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사[ 兩賢祠 ]
분야 종교/유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삼태리 21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출처 디지털천안문화대전-양현사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당.
개설
양현사(兩賢祠)는 고려 후기의 문신인 문효공 전신(全信)주1)[1276~1339]과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천안 전씨 전득중(全得中)의 사위인 이협(李筴)주2)[1583~1665]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위치
천안시 풍세면 용정 초등학교에서 아산 방향으로 약 4㎞ 거리의 금호 1길로 들어가면, 삼태리의 앵봉 동쪽 사면에 양현사와 천안 전씨 시조 단소 및 재실이 있다.
변천
양현사에 대한 기록은 1852년(철종 3)에 간행된 『영성지(寧城誌)』의 사묘조와 『충청도 읍지』에 나타난다. 『영성지』에는 “원서면(遠西面) 검벌리[檢閱里]에 있으며, 읍(邑)으로부터의 거리가 20리[7.854㎞]이다. 순조 병술에 처음 세웠다. 정당(正堂), 강당(講堂)이 있으며 향촉(香燭)과 제수(祭需)는 관에서 봉진하였으며, 원생(院生) 7명과 원보(院保) 7명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 읍지』에는 ‘검계리(儉溪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검벌리나 검계리 모두 현재의 삼태리를 가리킨다. 이곳은 백헌 전신이 만년에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고 남악 이협이 은거하여 의를 행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천안 전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영조 병술년인 1766년(영조 42)에 진사 채홍신과 진사 전시덕(全始德)주3)[1816~?]이 주동이 되어 검계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07년[정묘년](순조 7)에 사림의 공의로 진사 채홍신(蔡弘臣)이 대표가 되어 고을의 선비 76명의 연명 상서로 백헌 전신과 남악 이협을 본 서원에 배향할 것을 예조에 품하였고, 예조로부터 이를 허락하는 문서가 내려오자 채홍신, 전사성(全泗性)주4)이 주선을 하여 배향하고 축문은 송강재(宋剛齋)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1829년에 서원의 중수가 이루어졌다.중수기(重修記)는 전사성이 썼다.
현재 양현사에 병술년 9월의 ‘검계 서사(儉溪書社)’와 기해년의 ‘검계 서원(儉溪書院)’ 현판이 보관되어 있어 처음에는 ‘검계 서사’라고 불리다가 다시 ‘검계 서원’으로 바뀌었고, 언제부터인가 ‘양현사’로 불린 것으로 추측된다.
양현사라는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860년에 관에서 발급한 「양현사 원생안(兩賢祠院生案)」이라는 완문을 통해서이다. 완문의 내용은 천안군에서 양현사에 원생 5명과 원노 5명을 제급해 주는 것이다. 원생과 원노의 액수가 『영성지』에서는 모두 7명으로 증가되어 있다.
양현사는 1871년(고종 10) 대원군의 서원 정리 실시로 훼철되었다. 그 후 1897년 후손 전달복(全達復)이 주동이 되어 검계 서사가 있던 터의 뒤에 단소를 설치하고 비를 세웠으며, 나아가 서사(書社)를 건립하였다. 또한 간재 전우가 1901년에 「검계 서사기」를 지었다. 철거된 검계 서원의 기와는 같은 곳에 소재한 천안 전씨의 재실 보수에 쓰였고 재목은 일설에 의하면 천안 남산에 있는 용주정 건립 당시 사용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문중에서는 1982년에 양현사를 중수하였고, 그 후 수차례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형태
양현사는 천안 전씨 시조 단소 및 재실 등이 자리한 언덕 아래에 위치하며 충훈사(忠勳祠)와 거의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정면과 좌우를 담으로 둘렀으나 양쪽 사우의 사이에는 담이 없고 각각의 사우로 통하는 삼문은 설치되어 있다.
양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충훈사와 같은 형식이다.
현황
양현사의 뒤쪽에는 천안 전씨의 시조묘가 있고, 그 앞으로 좌우에 전신의 부친인 전승(全昇)주5)의 단소(壇所)와, 전신의 단소가 있으며 그 옆으로 설단비(設壇碑)가 서 있다. 단소 아래는 전씨 시조 사당인 충훈사와 양현사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으며, 각각의 사우 앞에는 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양현사의 삼문 담장 밖으로 전씨의 재실이 마련되어 있고 외삼문 앞에는 천안 전씨 시조와 전신 부자의 신도비가 서 있다.
의의와 평가
양현사는 천안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 성씨인 천안 전씨의 입향과 세거 및 사족 활동을 보여 주는 문화재이다. 특히 조선 후기의 문중 서원의 건립과 운영을 보여 주고 있으며, 문중에서 건립한 서사(書社)의 변천에 대해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영성지(寧城誌)』
『충청도 읍지』-천안군
『충남의 서원·사우』(충청남도, 1999)
『천안의 향교와 서원·사우』(천안 문화원, 2001)
『공주 화은리의 천안 전씨』(공주 문화원, 2011)
[네이버 지식백과] 양현사 [兩賢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1)전신[ 全信 ]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충렬왕·충숙왕·충혜왕의 3대의 왕을 섬기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청렴하여 가난을 면치 못했으나 학문을 즐겨 당대의 성리학자들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신 [全信] (두산백과)
주2)이협[ 李莢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지역에 우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자용(子用), 호는 남악(南嶽)이다. 부인은 전득중(全得中)의 딸인 천안 전씨(天安全氏)이다.
활동 사항
이협(李筴)[1583~1665]은 진사로 등과하여 영릉 참봉을 지냈다. 광해군 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안곡(安谷) 이중명(李重明)이 만사(輓詞)에서 “소나무 잣나무처럼 눈 속에서도 푸르다[大冬松柏雪中靑].”라고 하며 이협의 절개를 칭송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협 [李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3)조선시대 진사시(進士試) 합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