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10장 5-11절
설교제목 : 두루마리를 먹으라
회심의 사건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주 박지영선생님의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위로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해양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바다 위에서 꽃잎과 함께 유골분이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바다로 퍼지는 유골가루 위에 갈매기 두 마리가 앉았습니다. 오래전 소천하신 아버님의 유골을 모셔와 함께 뿌리고 있는 것을 알기라고 한 듯 두 마리가 찾아왔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형상인 바Ba로 표현되는 것과 유사하게 새가 그곳에 깃들어 혼이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연출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 장면이 신기하여 지켜보는 이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 육신은 흙과 재로 돌아가지만, 그 혼은 비가시적인 실체로 하나님의 나라에 갔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입니다. 웨슬리는 의기양양하게 떠난 미국 조지아선교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이트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회심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일을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에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웨슬리를 가슴 따뜻하게 한 성령의 역사는 한 사람을 변화시켰고, 부패한 영국 사회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이런 웨슬리의 회심의 사건은 쓰라린 실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을 때 찾아온 것일 수 있습니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받아 드렸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죽음으로 대변된 신적인 대극의 갈등을 경험하도록 운명지워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Jung C.G : Symbolic Life, CW 18, para.1551.]
십자가의 대극을 짊어진 존재임을 알아차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정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잘못된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심이요,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회심입니다. 자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삶이나 세상의 인력에 이끌려 가는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길로 선회하는 것, 이것이 회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바라보는 것으로 방향전환, 궤도수정이 회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 가슴을 따뜻하게 변화시키고, 삶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회심이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는 자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의 환상에서 다섯 번째 나팔이 불 때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 무저갱)가 열리고 거기에서 연기가 나오면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이빨의 사자의 이빨에, 쇠로된 가슴막이와 전갈과 같은 꼬리로 사람들을 그 독으로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런 메뚜기 떼들은 모든 생명을 갉아먹고 권력과 아름다운 치장 뒤에 인간을 중독적이고 강박적으로 마비시키는 독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황폐화시키는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인 집단적 무의식의 콤플렉스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뿔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이 있었고,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놓으라 했습니다.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천사들이 거느리는 기마대가 이억이나 되는 엄청난 수로 사자의 머리를 하고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는 말들이 인간의 사람의 일을 죽였습니다(9:12-19). 제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메뚜기의 형상이 다양한 형상을 하듯이, 이 말들의 머리는 사자 같고 꼬리는 뱀과 같고 꼬리에 머리가 달린 모습을 지닌 것은 그 자체가 일관되고 통일된 형상이 아니라 분열적 형태를 통하여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요소임을 시사합니다. 대게 정신의 특성이 깨어지려 할 때 괴기한 형상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나디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9:20). 또한 그들은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9:21). 닥친 재앙에도 자신의 삶을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이전의 낡은 집단적 가치, 삶의 행태를 답습하였고, 자아의 욕망을 채우기에 부정한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변화, 회심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부분입니다. 자아의 계획과 탐욕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다면 자신의 왕국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왜 이런 엄청난 재난을 경험하고도 바뀌지 않는 것일까요? 그 재난을 주관적 경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재난의 실체를 객관화하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라는 엄청난 재난을 경험하고도 우리의 세계는 진정으로 이런 바이러스의 침입이 우리에게 불러온 사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오히려 이 세계는 더욱 더 지배욕에 시동을 걸며 으르렁거리며 물어뜯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저는 어머니의 최선이 아이에는 최악이 되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틀 속에서 아이에게 어머니의 정답을 요구하였던 것이라 했습니다. 진심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온전히 바라보지 않으면, 자신의 무의식적 기대를 상대에게 투사할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타자의 목소리에 경청하려 하지 않고 타자를 주시하지 않습니다. 자아의 무의식적 목소리만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이고, 타자를 향하여 그릇된 욕망을 투사하기 분주합니다. 이런 삶의 형태로는 변환은 불가능합니다. 타자와 이 세계의 목소리를 잘 경청했으면 합니다. 타자와 이 세계를 온전히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내 안에 영혼의 외침을 잘 경청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돌이켜야 할 때 돌이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두루마리를 먹으라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에 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천사의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두루마리를 펴서 들고 있었고, 오른발은 바다를 디디고, 왼발은 땅을 디디고 서 있었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을 때 일곱 천둥이 소리를 발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은 그 말을 기록하려고 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라고 했습니다. 그 천사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10:6-7)”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들려 온 음성이 요한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10:8)” 요한은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하니, 천사가 말합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10:9).”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먹는 것은 에스겔서 2장 8절-3장 4절에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두루마리를 먹는 과제는 예언자들의 전형적인 과제입니다.
천사는 왜 그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했을까요? 요한이 동화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 음식을 수용하고 동화시키는 것은 인간에게 중대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처음에 입에서 꿀같이 달지만, 일단 그것이 배에서 소화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쓰디씀이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 음식이 체화되는 것은 쓰디쓴 과정이 동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씩 꿈분석을 할 때 초기에 너무나 신기하고 매료되어 이것저것 맛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먹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씩 소화하고 체화할 때는 엄청난 고단함과 분투가 필요합니다. 개성화과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단어라 달게 삼키지만 일단 그것을 경험적으로 체화하려면 쓰디씀을 수반합니다.
그런데 먹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1절의 말씀에 보면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먹은 것을 발설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입은 수용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재료를 동화시키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표현하는 기관으로 창조적인 언어를 내뱉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이는 체험된 신성한 음식은 주위에 영향을 끼치며 발설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설교자에게 너무나 중대한 의미를 던집니다. 영적 음식을 먹고 체험된 그 자양분을 제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자를 넘어서 우리 모두가 영적이고 신성한 음식을 먹고 동화하여 체화된 말씀을 주변 세계에 발설하여 영향력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의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