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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결정
멀리 ‘탑’을 눈앞에 두고 걸은 지도 반나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열 살 남짓한 나이 치고는 여자의 걸음걸이를 곧잘 따라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른의 걸음걸이를 온전히 쫒아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중간중간 걸음을 늦춰야 했다.
“노새에 짐이 많아 태우지 못해서 미안해. 힘들겠지만 주둔지에 갈 때까지만 좀 참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아이는 숨을 약간씩 헐떡이면서도 웃으며 대답했다.
불타버린 농가에 아이를 놔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활탄액을 사러 가곤 했다는 가난한 작은 마을은 아이를 맡길만한 곳이 못 되었다. 여자는 아이를 원래대로 다시 행상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하고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으로 아이와 함께 향했다. 전쟁터는 어차피 ‘탑’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어제밤 아이가 부른 노래를 들으며 여자는 약간 고민을 했다. 아이가 불렀던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는 아이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에게서 배울 만한 노래가 아니었다. 설 후인이 어린 시절은 보낸 도시 ‘아크로폴리스’에서도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설 후인과 노래를 그녀에게 가르쳐줬던 한 후해 단 두 명이었다. 그녀가 아는 범위에선 적어도 그랬다.
‘어떻게 그 노래를 알고 있을까?’
어쩌면 아이의 몸에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다. 모든 로크랜드인들은 ‘인간’이든 ‘아인’이든 자신의 몸에 해답을 조금씩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큰 도시의 ‘지성소’로 가서 지루하고도 복잡하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여자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더 이상 ‘탑’에 가는 것을 늦춰서는 안되었다. 더욱 날카로와진 감각 능력. 강화된 반응 속도와 힘. 감정적인 불안정. ‘순례행’의 막바지에서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증상들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어서 탑에 가서 여자가 집어삼킨 죽음들을 토해내지 않는다면, 죽음의 그림자들은 그들을 삼킨 대가를 여자의 몸에 물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를 전쟁터의 행상에 맡기는 것은 무너져가는 여자의 몸과, 아이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한 마음이 타협한 휴전의 결과였다.
다급한 마음의 어른 발걸음과, 그 발걸음을 쫒아가기 위해 더 다급해진 아이의 발걸음에 차인 흙먼지가 따가운 햇빛에 날려 메마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날씨가 더운 탓에 여자의 목에 두른 목가리개도 땀에 젖은 채 먼지를 먹었다. 여자는 목가리개를 고쳐쓰다가 자신을, 정확히는 드러난 목에 난 돌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난, ‘아인( 亞人)’이야.”
아이는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죄송해요.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알고 있어. 그리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아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순례자’야. 그러니 목에 있는 내가 아인이라는 이 표시는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여자는 품에서 종이에 싸인 메달을 꺼내 보였다.
“오히려 내게 의미가 있는 건 내가 순례자라는 증거인 이 메달이지. 우리 ‘아인’은 이 로크랜드에서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취급받으며, 들판과 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고, 전쟁의 ‘병사’로 끌려다니고 있지만, 이 메달은 내가 그런 ‘인간’과 ‘아인’의 구분을 넘어 저 하늘 너머의 길을 준비하는 순례자라는 것을 증명해 준단다. 내 소속은 우리가 사는 이 로크랜드가 아니라 이 땅과 저 하늘을 포함한 모든 세상이고, 이 메달이 그걸 말해주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문득 어제의 군인 두 명을 떠올렸다. ‘순례자’의 메달을 보면서 비웃던 그들이 지금 자신의 말을 들으면 뭐라 반응할 지 궁금했다. 그들은 여자의 목에 있는 돌기가 그녀에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마친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 자아내는 이질감을 새삼 실감했다. 그런 탓에 조금은 변명섞인 대답을 했을지도 몰랐다.
“나 같은 ‘아인’이라도 순례자가 될 수 있어. 물론, 보통의 ‘인간’들에 비해 훨씬 더 드문 일이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다. ‘부름’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오니까.”
아이가 조금 힘을 얻은 듯 기대를 담아 대답했다.
“저도 ‘부름’을 받아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순례자가 되고 싶니?”
아이의 눈빛이 땀에 젖은 얼굴과 함께 빛났다.
“배고픈 건 싫어요. 버려지는 것도, 아는 사람이 죽는 것도…... 순례자가 되면 그렇지 않을 수 있잖아요?”
