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8장 1-6절
설교제목 : 땅으로 쏟아지는 불
두 송이 꽃을 든 자화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갑작스런 온도 상승으로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주에 한 장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독일 화가 파울라 모데르존베커가 그린 ‘왼손에 두 송이 꽃을 든 자화상’(1907)입니다.
모데르존베커는 자화상을 많이 남겼던 화가였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1906년에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이는 미술사 최초로 여성이 그린 누드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대에 개인교습을 통해 화가가 되었고, 브레멘 근교의 미술 공동체 마을에서 활동했습니다. 화가 오토 모데르존을 이곳에서 만나 결혼했지만, 창작에 열중하기 위해 홀로 파리로 떠났다가 가난으로 다시 남편 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임신을 하였는데,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는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을 때였습니다. 젊은 여자가 한 손에 꽃을 들고 다른 한 손은 튀어나온 배 위에 얹고 있습니다. 임산부로 보입니다. 당차면서도 강렬한 눈빛을 띠고 있습니다. 동시대 활동하던 피카소나 마티스가 그린 남성의 시선에 맞춘 관능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으로의 자신감과 강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해에 딸을 출산했지만, 출산 합병증으로 19일 만에 사망합니다. 향년 31세의 나이였습니다.[동아일보, 2024년 3월 13일자, 가장 슬픈 자화상[이은화의 미술시간]에서]
그림의 여성은 두꺼운 눈꺼풀과 진한 분홍빛 얼굴을 하고 입술은 붉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지적 여성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두 개의 꽃은 삶의 절정의 국면에서 에로스 원리가 분화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복부에 손을 올린 것은 태중의 아이와의 연대를 가리키는 듯 보입니다. 새로운 미래와 잠재력을 품은 여인에게 당당함과 여성적인 강인함을 읽게 됩니다. 정신 속에 미래와 잠재력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키워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자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차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고단한 삶 속에서도 즐겁게 노래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자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땅의 미래의 주인공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어른들은 더욱 힘써야 합니다. 다른 구도에서 미래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품은 자는 자신의 길 위에서 조금은 희망차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자가 받는 은혜
요한은 셀 수 없는 많은 무리 중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환상 중에 봅니다. 한 장로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요한은 “장로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천상의 장로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이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며,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로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다” 화답했습니다. 꿈이나 환상 중에 누군가에 던지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아의식으로 하여금 의식화와 각성을 촉발시키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 던져진 천상의 존재로부터의 질문은 고통과 환난을 겪어낸 자만 새로운 변환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운 존재의 정체성을 부여받을 수 있음을 너무나 분명하게 일러줍니다.
그리고 이러서 천상의 장로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이 받는 은혜를 설명합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7:15). 그리고 7장 16-1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하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고통없이 새로운 변환과 새로운 인격의 발전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흰 옷을 입고 변환된 자는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고,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시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장막이 되시니 강렬한 해가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서러움과 억울함의 눈물을 더 이상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 먼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존재의 성숙과 변환을 경험한 자, 흰옷을 입은 자는 그분 안에서 목마름이 채워질 것입니다. 그분이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무엇을 마셔도 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쳐서 그 누추함을 가리려고 하지만 이내 그 옷에 싫증 내며 또 다른 옷을 걸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정신적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무방비상태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대중적 미디어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눈과 귀를 잠식하고, 인터넷 게임과 동영상은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우리 시대는 어떤 방비책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가림막도 없는 상태입니다. 종교의 기능은 모든 정신적 위협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물질적으로 해갈되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채우는 일입니다.
한 내담자가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신발을 사고 싶고, 옷을 사고 싶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으로 계속 물건을 구매하였습니다. 이는 일종은 조증 삽화의 일례입니다. 아무리 백 개의 신발을 사서 신어도 결코 만족스럽지 않고, 또 구매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페르조나, 인간으로서 정신적 의복을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나의 현실을 살아갈 확고한 입장을 취하려는 무의식의 의도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변환된 의식을 가지고 내 안의 전체정신인 주님과 연결된 자만이 길을 잃지 않고, 생명의 샘물을 공급받으며 목마르지 않고, 정신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금향로에 담긴 기도
어린 양이 일곱째 인을 뗄 때에, 하늘은 약 반 시간 동안 고요했습니다(8:1). 반 시간은 실제 30분이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짧은 시간의 범위를 가리킵니다. 심판이 잠시 동안 유예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요했다는 것은 일종의 심판 직전의 긴장감, 일종의 태풍 전야와 같은 무정동 상태입니다. 어떤 큰 사건이 발발하기 전에 일종의 진공상태처럼 고요하고 정막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일곱 천사를 보았는데, 그들이 나팔을 하나씩 받아 들고 있습니다(8:2). 두 번째 심판의 형태인 일곱 나팔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금향로를 들고 제단에 섰습니다. 그 천사는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고,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 향기가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8:3-4). 여기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천사의 손에 들려진 금향로입니다. 이 금향로는 구약성서에서 성막의 가장 핵심인 성소에 있는 기명으로, 지성소 앞에 휘장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주요 임무는 그 향로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향로의 불이 탐으로써 끊임없이 성소에서 연기가 올라가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신의 현존의 증표로서 제단의 불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금향로에서는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불과 연기가 타올라야 합니다. 이런 금향로는 일종의 여성적 용기로서 내면의 여성적 원리로도 볼 수 있고, 교회의 형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내면의 성소의 금향로에서 리비도가 꺼지지 않아야 하고, 일종의 연기로 대변되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금향로의 연기가 타오르는 자는 신성함과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금향로는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 앞에 올라갑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도와 천사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형국입니다. 초개인적 영의 도움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아의식의 관여하고 천사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향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겸손함으로 내향적이고 종교적인 태도로 기도하며 향을 올릴 때는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방향이 이루어지면 큰 재앙이 뒤따릅니다.
땅으로 쏟아지는 불
요한은 이어지는 환상에서 그 뒤에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향로에 제단의 불을 가득 채워서 땅에 던지니,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5). 여기에서 불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반대로 땅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하늘에 있는 제단의 불은 ‘초개인적인 리비도’라 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식의 한계치를 넘어서는 활성화된 강력한 신성력 있는 리비도가 의식으로 침투할 때 의식은 압도적인 위력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천둥과 번개, 지진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꿈 속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땅으로 쏟아지는 불의 이미지는 에스겔 10장 2절에서 모시옷을 입은 사람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룹들 밑에 있는 저 바퀴들 사이로 들어가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쥐어서, 이 성읍 위에 뿌려라.” 하늘의 불이 땅으로 쏟아지는 심판의 불의 형상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힘겨운 싸움을 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단 주위에 물을 말렸습니다. 이런 초개인적 정동은 이중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으로부터도 분출합니다.
정서적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으로부터 분출하면 심리적으로 정신병적 위기의 순간입니다.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동적 불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낡은 기존의 체계를 파괴하여 새로운 정신 발전을 추동할 수 있습니다. 개성화 과정의 드라마틱한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의 심판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갑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와 땅으로부터 분출하는 불로 번개와 지진이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의 낡은 토대를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시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