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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춘 목사
얼마 전 30대 중반 여성에 관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한쪽 다리를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지체 장애자로 아주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생활하다가 20살쯤 되어 어떤 가정에 들어가서 14년 동안 가정부처럼 일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 여자는 걸핏하면 '너 같은 병신은 어디 가서 일하고 우리 집에서처럼 지낼 수 있는 줄 아느냐?'라고 모욕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며 지내다가 최근에는 그 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갈 곳도 없고, 14년 동안 그 집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최근에 한 달에 5만원을 받으니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 집을 나오면 주인이 그 동안 수고했다고 돈을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나오려니까 그 동안 일한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오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문제는 아직 호적도 없습니다.
그 동안 호적을 만들기 위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주인은 자꾸 미루기만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는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 집의 여주인은 교회 다니는데 아마 교회서는 이 여주인은 불쌍한 장애인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잘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 자매가 그 집에서 나오게 되면 자유롭게 신앙생활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여주인은 이 자매를 아주 이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30대 중반인데도 그 동안 외부세계와 접촉이 적어서인지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짓밟히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이 자매 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다 다 몰라서 그렇지나약한 어린이들, 여성들,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자기를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고 자기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솔로몬 시대에도 학대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대하는 사람들은 힘이 있지만, 힘이 없는 약자는 강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럴 때 누가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까? 정부와 법입니다.
그런데 3:16절을 보면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가장 정의가 행해져야할 곳에 불의와 악이 있어 약자는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에겐 생존 본능이 있어 병들면 치료하고 배고프면 먹습니다. 병원에 가 보면 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생각합니까? 너무 인간적으로 모멸을 느낄 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할 때 입니다. 2절을 보면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복되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학대가 심했으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생일은 사람들에게 매우 기쁜 날인데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것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절에도 힘이 없어서 당하기만 하는 신세보다는 차라리 나지 않은 것이 더 행복하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차라리 나지 않은 것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욥3:3,11)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너무 견디기 어려운 재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갔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 10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고, 자기 육체마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렘 20:14,15)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학대와 고통을 당할 때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데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고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왜 위로자가 없습니까? 사람은 정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대부분 자기 이익 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따지면서 살기 때문에 아무도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편, 약한 자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위로자가 없도다"고 강조한 이유는 사람들이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시에 진정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17절을 보면 세상 법정에서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실 때 누가 진정 위로를 받겠습니까? 의인입니다. 불의하게 학대를 당하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5:8절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것을 다 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사람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불의를 보고만 계시는가? 왜 금방 심판하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악한 자들을 빨리 멸하시고,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빨리 건져주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인 찰스 베어드에게 하루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오셨는데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 진리로 간추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인물을 멸하시고자 하는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권세욕으로 날뛰고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랑, 자기 의지, 자기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나라가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면, 곧 망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맷돌을 아주 천천히 돌리시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잠시 세상 역사를 보면서 "공의가 없다, 공의가 사라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벌은 꽃이 만들어놓은 꿀을 탈취하지만 꿀을 빼앗아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꿀벌과 같은 강도들, 강탈자, 악인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우리는 망했다. 소망이 없다."이런 비관적인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모순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으므로 아무리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약한 자가 학대를 당하는 불의한 세상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편견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자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편에 서 계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10:18절에 "고아와 과부를 변호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또 시68:5절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 편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들을 변호하시고 위하시고, 그들을 무시하고 압제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또 특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진정한 위로자를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눅2:25에 보면 예루살렘에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압제 당하는 자, 병든 자, 실패한 자, 실직한 자, 소외된 자, 장애인들,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까이 하셔서 위로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성령님도 위로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옆에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가지신 분이었기에 눈에 보이도록 함께 하셨는데,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를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이 보혜사를 어떤 영어 성경은 '위로자'(Comforter)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위로하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그 예로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고 심한 고생을 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그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아 기회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누가 위로해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렇게 위로를 받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나도 다른 사람이 외롭고 힘들 때 위로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실로 우리 주변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몰라서 멸시받으며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외로운 사람, 연로한 사람, 실직한 사람, 실패한 사람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어떻게 위로할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때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부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립 운동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가 감옥 마룻바닥의 골과 골 사이에 종이가 돌돌 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호기심에 종이를 끄집어내 펴보았더니 마5:38-40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월남 선생은 이 글을 보고 픽 웃고는 말도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 돌돌 말아서 그 자리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음 날 이상하게 그 종이를 또 한 번 보고 싶어 다시 그 종이를 꺼내서 읽고는 속으로 '이게 말이 되나!' 하면서 다시 돌돌 말아서 집어넣고, 다음 날도 또 끄집어내서 읽으면서 '이걸 누가 실천해?' 하면서 또 돌돌 말아 집어넣고, 며칠 동안 반복하다가 그 말씀으로 인해 감동을 받아 나중에는 "나는 그 쪽지에, 그 말씀에 사로잡혔노라.!"고 고백까지 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그 한 말씀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삶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학대받고 멸시받으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삶이 새롭게 됩니다. 시119:50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눔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그 자매가 막상 주인집을 나와도 어디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안 어떤 여성도가 그 자매에게, 다른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자매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며칠 전 신문에 미국의 어떤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수단에서 노예로 지내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리고 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50불이면 노예로 지내는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이 저금통을 털고 용돈을 모아서 거금 3만 5,000불을 만들었는데 이 돈이면 아프리카 수단의 노예 600명 이상을 해방시킬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참 많습니다.
조그마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가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저희들에게 큰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때 기도해 주신 것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병들어 있을 때, 실패했을 때,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찾아가서 조금 같이 있어준 것, 엽서에 위로의 말 한마디 적어서 보내준 것, 전화해 준 것, 기도해 준 것... 이런 것들로 인해 위로를 받고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누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병든 자를 간호하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나누어 준 것은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0)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한 것은 곧 참된 위로자이신 주님께 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위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느 해보다도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위로하는 사람들은 적을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자가 없는 때, 위로자가 적은 때에 우리가 위로자가 됩시다. 모두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때에 하나님의 위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도 위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주변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이 담긴 카드를 보내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위로가 담긴 빵이라도 같이 나눈다면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