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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이
“정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가 옆 세워진 농가를 뒤로 하고 남자 둘이 걸어나오며 소리쳤다. 농가 옆에는 지붕이 불에 타 무너진 창고가 가까스로 농가에 기대 서 있었다.
“뭐야?”
군복을 입은 군인이 둘이었다. 구겨진 목깃을 어루만지고 바지춤을을 추켜올리며 짐짓 엄격하게 보이려는 듯 했지만, 떡져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제멋대로 구겨진 군복, 그리고 술에라도 취한 듯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오히려 행색을 더 초라하게 했다. 곁에 서면 땀내와 술냄새가 하나 가득 묻어날 것 같은 몰골이었다.
‘죽음에 찌든 냄새’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군인들에게 말했다.
“순례자입니다.”
여자의 말에 군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새에 짐을 지우고, 자신까지 한 짐을 진 여자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로크랜드의 전장 근처를 여행하는 인간들에는 세 부류가 있다. 군대를 따라다니는 행상, 창녀, 그리고 순례자.
“순례자?”
군인들은 반문하며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여자의 하얀 목에 닿았다.
“짐 내려놔 봐!”
여자는 군인들의 말에 자신의 등짐을 내리고는, 노새로 다가 그 위에 올려놓았던 짐도 순순히 내려놓았다. 짐을 다 내려놓자 군인들은 여자를 밀쳐내고는 다짜고짜 내용물을 살폈다. 물, 간단한 식량, 취사도구, 천막. 여자의 짐 내용물이 제 멋대로 이리저리 땅바닥을 뒹굴었다.
여자의 등짐을 뒤진 그들은 노새 옆에 내려놓은 커다란 짐들로 발걸음을 돌려 그것들을 살폈다. 이번엔 조금 아까와는 달랐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상자들, 이상한 언어로 씌여진 수첩, 그리고 수북한 지도. 분명 행상의 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창녀라 하기엔 여자는 군인들에게 너무 딱딱했다. 그들은 서로간의 눈짓을 통해 여자가 행상도, 창녀도 아니라는 데에 의견일치를 봤다.
“순례자?!”
군인 중 한 명이 여자의 멱살을 잡고는 짐짓 화난 듯 소리쳤다.
“내가 바보로 보이냐?”
“순...례자, 맞...맞습니다.”
목줄린 채 여자가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군인마저도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바투 당기고는, 여자의 목 옆을 툭툭 치면서 비아냥거렸다.
“하? 순례자? 웃지지 마. 네년이 ‘짐승’이라는 증거가 네 목에 있는데 어디서 대놓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지껄여? 뭐하다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자 행색만 하면 다 순례자인줄 알아? 응? 너 어디서 뭐하던 거야? 말해!”
여자는 목과 머리채를 잡혀 몸을 버둥거리는 가운데서도 가까스로 품을 뒤져 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군인에게 내밀었다. 머리채를 잡고 있던 군인이 종이뭉치를 잡아채 기름먹인 겉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메달을 꺼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메달에는 기다란 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최고재판소의 문장이 함께 각인되어 있었다. 뒤를 돌려보니 작지만 보석도 하나 박혀 있는 게 결코 평범한 메달은 아니었다.
군인은 여자의 목을 잡고 있던 군인에게 다가가 재빨리 눈짓했다. 순례자의 증표는 진짜가 맞는 듯 하니 일단은 놓아주는 게 좋겠다는 신호였다. 멱살을 잡고 있던 군인이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여자는 메달을 받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구겨진 목깃을 메만지면서 군인들을 쏘아보았다.
“제가 당신들이 말하는 소위 그 ‘짐승’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순례자’이기도 합니다. 순례자의 서약은 ‘인간’이든 ‘아인’이든 부름만 받으면 가능하다는 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저희들은 ‘조약’에 따라 최고재판소의 지휘만 받습니다. 아무리 영주들의 군대라 하더라도 순례자들을 해할 권한은 없습니다. 더 이상 무례하게 행동하면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여자의 당당한 말에 군인들은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순례자가 되는 데는 ‘인간’인지 아닌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인’인 순례자는 처음 보기는 했지만 눈앞의 여자가 진짜 순례자라고 한다면 ‘아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최소한 ‘조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랬다.