‘배고프진 않지만 언제나 허기져 있고, 버림받진 않지만 언제나 누굴 버려야 하고, 항상 모르는 이들의 죽음 속에서 살아야 한단다.’ 여자의 마음 속 대답은 착찹한 눈빛 만으로 전달하기엔 아이에게 너무 어려웠다. 아이가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행상 분들을 따라다닐 때, 그분들이 도시의 ‘지성소’에 들러 기도하는 것을 봤어요. 거기 순례자님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고 지내는 것 같아 부러웠어요. 저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고 절 돌봐주던 분에게 부탁해 봤는데, ‘부름’을 받았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그냥 혼나기만 했죠. 하지만, 정말 순례자님들이 부럽긴 했어요.”
‘그들은 거기 있어서 편히 지내는 게 아니라, 순례자 자격과 그 자리를 돈으로 살 수 있어서 편히 지내는 것이겠지.’ 아이에게 최고재판소를 정점으로 하는 순례자들의 진실을 가르쳐 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 하고 싶다는 욕망도 참기 힘들었다. ‘순례행’의 참모습을 도시의 지성소에서 살면서 돈에 절어 있는 그들이 알리도 들을 리도 없었지만 아이를 앞에 두고서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탑’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자신의 무게에 여자는 지쳐 있었다.
“순례자 모두가 ‘지성소’에 있는 그들처럼 사는 건 아니야.”
여자는 땀과 먼지에 절은 자신의 소메를 쓸어내렸다. 낡은 옷자락과 햇빛에 그을은 손등, 그리고 배경이 된 메마른 땅이 오랜 친구처럼 사이좋게 어울렸다.
“순례자들은 우리가 이 로크랜드에서 벗어나 저 하늘 위에 있는 ’우주’라는 곳으로 다시 나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이들이야. 그래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끝없이 지혜를 탐구하고, 죽은 이들은 넋이나마 별의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추념식을 열어줘. 지혜는 풍요로운 도시에서부터 메마른 황야까지 로크랜드 전체에 걸쳐 있단다. 그리고 죽음은 영주들의 호화로운 장례식부터 병사들의 참혹한 전쟁터에 이르기까지 공평하게 내려앉아 있지. 진짜 순례자들은 그런 모든 대지와 모든 죽음을 다 안고 살아간단다. 거기엔 화려한 옷과 식사보다는 별을 벗삼은 밤과 쉬어버린 빵이 더 잘 어울리지. 순례자란 그런 거야.”
아이에겐 좀 어려운 말이었나보다. 파란 눈동자가 어리둥절하게 깜박였다. 여자는 자신이 스스로 조금 흥분한 것을 후회하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네가 순례자의 가능성이 있는지는 도시에 있는 지성소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긴 하지. 내가 군대 주둔지에 가서 행상들을 만나 너를 맡아달라고 할 때, 네게 ‘부름’의 가능성이 있는지 나중에 지성소에 들러 알아보라고 부탁을 해 놓을 예정이야. 물론 그렇게 할 돈도 맡겨 놓고…... 혹시 아니? 나중에 우리가 순례자로 서로 만나게 될 지.”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힘을 내는 듯 보폭을 크게 벌리며 열심히 걸었다. 나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지금 내가 ‘숨’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란다.’ 혹시 아이가 순례자의 자격이 있거나, 아니면 아이가 부른 그 노래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나중에 아이를 찾으면 됐다. 최소한 여자에겐 그렇게 할 권한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개의 가느다란 빛나는 선이 수직으로 솟구쳐 하늘을 양분하고 있었다. 여자가 향하는 목표점이자 이번 ‘순례행’의 종착지인 ‘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로크랜드에 남은 열 두 번째 궤도엘리베이터 ‘아르키메데스’이기도 했다. 하늘 끝까지 뻗은 기다란 몸체에 반사된 햇빛이 여자의 걸음걸이에 맞춰 이리저리 춤을 췄다. 환영하는 듯, 기뻐하는 듯, 창공을 향해 솟은 ‘탑’은 여자가 모아온 죽음의 그림자들을 먹어치우기 위해 탐식의 춤을 추고 있었다.
