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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329
(소설삼국지)
제3권 적벽대전
제35장 새로운 인재들의 성장
2) 육손
깊은 밤중이었다. 수백 명에 불과한 일군의 병사들이 달빛에 의지해 험한 산길을 행군하고 있었다. 때는 만월이라 길은 좁고 험했지만 산을 오르는 데 지장이 없었다. 달빛에 비추어진 모습이었지만 낡고 헤진 군장이며 군복의 모양과 색깔이 각자 다른 것으로 보아 잘 갖추어진 정예병이 아니었다. 아무 곳에서나 불러 모아 급조한 부대라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외양과는 달리 군대는 엄숙하게 군기가 잡혀 있었다. 병사들과 몇 필 안 되는 군마의 입에는 함매가 물려있었고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행군 중 창과 방패가 부대끼는 소리만이 종종 들릴 뿐이었다.
부대의 선두가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울울창창한 숲길 속을 걸었던 참이라 시원한 느낌이었지만 내려다보이는 공간이 엄청 넓은 것은 아니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온 후미진 만 안쪽에 자그마한 평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희미하게 개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양쪽이 험한 절벽으로 가로 막힌 평지 안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병사들이 길을 내가며 올라온 좁은 소로를 제외하고는 바닷길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외부와 교통할 수 없는 격오지였다.
회계군의 바닷가는 산지가 침강되어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이었다. 바닷가가 복잡하게 구불구불 이루어져 외진 곳이 많았다. 내륙지역은 전인미답의 원시림이 끝없이 펼쳐지는 험한 산지이다 보니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다. 대부분의 지역이 조정이나 주군의 공권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공백지대였다. 이 산지에는 예로부터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원시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중원에서 천하대란이 일어나자 강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강남이나 강동지역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성읍을 중심으로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 거주하며 강동정권에 복종하고 사는 이들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산월족의 거주지에 들어가 저희들끼리 무리들 이루거나 산월족과 결합해 공권력에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화전과 수렵, 채집에 의존하면 물자가 부족하면 군, 현 지역을 약탈하거나 서로를 공격했다. 모두 자체적으로 무장한 집단들이었다. 조정이나 강동정권에서는 이들을 도적떼라 부르고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예상대로라면 회계군의 악명 높은 산적인 반림(潘臨)이 숨어있었다. 정상에 오른 군대는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산기슭을 기어 내려갔다. 선두에 선 지휘관은 이제 갓 스물을 조금 넘겼을까 싶은 젊은이였다. 오래 동안 산야를 헤집고 다녔는지 낡고 헤진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널찍한 이마에 눈매가 깊은 상당히 지적인 얼굴이었다. 피부가 눈에 띄게 희어서 얼굴에 묻은 흙먼지만 깨끗이 씻어낸다면 달덩이 같이 훤한 모습이었다.
군대는 소리 없이 마을에 접근하더니 일제히 안쪽으로 쳐들어갔다. 개짓는 소리 닭울음소리가 요란하고 토방 속에서 단잠을 자던 사람들이 놀라 깨어났다. 얼굴에 험한 문신을 한 십여 명의 무리가 급히 병장기를 손에 들고 대항하러 나오자 젊은 장수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공격했다. 순식간에 도적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 때 마을 뒤 샛길로 몇 사람의 무장 병력이 재빨리 달아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병사들은 나뉘어 일부는 급히 추격을 개시하고 활과 쇠뇌를 든 병사들은 마을 한 복판에서 도주하는 적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한 두 사람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졌지만 나머지는 어두운 산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수는 군대를 정돈시키고 나서 마을 사람 모두를 공터로 불러내었다. 장수는 마을 사람들 중 젊고 용력 있는 자들을 선발해 부대원들과 함께 부서를 나누어 역할을 맡겼다.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일은 마을을 한 바퀴 둘러 목책을 세우고 호를 깊이 파는 작업이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냈다. 작업에 투입되지 않은 군리와 병사들은 일부는 마을의 식량과 물자의 재고를 파악하고 한편으로는 촌장과 마을 노인들을 상대로 심문을 시작했다. 심문 결과 가까스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도적들 중에 반림이 끼어 있었다.
장수는 촌로들을 엄히 꾸짖었다.
