를 장생불사(長生不死)라고 말하고 있다.
(바)의 결론인 ‘그러므로 인간의 來世는 있다는 것’은 위에서 (가)에서 (마)까지의 설명한 것으로 추론하면 내세의 유무와는 아무런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없다는 것이다.
(사)의 ‘靈界와 世界는 反對一致의 眞理에 神의 理念으로 연결된다는 것’ 역시 어떠한 이유이던 간에 아무런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없다는 것이다. 靈界와 世界의 연결이란 핵심 명제가 성립하려면, 영계의 의미가 天理, 天命, 天道라면 성립이 가능해질 수 있다. 아니고 영계가 개인의 영혼이 죽어서 머무는 세계라면, 靈界와 世界의 연결이란 핵심 명제는 거짓이 된다. 야뢰는 다음의 ➃ 靈界通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제로 하여, 대개 영계의 소식이 世俗 間의 무식층의 巫卜的 인물로부터 생겨 나온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식이 넓은 사람일수록 靈界의 사실에 대해서는 일종의 天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靈界의 사실은 지식이 零點에 있는 무식층의 순결無垢한 사람 중 靈媒的 素質을 구비한 사람’만이 영계통신이 될 수고 보고 있다.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지식이 넓은 사람을 버리고 지식이 零點에 있는 무식층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단지 영계를 얻기 위하여 고귀한 자산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올바른 말이 되겠는가? 靈媒的 素質을 구비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영계를 모른다고 해서 잘못된 삶을 산다는 논리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얼마든 영계의 존재유무와 관계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계를 알면 알수록 불안과 공포인한 두려움에 얽매인 삶을 살게 된다.
또 ‘神의 理念으로 연결된다는 것’에서 神의 理念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야뢰는 다음의 ➃ 靈界通信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제로 하여, 대개 영계의 소식이 世俗 間의 무식층의 巫卜的 인물로부터 생겨 나온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념이란 일반적으로 국어학적 의미는 한 시대나 사회 또는 계급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관념, 믿음, 주의(主義)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철학적 용어로서의 의미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하고, 근세의 데카르트나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내용, 곧 관념을 뜻한다.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 또는 순수 이성의 개념을 의미한다. 유의어로는 이데아(Idea), 이성 개념(理性槪念)이 있다. ‘神의 理念’을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로 해석한다면 ‘神의 實在’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비약이 심한 추론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개인의 독특한 직각에 의한 느낌이라 할 수는 있다. 만약 야뢰가 神의 理念을 신의 機能的 측면을 강조하여 全知全能을 의미하거나 신의 權能 또는 攝理를 의미한 것이라면, 至氣를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이해와 해석은 동학의 기본 교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동학과 천도교의 신앙대상인 ‘한울님’이 全知全能하고, 특유의 권능과 섭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기성종교와 다를 바가 어디에 있는가? 水雲이「論學文」에서 설법하신 말씀,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우리 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도요, 그 어디에다도 비교해 볼 수 없는 無極大道의 宗法을 가진 道이다.’ 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註 00 ; 直覺 - 보거나 듣는 즉시로 바로 깨달음. 철학분야에서의 직각의 의미는 경험이나 추리 등에 의하지 않고, 그냥 곧바로 느껴서 알게 되는 것. / 類義語는 직관(直觀)/어학사전들에서.
‘현대 중국철학의 발전과정 속에서, ‘理智’(understanding)와 ‘直覺’(intuition)에 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수명과 웅십력이 理智보다 直覺을 중시하며, 直覺을 통해 철학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역설한 반면, 풍우란은 직각은 신비한 경험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賀麟은 이처럼 상반된 입장을 지양하며 理智와 直覺의 융합을 주장하였다. 賀麟은 인간의 주체인 마음(心)을 ‘心理的 意義의 마음’과 ‘論理的 意義의 마음’으로 구분하였다. 賀麟에게 있어 論理的 意義의 마음은 理想的이고 초경험적인 정신적 원칙으로 ‘心卽理’의 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섭하고 지식을 이루며(眞), 행위를 주재하고(善), 가치를 평가(美)할 수 있는 진정한 주체를 의미한다. 賀麟이 생각했던 直覺은 論理的 意義의 마음이 대상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감상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功能을 지니고 있다. 賀麟은 理智를 중심으로 직각을 ‘先理智的 直覺’과 ‘後理智的 直覺’을 구분하였다. 이 두 직각 가운데 後理智的 直覺만이 ‘경험이며 방법’이란 진정한 直覺의 의미를 지닌다. 賀麟은 直覺의 기능과 작용을 ‘내부를 향한 성찰’을 중심으로 하는 ‘反省式 直覺’과 ‘외부를 향한 관찰과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透視式 直覺’으로 구분하였다.