‘판-두림’ 영주의 군 주둔지는 여자가 보아온 여느 곳과는 다른 규모를 자랑했다. 수 킬로미터 너머 전개되어 있을 전장의 규모를 짐작이라도 하듯, 주둔지를 둘러싸고 설치한 방책과 감시소는 작은 개울과 구릉들까지 가로질러, 야트막한 언덕들이 만든 천혜의 얕은 분지 안 전체를 감싸안고 있었다. 몇몇 언덕 주변 요소요소에 감시 초소를 세워 전장과 주둔지 주변을 경계하는 가운데, 중간중간이 끊긴 동심원들이 분지 안을 빼곡히 채웠다. ‘아인’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지내는 대형 천막들이 질서 정연하게 가장 바깥을 구성하고, 그 안에 ‘인간’인 군인들을 위한 막사들이 배치되었다. 정 중앙에는 거대한 공터가 자리잡았고 그 주변으로 병기보관소나 수리소들이 세워져 적들에게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숨찬 입김을 끊임없이 내뿜었다. 막사 중간중간에는 공터와 취사장 등이 산재해 있었다. 건물들과 막사 사이사이를 잇는 길들은 무수한 발걸음에 눌려 웬만한 비가 아닌, 아침 이슬 같은 어설픈 습기로는 눅눅해 질 여유조차 없을 듯 단단히 다져저 있었다.
대조적으로, 행상들의 천막은 방책 바깥 지역 군대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자리잡았다. 그곳에는 딱딱하고 건조한 방책 안과는 달리 느슨함과 축축함이 흘렀다. 군인들의 막사 쪽을 지나오면서 점차 거무스레한 빛을 띄어가는 개울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인들의 부산한 움직임, 군인들의 고함, 창녀들의 웃음 등이 버무려져 눅눅함을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흐트러진 발걸음과 떠들석한 목소리들이 습기를 먹은 공기 중을 떠돌았다. 여자가 더위를 부쩍 느낀 건 더운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를 ‘코-후룸’의 지성소까지 데리고 가라는 거요?”
“행상단이 다음에 들를 지성소가 있는 도시가 거기라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곳 지성소의 순례자에게는 이 편지를 전해주시구요.”
행상단에서 행정을 보던 사내는 노골적으로 찡그린 얼굴로 여자의 얼굴과 여자가 탁자에 내려 놓은 편지, 그리고 천막 밖에서 행상단 좌판 천막의 이곳을 보러 다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돈 주머니의 중량감을 살짝 가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의 막사는 입구를 활짝 열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했다.
“꼭 우리가 해야 하는 거요? 이곳에는 우리 말고 다른 행상들도 많은데……”
“‘코-후룸’이 여기에서 지성소가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이고, 이 행상단이 마침 며칠 내 그곳으로 가는 유일한 행상단입니다. 다른 행상단을 찾을 이유가 없지요.”
사내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리 상대의 카드를 보지 않고 자신의 패를 내보인 것을 다시금 후회했다. 순례자가 맡긴 아이 따위, 데리고 있기 귀찮기만 할 터였고 혹여 문제라도 생기면 나중에 골치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돈주머니는 어림작으로 봐도 아이 밥값이나 간신히 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내는 머리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귀찮은 부탁을 거절할 방법을 궁리했다.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보통은 자신의 상황이 부탁을 받는 데 부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상대방의 상황이 부탁을 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점을 물고 늘어진다. 사내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적인 범주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었으므로, 우선 전자에 기반하여 변명거리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그 필사적인 머리의 속도에 맞춰 춤을 추던 사내의 동공 속에, 천막 안 후덥한 공기에 지쳐 느슨하게 해 둔 여자의 목가리개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여자의 목가리개 사이에 얌전히 자리한 작은 무엇이. 그리고 사내는 아주 잠깐이라면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뭐야? ‘아인’ 이잖아?”
순례자의 증표이 메달은 확인했다. 도시 뒷골목 술집에서라면, 모르지만 군대가 자리잡은 주둔지 한가운데에서 가짜 순례자 증표를 대담하게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최고재판소는 물렁한 집단이 아니다. 어쨌든 그들은 로크랜드의 영주들도 어쩌지 못하는 권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래서 사내는 여자의 목에 있는 돌기를 통해 여자가 ‘아인’임을 확인한 시점에서도 여자가 내민 순례자의 증표가 가짜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상단의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선, 권력이란 짐승을 사람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때로는 이 짐승을 저 짐승으로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마술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정도의 능력은 필요했다. 사내가 필요했던 것은 단지 시간이었다.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자신의 부적절한 상황을 찾기 위한 시간.