몇 달 전이었다면 이 쯤에서 그냥 여자를 보내줬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군인들은 답답했다. 탈영병 사냥, 가끔 지나가는 행상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것. 살기 위해 전장을 찾는, 또는 전장의 남자들에게 지쳐 떠나가는 창녀들을 데리고 노는 것도 이제 지쳤다. 이번 데이터 저장소를 둘러싼 전쟁은 생각보다 너무 늘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숨막힘을 달래기 위해 잠깐 무리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더군다나 여자가 ‘아인’ 출신이라는 점이 그들의 경각심을 상당히 무디게 해 주었다. 서로 잠시 귀엣말을 한 후, 그 중 한 남자가 부쩍 얼굴을 풀고는 여자에게 말했다.
“아, 미안해. 미안해. 사과하지. 요즘 별의별 놈들이 다 지나가서 말이야. 순례자로 가장해서 첩자 짓을 하는 것들이나 탈영한 병사들이 좀 많아야지. 우리가 요즘 좀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어서…...아무튼 미안해. 그런데 보아하니 순례자 중에서도 상당히 높으신 분 같은데 무슨 이유로 전투가 한창인 저 앞으로 가시려고 하시나?”
“순례자가 전장을 다니는 데 꼭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서 보내주시지요.”
군인들은 여자의 뾰족한 쏘아붙임에도 앞을 막아선 몸을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슬그머니 손에 든 총을 어루만지며 빙글거릴 뿐이었다.
‘젠장,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더 힘들어지는데…...’
여자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 아픈 일은 이미 안고 있는 것들로도 충분했다. 그저 어서 이번 ‘순례행’을 끝내고픈 마음 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새로운 문제를 만들지 않고서.
군인들은 여자의 고민 섞인 얼굴에 아까보다도 더 힘을 얻은듯 건들거리며 말했다.
“아…...좋아. 좋아…...순례자 분, 그것도 ‘아인’ 출신이라는 특별하신 순례자 분이 이런 시시한 전장을 전전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으신 거겠지. 우리같은 것들에게 알려줄 만한 사항이 아닌 것도 잘 알겠어. 물론 우린 ‘조약’에 따라 순례자분들의 자유를 보장해 줘야 해. 그리고,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안전을 지켜 줄 의무도 있지.”
느물거리는 병사의 미소가 여자의 몸을 노골적으로 주욱 훑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저 앞에는 데이터 저장소가 있는데…...그리고 그걸 두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사람과 짐승들이 죽는 전쟁 말이야. 총알은 조약을 몰라. 포탄도 마찬가지지…... 아쉽지만 고귀한 순례자분의 ‘안전’을 위해서는 잠시 여기 있어주셔야 할 것 같아. 아 화내진 마셨으면 해. 이건 조약 위반이 아니라구. 이해할 수 있겠지?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야. 안 그래?”
군인들의 웃는 얼굴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여기서 몸을 쓰면 더 안좋아져. 그러니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하지 말자.’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가려구?”
여자가 속옷을 챙겨입자 한 명이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리며 물었다.
“......”
“보내긴 조금 아쉬운데 말이야……”
옆에서 다른 한 명도 거들었다.
작은 방에서 일을 끝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는 대꾸하지 않고 남자들에게서 돌아선 자세로 묵묵히 속옷 옆 단추를 채웠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들과는 처음부터 엮여서는 안 되었다. 이 쯤에서 문제 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여자는 묵묵히 속옷의 남은 단추들을 마저 채웠다.
그런 여자의 침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군인 중 한 명이 손에 총을 들고 일어섰다.
“이봐…...그렇게 뚱하게 있지 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같이 있으면서 이야기나 좀 하자구……”
그제야 여자는 몸을 돌린 자세 그대로 조용히 대답했다.
“약속했지 않나요? 끝나면 보내주겠다고.”
“그래…...우린 약속은 지켜. ‘순례자’와 약속은 말이야……”
일어선 군인이 여자 옆으로 걸어와 서서 총을 들어 머리를 겨누었다.
“하지만 짐승과는 약속을 못하는 법이지. 그리고 넌 ‘짐승’이고. 좋은말 할 때 자리에 앉아. 그래…...옳지…...앉아. 좋아. 좋아…...이제 우리 같이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자구……”
“내가 보여준 순례자의 증표를 잊었나요? 이 정도에서 서로 끝내는 게 좋을 텐데요.”
