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믿음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참된 진리를 분별하여 찾는 일이 필요함은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있고,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바울이 전하지 않았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어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하여 받게 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날처럼 참된 믿음에 대한
아무런 기준도 없이
십자가를 걸어둔 교회이면
다 교회라고 의심없이 생각하고,
그로부터 받은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것은
매우 해롭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예수가
잘못된 예수임을 알고 전하겠습니까 ?
자신들이 받은 영이 성령이 아닌
악령임을 알고 그 영을 받게 하겠습니까 ?
자신들이 알고 전하는 복음이
과연 문제있는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알고 전하는 복음은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진실된 것입니다.
마땅히 자신들이 아는 것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있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신들이 받아들인
옳은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들의 복음 잘못된 것임을 안다면
그들은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예수와 영, 그리고 복음의
기준을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두었습니다.
'우리가 전파한' 것만이
진실되고 참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만 알기로 했던 바울이
전파한 것과 같지 아니한
다른 예수과 영과 복음은 얼마나 많을까요?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각자마다 자신들이 확신한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그 가짓 수를 따져 본다면
기독교 진리를 믿었던 사람들의 수와
거의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는 하나인데 다른 예수들이
그처럼 많고, 성령은 하나인데
왜 다른 영들이 그처럼 많은 것일까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라는 진리는 같은데,
왜 그처럼 다양한 복음이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엡4:4,5)라고 말한 것은
단 하나의 믿음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따라 여러 믿음이 존재하는 것은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는 하나인데 다양한 믿음과
복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 또한 그 다양한 믿음 중에 하나를
가졌던 자였습니다.
몸과 성령과 주님과 믿음과
세례의 하나됨을 인정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로의 삶을 돌아보면
다른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자의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죽음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전부되심이 없는 믿음은
다 각기 다른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스스로 믿게 된 그 예수는
다른 예수입니다.
물론 성경이나 그로부터 나오는 용어나
기도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데 삶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각자의 자질과 사고에 맞도록
복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경과 같은 예수를 믿어도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이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존재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그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한 가족이라도 믿음이 다른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각자의 기질과 사고와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는데도
다른 말을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각자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성경을 보는데도
해석은 각자마다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각자가 취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박식한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보다 적게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복종해야 하지만
언제든지 자신보다 못한 부분이
상대에게서 발견되면
어느새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대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나타날 수 없도록
그에게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를 위하고 높이고자 하는 본성의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이 있는
십자가로 인도하셔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믿겠다고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존재의 죽음과 함께 부활을
경험하지 않으면
참 믿음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곧 부활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고전15:17)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으면
그가 가장 불쌍한 자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가 있어야만
믿음도, 그리스도와 죄사함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에 이를 때에만
믿음과 말씀과 성령과 그리스도와 세례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죽음과 부활에 이른 사람은
역사와 시대와 나라와 지역을 막론하고
같은 말을 하게 되고
같은 믿음과 성령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자들로서
형제가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눈빛만 보아도 상대를 알게 됩니다.
함께 성령의 다스림 받는
영이 같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 다르면
육신의 형제라도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영과 성령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을 받은 자는 가는 길이 같아도,
영이 다르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말과 생각과 삶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영끼리는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그리스도를 섬겨도
같은 세상의 영을 소유하고 있으면
비록 그 안에서도 영이 달라 다툼이
있을지라도 자기 영광을 향해 가는 길이
같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세상의 영을 각각
소유한 자들은 결코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아직 성령을 소유하지는 못했어도
성령을 받은 자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는 결코 함께 설 수도
있을 수도, 함께 멍에를 맬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잘도 용납한다고 비꼬아 말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속한 사람은
비록 복음으로 인도받고 있다 해도
세상에 속한 다른 믿음과 다른 복음을
더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쉽게 지고 갈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과연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질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의지를 버리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어떤 지식과 풍부한 경험에도
다른 예수와 다른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십자가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모두가 헛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자이십니다.
그에게 자신을 모두 드리십시오.
그랬을 때에 비로소 그를 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구원을 위해
그가 행하실 것입니다.
그를 주로 부르면서
자신이 주인행세하는
괴상망측한 일을 그치십시오.
그런 자들은 단 한 두 달만 믿음의 행위를
멈추어도 곧 자신이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렵고 좁아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가십시오.
그 길만이 희망입니다.
처음엔 꺼리지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자기 열정을 식히고
잠잠히 십자가 진리를 생각하십시오.
새로운 소망과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날 때에만
정상적인 한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16.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