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신부님강론
연중 제11 주일 240616 9시 미사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별일 없으셨죠?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주간 어떻게 맺고 지내셨습니까? 모든 순간순간들이 이게 하나님 뜻인가 그게 하나님 뜻인가 고민하고 지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겨버린 건 아닌지 좀 다시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 그럴 것이라는 정도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십니까라고 했을 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비하신 분이시다라고 우리는 고백하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느끼면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고 우리가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규정화시켜서 정해지는 순간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말, 단어에 갇혀버리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자유로움을 보고 나면 그 하나님의 다양성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이런 분이시구나 각자 체험을 통해서 함께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백들이 모여서 우리가 함께 이 공동체를 이루는 순간에는 우리에게는 지금 누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고백하는 사람들, 하느님은 정이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느님은 자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찬미할 때 하느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 맨 마지막에 좀 서운하시죠. 요즘 늘 서운하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복받았어요. 이 어려운 말씀을 따로 풀기까지 해주시니까 왜 저한테는 안 해주셨을까요? 아무튼 저희는 공부해서 배워야 되는 거잖아요. 저희 그렇죠 우리도 공부하고 찾고 계속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으니 늘 감사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제자들 그래서 또 부럽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그 첫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시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모른다.'가 핵심입니다. 결국에는 모르지만 결국 수확 때가 되면 우리는 그 현상을 보고 이제 수확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배워서 수확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보고 어느 순간에는 수확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알아보고 수확을 해서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와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죠!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명확히 모르지만 매 순간 체험되는 어떤 삶들 속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도 하고 이런 분이시기도 하구나라고 체험되는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일들에 조금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그냥 무신경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보면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니실까 하느님은 이런 분이신가라고 스스로 고민하면서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시인 그 시인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학생 때 교수님이 추천해 준 그 시집에 하늘나라에 비유하는 시집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가장 감동이 깊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걸어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버스 기사와 같다.'입니다. 무슨 느낌인지 느낌 오십니까? 힘겹게 목발을 짚고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버스 기사와 같다. 버스 기사는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타러 오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을 기다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버스에 승객들은 빨리 출발하세요라고 화내지 않고 그 목발 짚은 사람이 조심히 와서 버스에 올라타기를 함께 기도해 주십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거죠, 아니십니까? 진짜 우리 성당에 목발 짚는 분을 안 기다리는 분 없겠죠?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 비유가 이상해지는 겁니다. 그 목발을 짚고 온 사람을 보면서 기다려주는 기사를 고맙게 우리는 여길 수밖에 없고 오히려 우리가 고맙게 느껴지게 되고, 또 그 목발을 짚고 오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버스에 탑승하기를 우리는 또 함께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결국 한 사람의 좋은 마음 기다림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무엇이 되었습니까? 기쁨이면서 희망이 되고 여러 가지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가는 것, 또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또 한 사람의 마음이 전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비유가 겨자 씨의 비유인 것입니다.
한 사람은 되게 작아 보이지만 한 사람이 고백하는 그 신앙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기쁨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 기쁨을 전하면서 끊임없이 전파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사랑의 속성하고 같습니다. 사랑의 속성 기쁨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생명을 낳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쁨도 마찬가지로 내가 하느님을 섬기는데 기뻐하는 것을 자랑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기쁨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면서 또 기쁨 또한 마찬가지로 확장성을 지닌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 나라의 비유는 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명확하게 하느님을 이렇다 저렇다 규정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깨닫게 되고, 어떤 현상들 앞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면 그 안에서도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 겨자 씨의 비유는 한 사람, 내가 그렇게 누리는 기쁨이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 바로 이 신앙의 기쁨이고 또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걸어 다니면서 또 마주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자연 현상들, 환경들, 또 사람들 속에 하느님을 찾도록 노력하시기 바라고 또 내 기쁨을 또 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해주고자 노력하면서 이 신앙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