여자의 말에 군인들은 히히덕거리며 웃었다.
“증표? 그래. 그건 순례자의 증표가 맞을거야. 그런데 아쉽지만 증표는 말을 못하거든. 그러니 네 말을 믿을 만한 증거는 네 입밖에 없는데, 미안하게도 우린 아직 잘 모르겠어. 조금 더 같이 있어봐야 네가 정말로 순례자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좀 더 있으나 마나 상관 없는 거 아니야?”
‘너희들하고 좀 더 자 주는 게 빨리 끝나서 내 ‘순례행’을 끝내는 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얼마나? 내가 저 밖 창고에 널부러진 시체들이 되면 알게 되는 건가?”
마음 속으로는 타협안이 나올 듯도 했지만 실제로 나온 대답은 달랐다. 여자는 군인들의 ‘짐승’ 운운하는 도발에 상당히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남자들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 명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최소한 눈썰미가 좋다는 건 인정해야겠네. 오해 하지마. 탈영한 ‘병사’ 몇 마리가 있어서 그것들을 즉결처형 한 것 뿐이야. 짐승들 좀 죽인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럼 그 ‘짐승’이자 ‘순례자’인 난 어떻게 되는 거고?”
여자가 기분나쁜 듯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킬킬거리며 끼어들었다.
“네가 ‘짐승’인지 ‘순례자’인지는 네 몸으로 증명하면 돼. 꽤 잘 하는 것 같으니 가능성이 높아,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여자가 이를 갈았다.
“너희들, 선을 넘었어. 최고재판소가 정식으로 이 일을 문제삼을 거야.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날 보내주면 선처를 부탁해 보지.”
여자로서는 군인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한 말이었지만, 마지막 말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해보자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 말이 군인들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올 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여자의 말에 군인들은 마치 받고 싶은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활짝 웃었다. ‘그래 이 여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위협 말고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고 싶없을지도 몰랐다.
군인들의 웃음을 보면서 여자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몸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런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군인 한 명이 여자의 뒤로 돌았다. 그리고는 총구를 여자의 목에 갖다댔다. 여자가 인간이 아닌 ‘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목의 돌기였다. 목의 차가운 감촉과 더불어 술냄새에 깊이 절은 입이 여자의 귓가를 더듬었다.
“최고재판소는 어디 있지? 저 벽에? 이 바닥에? 아니면 저 문 밖에? 미안하지만 여기엔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해 봐. 그러면 이따가 네가 살았든 죽었든 이 돌기를 네 목에서 떼내 줄게. 네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식간이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는 남자의 팔뚝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남자의 손목을 잡고 힘껏 비틀었다. -우둑- 뼈가 비틀리면서 부러지는 날카롭고도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놀라서 총을 여자에게 겨눴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여자가 쓰러진 군인 옆에 떨어진 총을 주워 그를 향해 던진 게 더 빨랐던 것이다.
-퍽- 총을 쏘려던 남자는 얼굴을 맞고는 그 충격으로 몸이 벽까지 밀려나가 부딪혔다. 목부터 벽에 부딪힌 남자는 머리가 앞쪽으로 크게 꺾인 이상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은 마치 커다란 몽둥이가 정통으로 때린 것처럼 으깨져 있었다.
“......으으으”
팔목 중간이 비틀려 잡아뜯겨진 군인은 쓰러진 채 고통에 신음하면서 팔을 붙잡고 있었다. 끊긴혈관에서 피가 솟구치고, 부러져나간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여자는 너덜너덜해진 팔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발로 남자의 몸을 뒤척여서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남자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말 그럴까?”
“......으…...?”
여자는 신음하는 남자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한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정말 ‘인간’이라고 생각해?”
여자는 벗어 놓은 자신의 윗옷을 당겨와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검정색의 작은 막대 같은 것이었다. 그 막대를 남자의 귀에 살며시 밀어넣었다. 남자는 고통 속에서도 귓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오자 눈을 희번뜩이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이내 남자의 몸이 굳어지면서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방 안을 두들겨댔다.
“증명해 봐.”