“그대들은 그 동안 조정의 은덕을 입어 왔음에도 악당들과 통모하여 작당했으니 모두 죽어 마땅하다. 다만 적들의 협박에 못 이겨 그리했다하니 내 특별히 용서하겠다. 앞으로 반란세력과 손을 끊고 오직 생업에만 충실해라. 군대가 안전은 보장해 주겠다.”
촌로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했다. 온 마을이 도륙되는 참상을 면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형편이었다.
나무와 돌이 채취되어 운반되었다. 부족한 자재는 마을의 큰집과 헛간 등을 허물어 조달했다. 목책과 호가 빠른 시간 안에 완성되었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제법 그럴듯한 망루와 사대들도 함께 갖추었다. 깊이 판 호안에는 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세웠다.
방어태세가 다 갖추어졌을 때 산중에서 요란하게 고각이 울리고 북소리가 요란했다. 반림이 자신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반격에 나섰다. 주로 산월족으로 구성된 반란군들이 사방에서 일제히 돌격했다. 웃통을 벗어던진 몸에는 붉고 푸른색 칠을 했고 얼굴에는 문신을 하고 흠집을 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손에는 단검이나 도끼만 하나 달랑 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돌도끼로 무장한 자들도 있었다.
장비는 빈약했으나 반군들의 기세는 맹렬했다. 다 산과 계곡을 달리며 들짐승과 날짐승을 쫓던 용사들이었다. 산월족은 부족 간의 다툼이 잦아 사내들은 상시적으로 전투 훈련을 했다. 강인하고 용맹한 자들이 많았다.
마을 요소요소에 포진한 군대는 매우 침착하게 대응했다. 군기가 세고 훈련이 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 장수는 직접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마을 높은 곳에 장대를 설치하고 깃발과 지휘봉으로 이리저리 병력을 이동시켰다. 적들이 가까이 돌격해 오자 병사들은 일제히 활과 노를 당겼다. 사납게 괴성을 지르고 달려오던 자들이 일제히 고꾸라졌다. 화살을 뚫고 달려온 자들도 깊은 호 안으로 굴러 떨어지거나 멈추어 서서 병사들의 좋은 과녁이 되었다. 특별히 사나운 자들이 호를 뛰어넘어 목책을 붙잡고 기어올랐으나 병사들이 창과 칼을 이용해 쳐내버렸다. 한바탕 혈전을 치루더니 반적들이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창과 화살과 돌이 마을 한 복판에까지 떨어졌었지만 죽은 병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몇 명의 병사들이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반면에 산야에 흩어지고 호안에 나뒹군 적의 시체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의 이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적은 이 번에는 마을을 돌아 바닷가로 난 길 한 방면에서만 집중공격을 했다. 워낙 많은 수효가 돌격해 오니 호가 메워지고 목책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젊은 장수는 지휘기를 들어 독전 할 뿐 예비병력을 동원해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닷가 방면에 배치된 궁노수들의 수효는 반대편 언덕 방면 보다 그 수효가 적었다. 오로지 장극으로 적을 밀어내고 검을 휘둘러 적을 찔렀다. 피가 튀고 목이 달아났다. 그 순간 언덕 숲속에서 일제히 기치가 일어나더니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사나운 용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반림을 위시한 적의 최정예병들이었다. 제법 갑주를 갖춰 입고 등나무 방패와 창칼을 갖추어 든 자들이 많았다. 적들은 순식간에 언덕 쪽 목책에서 불과 수십 보 떨어진 곳까지 몰려 왔다. 목책 안쪽에서 방비가 없는 척 위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격을 가했다. 호를 건너뛰거나 사다리를 놓는 적들은 장극을 뻗어 찍어버렸다. 화살과 창에 찔러 쓰러지는 적들이 무수히 많았다. 적은 그치지 않고 몰려왔다. 호 앞에서 머뭇거리던 자들은 뒤에서 오는 자들에게 밀려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젊은 장수는 침착하게 양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관찰했다. 이윽고 바닷가 쪽의 적들이 공세를 늦추고 슬그머니 물러가기 시작했다. 언덕 쪽에서는 적의 공세가 더욱 가열차졌다. 호가 시체와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 묶은 다발들로 메워지고 적의 사나운 용사들이 목책의 녹각을 잡고 넘어왔다. 혼전이 벌어지고 매우 위태한 상황이었다. 그제야 장수는 예비병력의 출동을 명했다.