賀麟은 本心의 회복을 강조하는 陸象山의 철학을 反省式 直覺으로, 讀書와 格物致知를 중시하는 朱熹의 철학을 透視式 直覺으로 說明하였다. 賀麟은 특히 朱熹의 透視式 直覺을 중시하였다. 賀麟은 일종의 體驗으로써의 朱熹의 독서법과 格物致知說은 虛心切己한 태도를 지닌 主體가 天理를 함축한 성현의 책을 통해 天理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감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賀麟은 나아가 이를 통해 眞·善·美를 체험하고 나아가 主客대립을 초월하여 主客合一·心與理一·本心回復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賀麟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손· 딜타이 등 서양 철학의 이론을 수용하여 자신의 直覺說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朱熹와 陸象山의 철학적 分岐를 융합하고 중국 철학의 현대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賀麟의 直覺說은 비록 後學들의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지녔던 문제의식과 서양 철학에 대한 수용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의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재흠. 賀麟의 直覺說硏究. 철학탐구 제38집(2016) PP.30-31.에서 발췌.
'反省式 直覺法이외에, 賀麟이 말한 透視式 直覺法은 주자의 格物致知· 독서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賀麟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자가 「大學格物補傳」에서 말했던 “힘쓰기를 오래하여 어느 날 활연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表裏·精粗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全體·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임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철학 혹은 성리학의 지식 탐구하는 직각 방법이자, 직각이 도달할 수 있는 最高·最後의 경지라고 설명하였다. 이로부터 賀麟이 생각했던 後理智的 直覺說의 중점은 확실히 透視式 直覺 즉 주자의 格物致知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賀麟은 주자의 격물설이 비록 과학적 방법은 아닐지라도 科學·理智를 위반하는 것은 아니며, 순수한 수양 방법은 아닐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宋儒들이 말했던 ‘德性之知’ 혹은 근래에 사람들이 말하는 ‘價値的 知識’ 혹은 ‘規範的 知識’(knowledge of the value or norm of things)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賀麟은 수양과 求知의 방면에서 볼 때, 주자가 내면을 향한 反省· 放心을 구함· 본심의 회복 등을 중시한 것은 육상산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본심을 회복함이 格物窮理의 공부를 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理想的인 境地로 간주하였기에, 賀麟은 본심의 회복에 관한 주자와 육상산의 견해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자는 일찍이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은 때는 반드시 몸가짐을 가다듬어 반듯하게 앉아, 천천히 보면서 나지막하게 읽으며, 마음을 비우고 깊이 몰두하여, 자신에게 절실하고 상세히 살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구절 가운데, 賀麟은 ‘마음을 비우고 깊이 몰두하여, 자신에게 절실하고 상세히 살펴야 한다’(虛心涵泳, 切己體察)는 말로 주자의 직각 방법을 개괄하였다. 마음을 비움(虛心)은 객관적이며 선입견이 없는 것이고, 자신에게 절실함(切己)은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하는 것으로 외부 사물을 자기 자신처럼 여기고 이러한 마음으로써 외부 사물을 살피는 것이다. 상세하게 살핌(體察)은 理智의 同情으로 이해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깊이 몰두함(涵泳)은 급박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으며 여유 있고 침착하게 玩味하고 觀賞한다는 뜻이다.' /연재흠. 賀麟의 直覺說硏究. 철학탐구 제38집(2016) P.44-45.에서 발췌.
註 00 ; (나) 神은 全知全能하다는 것. - 몇 년 전인 2013년 12월 05일자 매일 종교신문에 각 종교의 신의 명칭으로 인한 갈등을,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편집 기획된 기사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각 종교 신의 명칭과 유래 / ‘거룩한 신’은 육체도 이름도 초월한 존재다.
신(God)의 이름은 거룩하다. 그렇다면 그 이름은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신성한 것인가. 혹은 절대자의 고유한 명칭인가, 개인별ㆍ지역별ㆍ종교별 호칭으로 불려도 되는 것인가. 엘, 엘로힘, 야훼, 여호와, 창조주, 천주,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옥황상제, 천제, 상제…. 각 종교와 나라, 시대마다 신의 이름이 다양하게 불리는 가운데 ‘신(God)의 이름’을 놓고 종교간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신의 이름을 두고 벌어지는 종교간의 갈등 이유와 각 종교의 신의 명칭과 유래 등을 알아본다. -중략-
이렇듯 문명적 혼란과 갈등을 야기시키는 ‘하나님 이름’을 놓고 국내에서도 종교적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야훼, 즉 여호와에 대한 이름을 놓고 가톨릭에서는 하늘에서 가장 높은 분을 하느님으로 지칭하나, 개신교에서는 유일신인 하나라는 개념에 경칭인 ‘님’ 자를 붙여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애국가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하나님이 보우하사’로 부른다. 우리말 사전에 하느님은 ‘천지를 만든 창조자로서 전지전능하고 영원하며 인류와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신교에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국어학자들은 하나, 둘, 셋 하는 수사(數詞)에 존칭을 붙이면 ‘두님’ ‘세님’할 수가 없다는 용례를 들어 난색을 표한다. -중략-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유일신의 교유명사인 듯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말로 절대자, 옥황상제,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하늘 등을 나타내는 말이 '하늘님'(=하느님)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東學之人生觀 註解書 14-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