여자는 일어서서 겉옷을 집어입으면서 냉정하게 덧붙였다.
“네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네 스스로 증명해 봐. 그 막대를 네 몸에 넣고 죽지 않기를 기도해 봐.”
신음소리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쓰러진 남자는 귀 안쪽에서 파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가운데, 관자놀이의 힘줄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경련과 고통 속에 몸을 떨다가 잠시 후 조용해졌다. 여자는 옷을 다 입고 매무세를 정리한 다음 남자에게로 다가와 귓속에 박힌 막대를 꺼냈다. 막대 중간에 파란 램프불이 잠시 반짝였다.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피가 몸 주위로 번지면서 서서히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여자는 잠시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나가면서 문가에 죽어 있는 또 다른 군인의 시체를 흘낏 쳐다보았다. 총 손잡이에 맞아 내려낮은 얼굴이 피와 뇌수와 함께 뒤섞여 기괴한 모습을 자아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야.”
여자는 파란 불빛이 사그러들고 있는 막대를 주머니 속에 넣으며, 다시 선고하듯 내뱉었다.
“…... 나도…...너희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하늘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 쓰레기같은 지옥구덩이에서 불탈 운명을 타고난 ‘짐승’들에 불과해.”
문을 여는 여자의 뒷모습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쓰러진 자들은 답이 없었다.
-텅-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문 밖에서 여자를 반겨 맞았다.
‘젠장. 또 있었던 건가?’
여자는 속으로 투덜대며 잽싸게 문을 발로 찼다. -쾅- 문이 박살나면서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여자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가 문 밖에 있을 세번째 군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세번째 군인은 여자의 몸을 받아내기엔 조금 작았다.
‘어?’
“으아~!”
가까스로 몸을 빗겨돌려 멈춰 선 여자 옆에는 눈을 꼭 감은 조그마한 체구의 세 번째 군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어깨를 웅크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였다. 아이 옆에는 무거운 통이 놓여있었다. 아까 떨어지던 소리는 통을 내려놓던 소리였던 것 같았다.
“......너 뭐냐?”
얼뜻 보기에도 ‘세번째 군인’이라고 칭하기엔 조금 어려운 상대에게 여자가 물었다. 아이는 눈을 꽉 감고는 온몸에 있는 힘을 다 주고 있다가 여자가 세 번째로 정체를 물었을 때에야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도로 정신을 차렸다.
“...‘숨’ 인데요…... 아줌마 누구세요?”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데?”
“...심부름 다녀왔는데…...갑자기……”
“심부름?”
여자의 물음에 아이는 여자의 어깨 너머로 농가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자가 눈살을 찌뿌리며 다시 물었다.
“저기 있던 군인 두 명 심부름이냐?”
끄덕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 군인들 떠났다. 저 안에는 없어. 그러니 들어가지 마라.”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아니. 몰라. 그냥 떠났어.”
아이는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농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가지 마.”
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자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석양 즈음의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여자는 농가 옆 조금 떨어진 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데리고 길을 가기엔 날도 저문 데다, 농가 근처 빼고는 비가 내린 탓에 마른 나뭇가지를 찾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시체 따윈 상관하지 않았고, 아이는 군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묵묵히 여자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럼 ‘숨’ 너는 그 아저씨들하고 꽤 오래 다녔겠구나.”
“저를 키워주셨던 행상 분들이 아저씨들한테 절 부탁한 게 반년 정도 전이었어요. 그 때부터 아저씨들 잔심부름도 하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아…...여기는 물이 별로 없어서 빨래는 잘 못했어요. 열흘에 한번씩 다른 아저씨들이 오는데, 그 때 빨래거리를 주고 받아요. 어제가 오는 날인데…...사실 다른 아저씨들이 오는 그날하고 그 다음날이 제일 안좋아요. 다른 아저씨들이 오기로 하는 날 아침이면 ‘파’ 아저씨하고 ‘훔’ 아저씨가 매번 말다툼을 했어요. 뭐라고 소리치며 싸우는데 전 잘 모르겠지만 자꾸 도망치자고 하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도 점심 때 다른 아저씨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언제나 화해를 하시고 저한테 돈을 주세요. 멀리 마을에 가서 활탄액을 한통 사오라고 하면서, 꼭 하루는 마을에서 자고 오라고 하는 것도 언제나 똑같구요. 그래서 어제는 마을에서 자고 오늘 다시 돌아왔어요…...”