“‘아인’ 맞습니다. 그리고 순례자이지요. 최고재판소와 영주들이 맺은 ‘조약’ 규정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내 몸이 필요하든지…...’
여자는 어제 죽은 군인들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사내의 눈빛이 주로 놀러다니는 숫자와 계산서 위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는 듯 했다. 사내는 감정을 담지 않은 채 바깥을 향해 외쳤다.
“이봐! 바깥에, 그래 너. ‘아인’이 여기 있다! 그래 빨리 경비대 불러와!”
사내는 바깥을 향해 고함을 치고는, 눈길을 여자에게로 돌려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아니, 당신이 ‘아인’이란 걸 안 이상, 나도 주둔지의 경비대에게 신분 확인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는 것으로 하지요.”
사내의 말에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안그래도 마음이 급한데 어째 일들은 하나씩 풀려가는 게 아니라 하나씩 더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좋으실 대로. 하지만 확인이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아이를 맡을 준비는 하셔야 할 겁니다. 아, 그리고 그 돈주머니는 아직 당신 게 아니라 제 겁니다.”
여자는 슬며시 돈주머니를 잡아쥐는 사내의 팔목을 잡아채 돈주머니를 빼앗았다. 그리고 사내를 한번 째려본 다음, 경비병들이 기다리고 있는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다.
여자가 아이와 함께 끌려간 곳은 방책 내 군인들 주둔지에 세워진 천막이었다. 천막 그늘 아래에서 한 명은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옆에 서서 군인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표정이 없다는 점만 빼면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한가진 모습이었다. 경비병이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다가오자 그들은 집중했다. 주둔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아이와 여자에 약간은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무슨 일이지?”
“‘림-팔’ 행상단에서 순례자라고 주장하는 아인을 붙잡았다고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순례자라고 주장하는 아인? 그건 순례자의 증명패를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
“행상단에서는 자신들은 확인을 못하겠다고 저희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의아한 듯이 눈썹을 약간 치켜떴지만 곧 아까의 단조로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심드렁하게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온 경비병이 화급히 남자에게 말했다.
“여자 쪽입니다. 아이는 아닙니다.”
“어디, 잘 되어가나?”
“......네?”
“자네, 요새 그 행상단과 같이 온 여자들하고 상당히 친하다고 하던데……”
“......그게…...”
의자에 앉은 남자는 부하의 우물쭈물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아무리 ‘아인’이지만 순례자의 증표를 가진 분을 포로 데리고 오듯, 그것도 어린아이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최고재판소가 정식으로 항의하면 내 목으로도 감당 못해. 그러니 어차피 떠날 ‘림-팔’ 행상단 심부름꾼 노릇은 이제 그만해라. 혹여 따라간다고 탈영할 생각은 말고. 탈영은 걸리면 무조건사형이니까.”
“......”
군인이 아무 말 못하고 서 있자 앉아 있던 남자가 군인에게 손짓했다. 여자와 아이를 놔두고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군인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앉아 있던 남자는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다가와 가볍게 경례했다.
“헌병대 주둔지 제3경비대 백인장 ‘파-두난’ 입니다. 제 옆은 부관인 ‘코-호’입니다. 방금 전 부하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해합니다. 저는 순례자 ‘설 후인’ 입니다. 이쪽 아이는 ‘숨’ 이구요.”
그녀는 가볍게 목례하고 품에서 순례자의 증표를 꺼내 내밀었다. 햇빛을 반사한 은색 메달이 남자들의 동공 안에서 이채롭게 빛났다. 그리고 메달을 받아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한 후 ‘파-두난’의 얼굴은 단순히 흥미로운 것을 보고 변했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굳어 버렸다. 동공에 서렸던 흥미로움이 사라졌다. 그 빈 자리는 놀람과, 경악, 그리고 기대감이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제 2궤도위……”
파-두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적어도 그는 설 후인이 어떤 직위에 있는 자인지는 알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상부에, 상부에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설 후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상부에 보고하겠다는 의도는 뻔했다. 추념식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보통의 순례자라면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불길 하나와 기도의 노래 몇 곡. 하루 밤의 노동. 그리고 두둑한 보수와 좋은 식사. 잠자리. 순례자가 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곳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달래줄 의지도 시간도 없었다. 몸을 잠식해오는 죽은 영혼들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시간이 지속되고 있었다. 어서 아르키메데스로 가서 그 속박을 내려놓아야 하는 게 그녀가 가진 공식적이고 또 개인적인 가장 시급한 임무였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인장 파-두난은 간절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탁입니다. 제2궤도위의 순례자가 이곳에 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제3궤도위는 고사하고 제4...아니, 제5궤도위의 순례자를 모시기도 쉽지 않습니다. 죽어간 이들을 위해 사흘만, 아닙니다. 이틀만 내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멀리 보이는 초소 하나를 가리켰다.