예비병력은 장극을 앞세우고 대오를 지어 직선으로 돌격했다. 목책을 넘어 혼전을 벌이던 적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쓸어내 버렸다. 반적들은 다시 목책을 넘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장수는 붉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일제히 추격을 시작했다. 언덕 허리와 바닷길 쪽에서 적들이 무수히 칼을 맞고 쓰러졌다.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장수는 징을 울려 병사들을 거두었다. 적은 완전히 물러났다. 반림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병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화살을 맞아 다친 상태에서 도주했다고 했다.
젊은 장수는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먼저 마을을 안정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마을 사람들은 관군의 위력을 보았으므로 쉽게 복종했다. 장수는 촌장과 촌로들에게는 직함과 관작을 내려주고 자위대를 지휘할 권한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로 부대를 편성하고 마을에 주둔하면서 촌장의 지휘 하에 둔전을 개간하게 했다.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새로 징발한 병사들 용력이 있고 믿을 만한 자들은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한편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군수물자를 보충했다. 모든 체제가 갖추어지자 장수는 병력을 지휘해 마을을 떠나갔다. 다시 산곡을 넘고 개울을 건너 반림을 추격해 들어갔다. 적에게 의지하고 있는 촌락들과 산월족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고 관의 영향력 안으로 편입시켰다. 위엄과 은혜가 해창(海昌) 현 안팎에 진동했다. 추격을 시작한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어느 이름 없는 산곡에서 반림을 붙잡아 참수했다.
이 젊은 장수의 이름은 육손(陸遜)이었다. 그의 직함은 해창현 둔전도위(屯田都尉)였다. 오군과 회계군, 단양군 사이의 산악지역에는 많은 무리들이 숨어 살았다. 이들은 현지의 산월족과 교류하며 반란과 도적질을 일삼았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가 반림이었다. 해창현장이 반림의 손에 죽음을 당하자 둔전도위 육손이 현장을 대리해 현의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었다.
육손의 자는 백언(伯言)으로 오군(吳郡) 오(吳) 현 사람이었다. 본명은 육의(陸儀)였으나 항상 겸손하고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해 손(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육씨(陸氏)는 대대로 강동에 거주해 온 대성받이 였다. 씨족이 워낙 융성해 일족의 수효도 많았을 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군의 주요 호족이다보니 대대로 효렴을 배출해 중앙 정계에 이름 있는 인사들도 많이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사가 육강(陸康)이었다. 육강은 육속(陸續)의 손자로 여러 군의 태수를 지냈다. 중평2년(185년) 낙안태수로 있던 육강은 남궁의 운대와 낙성문 조성을 위한 비용 징수와 관련하여 영제를 비판했다가 중상시 장양과 조충 등의 참소에 의해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 여러 사람들이 극구 변호해준 끝에 간신히 극형만을 면하고 낙향했다. 그 후 육강은 여강태수로 복직되었다.
원술이 구강에 내려와 양주를 호령하게 되었으나 여강태수 육강만은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육강은 원술이 조정에서 명을 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실력에 입각해 양주를 장악했으므로 그에게 복종할 뜻이 없었다. 특히 원술이 참람한 뜻을 드러내자 육강은 더욱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원술이 서주의 유비를 공격하러 나설 때 여강군에 쌀 삼만 섬을 요구했으나 육강이 이를 거부했다. 원술이 매우 화를 내고 손책을 보내 육강을 공격했다.
원술의 밑에 있던 손책은 동향의 큰 선배인 육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육강은 손견의 집안 자체를 대단치 않게 생각했고 또 손책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원술의 부하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단지 주부에게 손책을 접대해 보내게 했다. 손책은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늘 이 점에 대해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가 원술의 명을 받자 옳다 거니 출정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육강을 쳐서 여강을 빼앗으면 여강태수 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육강은 학자였지 무장은 아니었다. 그는 원술의 군세가 호대해 스스로 막아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 때 육강의 문하에는 육손이 머무르고 있었다. 육손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종조부뻘인 육강의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육강은 육손에게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때가 건안원년(196년)이었으므로 육손은 나이가 십칠 세였다. 육손은 광화3년(180년) 생이었다. 육강에게는 육적(陸績)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집안을 통솔할 수 없었기에 육손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육강은 그만큼 육손의 자질을 믿었다.