“아저씨들은 떠나셨어.”
“......네.”
아이는 시무룩하게 대답하고는 모닥불 불빛을 이마로 받으며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밤에는 아저씨들을 누가 돌봐줄까요…...”
“돌봐준다니?”
여자의 물음에 아이가 사뭇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을에서 돌아온 날 밤이면 아저씨들은 잠잘 때 엉엉 울어요. 온몸이 너무 뜨겁도록 몸부림칠 때도 많아요. 너무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아무리 깨워보려고 해도 깨지 못하고 소리만 질러요. 오늘 밤도 잠들어선 그렇게 괴로워할텐데 저라도 돌봐주면 좋겠지만 누가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아이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모닥불 속에서 끓고 있는 죽을 휘휘 저어 뜨고는 그릇에 담아 아이에게 주면서 말했다.
“아저씨들은 아직 목적지까지 다 못 갔을 거다. 오늘밤은 아마 밤새 걷느라 잠은 못 잘 거야. 그러니 오늘은 걱정 안해도 된단다. 얘야.”
아이는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죽을 입 안으로 떠 넣었다. 여자도 죽을 떠 같은 모양으로 한 숟갈 입 안에 넣었다. 뜨거움보다 쓴 맛이 먼저 올라왔다.
아이가 천막 안에서 잠든 후 여자는 천막에서 나와 밖에 섰다. 저녁나절부터 내린 비는 그치고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을 가로질러 우유빛 별빛의 강이 머리 위에 가로걸려 있었다. 그 뿌연 강을 죽 따라간 저편 끝자락 밑에, 낮의 농가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농가 쪽으로 발을 옮겼다.
농가는 여자가 문을 박차고 나온 그대로였다.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피 냄새가 배어나오는 듯 했다. 여자는 발을 돌려 농가 옆 무너져가는 창고 쪽으로 가 보았다. 낮에 군인들과 들어가면서 무너진 벽 사이로 얼핏 보았던 대로, 몇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어제 아니면 오늘 아침 정도에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보였다. 시체들 곁으로 다가가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니 목 옆의 작은 돌기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와 같은 ‘아인’들. 로크랜드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짐승으로 취급받으며 사는 존재들이었다.
여자는 죽은 시체들에게서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했다. ‘병사’의 표식과 그 표식에 덧씌워진 탈영병의 표식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서야 ‘다른 아저씨들이 오던 날’이 무슨 날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죽인 군인 둘은 탈영병을 총살하는 역할이었군.’
어째서 탈영병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탈영병의 처리 방식이야 총으로 죽이든, 칼로 베든, 아니면 갈아서 들에 뿌리든 영주의 자유 재량이니 할 말이 없었다.
총살, 욕망에 번득이던 눈빛, 여자를 누르던 헉헉대던 숨소리, 비웃음, 비명, 그리고 오늘밤 두 명의 군인들이 ‘치뤘어야’ 했을 울음과 괴로움. 생명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나의 몸 안에서도 끝과 끝을 오고 갈 정도로 다채롭고도 슬펐다.
여자는 창고에서 나와 부서진 문간 근처에 쓰러져 있던 큰 통을 집어들었다. 뚜껑을 열자 아이 말대로 활탄액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청난 연소능력을 가진 활탄액은 불을 붙이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적은 양으로도 모든 것을 태워 재를 만들 정도로 화력이 강했다. 그래서 순례자들도 종종 애용하곤 하는 액체였다. 여자는 활탄액 통을 들고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가에 죽은 얼굴이 무너진 남자와 방 안쪽에서 팔이 잡아뜯어진 채 죽은 남자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흐릿하게 들어왔다.
“그렇다고 너희를 용서하진 않아.”
여자는 방 안 구석구석과 죽은 군인들의 몸에 활탄액을 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기회는 주지. 너희 스스로만의 노력일지언정, 이 불길을 타고 저 하늘에 있는 별의 강으로 올라갈 기회.”