“저 초소 너머로 몇 킬로미터 앞이 전장입니다. 지난 반년간 저희 ‘판-두림’군과 ‘추-오롬’군이 한치도 나가지도 물어서지도 못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몇 명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말을 잠깐 멈추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태양과 흥분으로 상기된 볼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실룩댔다.
“2만 5천입니다! 지난 반 년간 2만 5천명의 군인과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추념식도 열지 못하고 전장분해탄에 의해 분해되었습니다. 반년 동안, 단 일곱 번의 추념식만 있었습니다. 모두 고급 장교들을 위한 추념식이었죠. 이해는 갑니다. 고작 열명, 스무명에 대한 추념식 권한 밖에 없는 순례자분들을 모시고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저희도 인간입니다. ‘병사’들에게는 추념식을 열 수 없으니 말 안하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인 저희의 동료들은 비록 낮은 계급에 있을지언정 저 하늘 위로 올바르게 인도받을 자격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흰 그저 계급이 낮고 돈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전장에서조차 제대로 된 추념식. 하다 못해 저희끼리 하는 장례식조차 없이, 전장에 버려진 채, 전장분해탄에 의해 육신이 분해되어 쓰레기처럼 버려집니다.”
그는 목이 막히는지 잠깐 쉬고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무너지는 듯한 말투로 다시 애원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지난 보름동안 죽어 전장에 버려진 삼천 명이 넘는 생명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파 두난은 간절했다. 제2궤도에 속한 순례자가 열 수 있는 추념식 규모는 천 명에 달했다. 그간 영주가 귀족 전사자들을 위해 모셔왔던 4궤도나 제5궤도의 순례자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이런 고위 순례자가 여는 추념식이라면 귀족들이나 고급 장교들도 일반 군인들을 위한 추념식을 허락할 가능성이 컸다. 그건 부대의 사기와도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추념식은 죽은 영혼이 구원의 사다리를 제대로 짚고 올라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식이다. 순례자들이 만들어 놓은 노래 중 하나를 상황에 맞게 잘 선택해서 부르는 가운데, 그 노래에 인도되어 영혼이 별의 강을 건너가는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평시에도 평민들은 열기 어렵고, 전장에는 더더욱 어려운 예식이었다.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여는 장례식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제2궤도의 지위를 가진 순례자는 그 모든 상황을 마법처럼 바꾸어 구원의 은총을 전장에 별빛처럼 뿌릴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설 후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상황은 이해합니다만, 저도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탑’으로 가야 합니다. 정말 미안하지만 추념식은 제가 ‘탑’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반드시 열어드리겠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빨리 아르키메데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 안에 머금은 죽음들이 나를 차지해 버릴 테고, 그러면 나는 조만간 죽은 당신 동료들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추념식까지 열어야 할지도 몰라. 미안해.’
마음 속은 그녀의 냉정한 대답과는 달리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파-두난은 마음의 귀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설 후인 딴에는 위로랍시고 한 말이 그에겐 위로가 아닌 분노만 자아낼 뿐이었다.
“돌아올 때? 하! 돌아올 때라구요? 정말 제정신이신 겁니까? 돌아올 때라구요?”
“백인장님 그만하십시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나 이러십니까? ”
옆에서 부관이 말렸지만 파 두난은 신경질적으로 부관의 팔을 떨쳐내고는 사납게 소리쳤다.
“이거 놔! 말씀 참 잘도 하십니다. 그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우리 보고 여기서 죽치고 앉아 계속 서로 쏴죽이면서 기다리고 있으란 소립니까? 몇 명이나 더 죽어야 추념식을 열어주실련지요? 만 명? 이만 명? 그 잘난 데이터 저장소인지 뭔지, 최고재판소의 장난감을 위해 이만 오천명을 집어삼키고도 아직도 당신들은 부족하다는 겁니까? 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비명을 들어본 적이나, 아니 생각이나 해 본 적 있나요? 없겠지…...죽은 이들을 위해 추념식을 열어주는 것조차 거부하는 당신이 그걸 알리가 있나!”