육손은 육강의 일족을 데리고 무사히 강동으로 돌아왔다. 육강은 손책을 맞아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다. 오군으로 돌아와서는 육손이 집안의 어른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고 질서를 잡았다. 육강의 아들 육적은 육손의 보호와 지도하에 자라났다. 이 육적과 관련하여 ‘육적회귤(陸績懷橘)’이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육적은 자를 공기(公紀)라 했다. 일찍이 육적의 나이 6세에 부친 육강을 따라 구강에 가서 원술을 뵌 적이 있었다. 원술이 손님 접대 차 귤을 한 접시 내어주었다. 어린 육적에게는 처음 먹어보는 귀한 과일이었다. 육적이 귤을 먹다가 그 중 세 개를 품속에 슬쩍 넣었다. 면담을 마치고 물러날 때 육적이 인사를 하다 품속에 있던 귤을 땅에 떨어뜨렸다. 원술이 짐짓 물었다.
“육랑은 손님으로 와서 어찌 귤을 훔쳤는고?”
육적이 무릎 꿇고 절을 하며 사죄했다.
“너무 맛이 있어서 혼자 먹기에 아깝기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드리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원술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육적회귤’ 또는 ‘회귤’은 효성이 지극한 행위를 일컫는 데 사용하는 말이 되었으며 육적은 이로 인해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손책이 오 땅에 자리 잡았을 때 육적이 아직 십대에 불과했음에도 불러서 자신의 막부에 참여하게 했다. 그의 부친 육강을 살해한 죄책감도 있었고 오군의 대족인 육씨와 마냥 척을 지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군에서 세력이 큰 호족으로는 육씨, 고씨, 장씨, 주씨 등이 있었다. 손권의 외숙인 오경의 오씨네는 형편이 좀 나았지만 손견의 손씨는 이 축에는 들지도 못했다. 손씨는 대대로 군이나 현의 하급관리를 지낸 집안으로 전국적 유명 인사를 연속해서 배출해온 다른 씨족들과는 급이 달랐다. 이들 세족들은 서로 혼인관계로 엮여져 있었기에 강동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지지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육적이 처음 손책의 막하에 들어갔을 때 장소(張昭), 장굉(張紘), 진송(秦松) 등이 상빈(上賓)으로 손책의 주요 의논 상대가 되었다. 강동정권은 이제 막 세워졌으므로 무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손책과 함께 향후 진로를 의논할 때 장소 등은 모두 천하가 편안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무력으로 다스리고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적은 나이가 어려 말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멀리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난 날 관중은 제환공을 보좌해 제후들을 아홉 번 모아 회맹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지만 병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자 왈,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을 수양하여 오게 해야 한다.’ 했습니다.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은 도덕으로 천하를 끌어안을 계책에는 힘쓰지 않고 오로지 무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육적이 비록 어리고 몽매하나 이로써 편안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장소 등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육적은 장성하자 용모가 웅장했다.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대장의 재목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평생 학문에 뜻을 두었다. 천문역법과 산수 등 두루 읽어보지 않은 것이 없어 박학다식했다. 우번(虞翻)은 나이가 많고 명성이 높았으며 방통(龐統)은 형주에서 사신으로 왔고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다 육적과 우정을 쌓고 친하게 지냈다.
손권이 정권을 맡았을 때 그를 불러 주조연(奏曹掾)으로 삼았으나 항상 도리에 입각해서 직선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쳤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울림(鬱林) 군의 태수로 나갔다. 손권은 그에게 편장군(偏將軍) 직을 더해주고 군사 이천 명을 주었다. 육적은 체격은 큰데 운동은 안하고 앉아서 책읽기만 좋아했으므로 관절염이 심했다. 게다가 학문적 성취에 뜻이 있었으므로 변방에 나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비록 군사 일을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책을 저술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혼천도(渾天圖)’를 작성하고 주역에 주를 달았으며 태현(太玄)을 해석했는데 이 저술들이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육적은 군무에 종사하다가 나이 불과 삼십 이세에 죽었다.
건안5년(200년), 손권이 장군이 되었을 때 육손은 스물 한 살이었다. 육손은 육적과 함께 손권의 막부에 출사했다. 동서조(東西曹)의 영사(令史)를 역임하고 나서 처음 외직으로 나온 것이 해창(海昌)현의 둔전도위(屯田都尉)였다. 해창현은 몇 년간 계속해 오랜 가뭄을 겪었으므로 육손이 관부의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농업과 잠상을 권장하고 감독하자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의지했다.