농가를 나와 무너진 창고에도 활탄액을 마저 붇고는, 불을 붙였다. 처음엔 약한 연기를 내며 조금 쉬쉿거리다가 불은 순식간에 확 타올라 농가와 창고 전체를 집어삼켰다. 뜨거운 불기가 여자의 몸을 덮쳤지만 여자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순례자란 원래 불 옆에서 의식을 행하는 자들이니 이런 불길 정도는 가벼웠다.
“추념식을 열어주지도, 추념식의 노래를 불러주지도 못하겠다. ‘병사’들을 위한 추념식은 이것과는 다른 것이고, 나를 능욕한 놈들을 위해 ‘인간’들을 위한 추념식을 열어줄 정도로 내가 자비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 불길이 하늘에 걸린 별의 강으로 너희를 실어가기를 빌어주마. 거기서 영원히 헤엄치든 빠져 죽든, 아니면 구원의 뭍을 찾든 그건 너희들의 몫이겠지.”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 불길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아이가 서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제, 언제 나왔니?”
“방금요…... 익숙한 열기가 느껴져서요.”
“익숙한 열기?”
아이는 노래하던 것을 멈추고는, 하늘을 향해 너울거리며 불티를 날려보내고 있는 거대한 화톳불을 가리켰다.
“저 불의 열기요. 제가 활탄액을 사온 날 저녁이면, 아저씨들은 저를 멀리 떼놓고는 항상 저 편에서 큰 불장난을 하셨어요. 그리고는 불이 다 타오를 때 까지 물끄러미 바라봤죠. 제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엄청 화를 내면서 못 오게 했어요. 그래서 전 언제나 이쯤에 서서 불이 올라가는 것을 바봤어요. 맑은 날 밤이면 불이 정말로 커서 하늘을 다 집어삼키고 별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올라가기도 해요. 그리고 전 불을 보면서 항상 노래불렀죠. 들어보실래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전 불렀던 노래를 다시 조금 큰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조금 익숙한 가락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여자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추념식의 노래였다.
“그거, 그 노래......어디, 어디서…...어디서 그 노래를 배웠니?”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여자는 홀린 것처럼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죽은 이들을 위해 여는 추념식은 상황에 맞는 노래를 가지고 있다. 노래를 접하고 배우는 것은 드물지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추념식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적어도 로크랜드에 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여자 자신이, 인간이 아닌 ‘아인’ 출신의 순례자이자, 로크랜드 최고재판소의 가장 깊은 장막 안에 자리한 원로원 소속 비밀정보국의 일원인 그녀만이 알고 있는 추념식의 노래였다. 오래 전 원로원의 ‘영창자’인 ‘한 후해’게서 배운 노래. 그리고 이제 이 땅에서 그녀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노래. 그것을 여자의 손에 죽은 미쳐버린 군인들을 위해 아이가 스스로 연 추념식을 흉내낸 자리에서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누가?…...그 노래, 누구한테서 배웠니? 응? 저 아저씨들?”
아이는 여자의 놀라움 따위는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노래를 계속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엄마한테서요. “
그리고는 소절을 마저 끝내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엄마가 누군지는 까먹었어요.”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아이 앞에서 노래 가락에 힘이라도 얻은 듯 농가를 태운 불길은 더욱 더 거세게 타올랐다. 나무와 돌과 그 안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몸을 모두 태워 한번에 하늘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의 강으로 밀어올리려는 듯한 사나운 기세였다. 그 속에서 불길과 함께 타오르는 불티들이 노래 가락의 인도를 받아 별의 강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하늘을 점점이 수놓았다.
추념식. 죽은 영혼들이 별의 강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안식의 세계로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는 추념식의 진정하고도 진실된 모습이었다. 머리는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모습이야말로 진짜 추념식라는 속삭임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기나 한 듯 아이의 노래 속에서 모든 죽어간 생명들이 스스로를 애도하며 별의 강을 헤쳤다.
“넌…...도대체 누구냐?”
여자는 아이를 보고 우두커니 선 채 중얼거렸다.아이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약한 미소만 지은 채 노래를 계속 흥얼거릴 뿐이었다. 불길이 별빛 아래에서 별의 강을 향해 치솟는 가운데 추념식의 밤이 깊어갔다.
첫댓글 1편 보니 궁금증이 많이 생기네요.. 계속 보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