파 두난은 이제 얼굴이 씨뻘개져서 흥분하고 있었다. 부관이 팔을 잡고 말리는 것도, 설 후인 옆에서 ‘숨’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것도, 주변에 있는 다른 군인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부관의 팔에 잡힌 채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래! 넌 ‘아인’이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의 마음 따윈 알 리가 없지! 너희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죽이고, 일하고, 죽는 짐승들이니까. 너희들한테 저 하늘의 별의 강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게 뭐야. 네 영혼은 거지처럼 이 미친 땅을 떠돌다 사라질 테니, 너한테는 추념식이 저주스럽겠지. 네가 못 가는 곳을 위한 거니까!......어, 으억!”
설 후인은 부관에 팔에 잡혀 악을 쓰는 남자에게 다가가 서슴 없이 그의 목을 잡았다. 부관이 놀라 파-두난을 잡았던 팔을 놓고는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부관마저 그녀의 다른 팔에 목을 잡혀 컥컥댔다. 주변에 있던 군인들이 황급히 말리러 다가오려다가 굳은 것처럼 멈춰섰다. 파-두난과 코-호가 갸날픈 여자에게 목을 잡힌 채로 공중에 매달려 발버둥을 쳤다.
“순례자다! 다들 가만히 있어. 나한테 손댔다간 니들 모가지가 날아갈거다!”
설 후인은 날카로운 말투로 외쳤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공중에 대롱거리던 두 사람을 팽개치듯 땅에 내려놓았다. 파-두난과 부관인 코-호는 무릎을 꿇은 채 꺽꺽대면서 목을 부여잡고는 걸신들린 듯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설 후인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치켜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두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하를,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은 인정해 주지.”
그녀는 파-두난의 양 볼을 한 손아귀에 잡아 틀어쥐었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비명을 음미라도 하는 듯 설 후인은 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짐승 운운하면, 제2궤도위 순례자가 최고재판소가 끊어준 딱지 하나로 되는 건 아니란 걸 니 얼굴로 확인하게 될 거야. 알았어?”
고통 속에서도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이는 파 두난의 얼굴을 보면서 설 후인은 후회했다. 지나치게 흥분했다. 그리고 그런 탓에 몸에 무리가 더 빨라지고 말았다. 머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들이 그녀를 삼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아르키메데스는 이제 아주 가까이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 작은 소동 속에, 아이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 바로 그제서였다.
말릴 겨를이 없었다. 그녀 뒤에서 소동을 바라보던 아이는 어느 새 곁을 떠나 파-두난과 그의 부관이 바라보고 있던 군인들의 훈련장 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천막 안에서의 소동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작은 소동이 있었다. 다만, 설 후인이 있던 천막 안과 다른 점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놔둔다는 점이었다. 그건 ‘아인’들로 이루어진 병사들 사이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루한 군복에 피와 먼지를 뒤집어 쓴 병사가 땅에 누워 있었다. 마른 땅은 갈증을 채우려는 듯 병사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삼켰다. 땅은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병사의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저 멀리 멀어져가는 ‘병사’의 무리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설 후인의 소동 와중에 근처를 지나간 그 무리에서 낙오한 듯 했다. 쓰러진 병사는 설 후인의 옆에서 가까스로 호흡을 회복하고 있던 파-두난과는 전혀 다른 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포로가 된 ‘추-오롬’영지군의 병사였다. 물론, 어차피 소속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어제까지 이 영주 밑의 병사로 싸우다가도 내일이면 저 영주 밑의 병사가 될 수 있었다. 물건을 훔치고, 빼앗고, 빌려주고, 대여받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이었다. 병사들 스스로도 옷만 바꿔 입은 채 어제의 아군에게 오늘 서스름없이 총을 당겼다. 전장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서 없는 인간성마저 만들어 빼앗어 갈 정도로 충분히 허기지고 탐욕스러웠다.
아이가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흙먼지와 때로 누렇게 된 옷을 걸친 열살 남짓 여자아이는 군인들과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조합이어서 오히려 아무도 그것이 실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하는 듯 했다. 그 결과 아이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병사에게로 다가가 병사의 얼굴 곁에 무릎을 모으고 앉을 수 있었다.