육손은 해창현에서 반림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불러 모은 병사가 이천 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다 육손의 부곡(部曲)이 되었다. 손권의 막부에서는 육손의 병사가 강한 것을 알고 그를 예장군 파양(鄱陽)에 파견해 그곳의 도적 두목 우돌(尤突)을 토벌하게 했다. 우돌은 팽호가 잡혀 죽고 난 후 그 뒤를 이어 난을 일으킨 자였다. 육손은 우돌 역시 붙잡아 참수하고 그의 무리를 다 토벌해 평정했다. 이 공으로 육손은 정위교위에 임명되었고 자신의 군대를 이포에 주둔시켰다.
손권은 그의 형 손책의 딸을 육손의 배필이 되게 해 인척관계를 맺었고, 수시로 그를 불러 세상의 일에 대해 함께 상의했다. 육손이 건의했다.
“방금 영웅들이 쟁패를 하고 시랑과 같은 무리들은 책략을 꾸미고 관망하고 있으니 어지러운 적들을 물리치고 난을 평정하려면 많은 병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산적들은 나라에 오래된 해악으로 험하고 깊숙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무릇 안이 편안하지 않고서는 먼 곳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들을 평정하면 큰 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병력이 있어야 그 중에서 정예병을 뽑을 수 있습니다.”
손권은 육손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를 장하의 우부독(右部督)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난 후 단양(丹楊) 군의 도적 수령 비잔(費棧)에게 인수를 주고 산월(山越) 족을 선동해 내응이 되게 했다. 손권이 육손을 보내 비잔을 토벌하게 했다.
비잔 등 반란세력은 병력이 많았지만 육손이 데리고 건 병사는 적었다. 육손은 본진에 군기를 많이 벌려 세우고 북과 피리를 분산시켜 배치해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밤중에 정예병들을 본진을 에워싼 산과 골짜기에 매복시켰다. 비잔의 군대가 대규모로 본진을 공격해 오자 육손의 진영에서는 북을 요란하게 쳤다. 배후에서 복병이 일제히 북을 마주 울리며 나와 적시에 적을 공격했다. 앞뒤에서 적을 맞은 비잔의 무리는 대패했다. 비잔의 무리가 흩어져 달아나자 육손은 끈질기게 추격해 적을 소탕했다.
육손은 이어서 단양, 오군, 회계 등 동쪽의 세 개 군의 오지에서 숨어살던 사람들과 산월족들을 복종시키고 그들로 군대를 편성해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보충역으로 삼았다. 이렇게 조직한 군대가 정병 만여 명이었다. 육손이 이들을 거느리고 손권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니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고질적인 문제였던 산적들과 악당들은 다 깨끗이 청소되었다. 육손은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단양군 무호(蕪湖)에 주둔했다. 이 때 육손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는 동오에서 주유 다음가는 규모였다.
그 당시 회계태수 순우식(淳於式)이 표를 올려 육손이 제멋대로 백성들을 잡아다 병사를 만들어 관할구역 내를 소란스럽게 한다고 비난했다. 육손이 뒤에 도성으로 가서 손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순우식을 훌륭한 관리라고 칭찬했다. 손권이 물었다.
“순우식이 그대를 고발했는데 그대는 그를 천거하니 어째서인고?”
육손이 대답했다.
“순우식의 뜻은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는데 있으므로 저를 고발한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다시 순우식을 비방한다면 성덕을 어지럽히게 될 것이니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손권이 칭찬했다.
“이는 정말로 덕망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육손은 군문에 종사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진에서도 도복에 갈건을 쓰고 서생 차림을 즐겼다. 이 때 청담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주유와 같은 동오의 멋쟁이들은 군문에서도 학창의에 윤건을 쓰고 선풍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다. 이런 영향 탓도 있었지만 육손은 잘 훈련된 군대의 장수는 굳이 갑주를 두르고 군문 앞에 설 필요가 없다는 지론이었다. 육손은 장막에 앉아 천리 밖의 작전을 지휘할 능력을 배양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의 군대에는 범과 호랑이처럼 개인적 용맹을 자랑하는 자는 없었다. 기계처럼 명령에 복종하는 철저하게 조직화된 군대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