“얘……”
“잠깐만,”
그녀는 놀라서 아이를 부르며 달려가려다 쉰 목소리로 말하며 팔을 들어 막은 파-두난의 제지에 몸을 멈췄다. 그는 눈을 크게 치켜뜬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신경을 바찍 곤두세워 무엇인가를 들으려는 듯한 모습. 그리고 잠시 후 설 후인도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었다.
노래였다. 아이는 병사의 얼굴을 작은 손으로 쓰다듬으며 작게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어제 밤, 농가와 시체를 장작삼아 행했던 거대한 불꽃에서 아이가 불렀던 노래가 다시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든 생명을 위한 추념식의 노래였다.
슬픔과 애도. 작은 아이는 병사를 위해 애도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차별이나 망설임도 없는, 죽어가는 생명에게 주는 작지만 진실한 애도였다. 자그만한 손바닥도, 모아 앉은 맨발도 모두 슬픔과 애도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설 후인의 눈에는 아이의 그 몸짓과 노래가 온전히 이 땅을 위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로크랜드에서 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어가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따뜻한 보담음이 아이와 함께 너울거렸다.
어쩌면 아이는 이 땅에 사는, 그리고 이 땅에 뿌리내린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 땅의 자식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까지 긍정하고 기다려주고, 축복해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설 후인은 아이를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아이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흐름은, 설 후인 이 지옥같은 땅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땅의 생명들로부터 정보를 빼낼 때 느꼈던 고통과 부정의 흐름하고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너와 나를,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이를 나누고, 재고, 판단하는 법정의 차가움이 아니라, 엇나간 이들을 어루만져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긍정과 인정 그리고 용기가 버무려진 그 무엇 같았다.
그 가운데 추념식이 함께 했다. 진짜 순례자인 설 후인에게는 확실했다. 저 아이는 진정한 의미의 추념식을 하고 있다. 기만으로 가득찬 타오르는 불길만 있는 추념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체들에게서 죽음을 탐식하는 추념식도 아니었다. 아이가 하고 있는 것은 죽은 영혼을 로크랜드에서 떼어내 별의 강으로 보내는 의미 그대로의 추념식이 분명했다. 그것도 슬픔과 애도를 가지고 하는 추념식. 설 후인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아이와 병사에게로 발을 옮겼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만 두십시오…... 순례자님, 규칙입니다.”
파-두난이 그녀를 막아섰다. 아직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잠긴 채였지만 조금 전 그녀에게 거절당한 부탁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듯 딱딱한 말투였다.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은 인간들이, ‘병사’는 병사들이 돌보는 것이 규칙입니다. 당신이 저희 부탁을 거절한 것이 규칙에 의한 것인 것처럼 이것도 지켜야 할 규칙입니다.”
그는 옆에 있던 부관인 코-호에게 명령했다.
“병사들 막사에 연락해. 쓰러진 포로를 데려갈 인원을 보내라고.”
그리고는 잠시 후 덧붙였다.
“......조금 있다가.”
지시를 받은 부관이 멀어져가자 파-두난은 다시 그녀 앞에 아무 말 없이 섰다. 하지만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향해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은 옆에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파-두난이 침묵을 깼다.
“추념식은 왜 ‘인간’들만을 위해 열릴까요? 대답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설 후인은 그가 왜 그같은 질문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쓰러져 피 흘리고 있는 병사 옆에서 하고 있는 양은 어떻게 보면 추념식과도 비슷했다. 추념식의 불은 없었지만, 슬픔과 애도가 넘쳐났다. 어제와 같았다, 어제 밤에도 아이는 분명히 자신만의 추념식을 했었다. 파 두난이 아이와,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병사를 보면서 꿈꾸는 듯 몽롱하게 말했다.
“몇년 전,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전장에 하루밤 꼬박 버려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군 동료들도 모두 전사한 탓에 구조의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전장의 밤은 춥습니다. 그 한기가 몸에서 생명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이죠…...그건…...인간이나 병사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에게 가혹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신음소리들과 죽음의 침묵 속에서 인간이든 병사든 모두 겁에 질려서 울부짖는데, 그 울부짖음마저 한기에 밀려 얼어붙습니다.”
말을 하는 파-두난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 눈은 앞이 아니라 그의 과거가 만든 어느 장면을 바라보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지 양 손으로 팔을 감쌌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다시 올라온 추위에 몸을 떠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 때 저는 어떤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죠. 하지만 분명 그건 추념식의 노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무도 부르는 사람은 없는데 노래 소리는 또렸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저는 거기서 군인들과 병사들의 영혼을 봤습니다. 네…...노래 소리를 따라, 전장 곳곳에서 조용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빛무리들을요. 그건 그들의 영혼이 분명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 형상을 한 작은 하얀 존재가 폐허가 된 전장을 조용히 훑어나가는 가운데, 병사들의 영혼이 작은 빛무리가 되어 반짝거리며 올라갔습니다. 그 많은 빛들이 병사들이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었겠습니까? 그날 저는 시신과 노래가 있는 의례적인 장례식이 아니라, 영혼이 노래 소리를 타고 저 하늘 어딘가로 올라 들어가는 진짜 추념식을 본 겁니다. 그것도 인간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아인인 ‘병사’들도 포함된 모두를 위한 추념식을요.”
그는 말을 하면서 아직도 그날 밤 빛무리의 흔적을 찾는 양 하늘 너머를 향해 먼 시선을 돌렸다. 설 후인은 그가 본 것이 실제였는지 환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든 ‘아인’이든 사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지금 이 로크랜드에서는 죽은 사실이다. 제정신을 가진 로크랜드 사람이라면 저런 생각을 안고 이 땅에서 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군인은 변명처럼 다시 말했다.
“의사는 제가 본 게 출혈에 따른 쇼크와 추위가 만든 환각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그리고 맞아야 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날 이후, 저는 인간과 병사들을 가르는 ‘규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을 물건처럼 다루고, 냉혹하게 전장에 내몰고, 죽어가는 그들을 팽개치면서도, 그들은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스스로는 도저히 예전처럼 단호하게 가지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신과 같은 ‘아인’들이 저같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저 별의 강이 아닌 이 땅에서 영원히 떠도는 존재라는 것도 스스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스우시겠지만 이제 제겐 누군가가 만들어 준 바보같지만 명확한 ‘규칙’만이, 인간인 저와, 인간이 아닌 병사를 구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가름대입니다.”
파-두난은 ‘숨’의 노래를 방해하는 것을 두려워라도 하듯 조용히 계속 말했다.
“지난 보름간 3천명의 인간과 아인들이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순례자님이시라면 그들 모두를 위해 추념식을 열어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죽어간 이들을 위한 추념식을요. 마치 저 아이가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아이가 일어섰다. 병사는 자신의 피를 머금은 땅 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듯 했다. 아이는 일어서기 전 숨이 끊어진 병사의 얼굴을 다시 한번 어루만졌다.
“혹시 아이가 순례자의 서약을 했습니까?”
파-두난은 천막 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두난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 슬픔을 누가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 따윈 저 아이에겐 적용되지 않겠군요. 저 병사에게 영혼이 있다면 아이에게 감사해 할 겁니다. 적어도 죽을 때 만큼은 사람으로서 애도해 줬으니까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나가듯 덧붙였다.
“그날 밤에도 저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바로 저 노래였습니다...”
“......”
설 후인은 눈을 감았다. 몸 안에서 아우성치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 그림자들을 내리누르고 그녀의 의무를 행할 때가 왔다.
“......내일 밤 추념식을 열어드리지요.”
“네?”
설 후인은 파-두난의 놀람에도 아랑곳 없이 차분했다.
“상부에 보고하지는 마십이오. 이건 제 독단으로 하는 것이니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이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의 진실을 알아야 할 때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최고재판소가 주는 순례자의 세례 없이 인간과 아인을 로크랜드 정보 순환 시스템에서 떼어내어 별의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는 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스스로 일어선 자’.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한 자. 스스로 궤도 엘리베이터를 오를 수 있는 자.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의 영혼을 로크랜드의 정보 순환 시스템이라는 주박에서 떼어내, 진정한 안식처인 별의 바다를 향해 장제선(葬第船)을 밀어줄 수 있는 자.
만약 아이가 정말로 ‘스스로 일어선 자’라면, 이제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 삼아 정말로 그러한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로크랜드를 휘감고 있는 영원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던 ‘순례자’의 마지막 의무였다. 그리고 ‘답’을 구하는 순례자로서 그녀가 ‘영창자’ 한 후해에게 받은 진실된 의무이기도 했다.
어느덧 오후로 넘어가는 낮의 햇살이 따갑게 그들의 머리 위로 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