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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0 강 주일설교
당신은 섬기는 자입니까?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는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3년 전, 2017년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라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여러 조사 중 비기독교인 1,000명에게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1위로 불교가 40.6%, 2위로 천주교가 37.6%, 3위로 개신교가 9.5%였습니다. 아마 지금 조사한다면 단 5%도 안 나올 것 같습니다. 서울의 한 학원에서는 학부형들이 기독교 강사를 내보내라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지금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수준이 아니라 거의 혐오하는수준에 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는 한마디로 기독인들이 섬김의 내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기복주의, 성공주의에 매몰되어 남을 돌아보지 못하고,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공주의에 매몰되어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바로 큰 자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높아지고자 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섬김의 종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인류구속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8,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가 언제였습니까?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때였습니다(마16:16). 이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하면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며 막았습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다시 모일 때에 말씀하셨습니다(마17:22). 이때는 비교적 간결하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러자 제자들은 매우 근심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세 번째,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게 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형판결권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 일만에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듣기 부담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그들이 반드시 듣고 영접해야만 하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말씀이지만 그들이 듣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면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상대방의 눈치만 보다가 전하지 못하고 결국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구원은 받지 못한 채 명목상 신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한다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이 영접하기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가르쳐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과거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예수님께 와서 물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이해가 가지 않으면 무리가 떠난 후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에 대해서는 모르면서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헤롯 독제정권을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19:28절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귀를 쫑끗 열고 몹시 흥분을 했을 것입니다. 곧 그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인사 청탁을 하게 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사촌관계였습니다. 그들은 친인척이라는 인간관계를 이용하기 위해 어머니를 동원해서 예수님의 좌우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인사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쓴 것은 수제자 베드로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같은 수제자 그룹이었지만 그들은 늘 베드로에게 밀렸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나서기를 잘하였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셨고, 장모가 아플 때는 따로 심방도 가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까지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베드로에게 2인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얼마 전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말씀을 반복해서하시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베드로가 먼저 된 것 같지만 얼마든지 나중 될 수 있어”하며 좀 야비하기는 해도 친인척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먼저 선수를 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예끼 이놈들”하며 당연히 혼을 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들이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쓴 것까지도 전혀 문제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영광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 위해서는 그들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실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할 수 있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아마 그들은 ‘고난의 잔’을 영광을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약간의 수고나 희생 정도로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만 주신다면 그 정도의 고생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이 비록 인간적인 야심에서 말했다 할지라도 그 대답을 하나님 앞에서 한 ‘믿음의 서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후에 야고보는 열 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행12:2), 요한은 사도들 중 가장 오랜 기간까지 남아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최후로 그는 밧모 섬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처럼 고난의 잔을 마신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요한과 야고보가 어머니를 통해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열 제자는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습니다. 열 제자들이 화를 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열 두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인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그동안 키워왔던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싸우고 있으니 …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참으시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며, 진정으로 큰 자는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따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한 것은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고관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집권자들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를 집권하여 권력을 부리던 일본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백성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습니다. 자리가 깡패라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라!’고 명령하면 아니 꼽더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같이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임의로 주관하고 다스리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는 달라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가?’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섬기는 자인가?’로 평가를 받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섬기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라면 그는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비록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지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론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섬김의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교회의 모습이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보도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론은 교회의 좋은 소식 보다는 부정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불법적으로 대물림하고, 함부로 막말하고,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곳으로 보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보도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변에서 겸손히 낮아져 섬기는 신앙인들을 접했더라면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교인들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세속화 되어 버려 맛을 잃은 소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세상의 영향을 받아 섬김의 자세를 잃어버린 것을 애통히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남을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가 어떻게 섬기는 자,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배울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8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한 문장으로 가장 잘 요약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섬김을 받는 것이 마땅하신 분이시지만 섬김 받기를 강하게 부인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큰 자가 되려면 먼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는‘자기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사랑 받고 높이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이는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품고 적극적으로 섬기려고 결단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단순히 식사를 대접하고 설거지를 해 주는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나보다 높이여기고 자신은 종의 자리에서 깍듯이 상대를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라고만 가르치지 않고 친히 섬기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인생들로부터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악 된 인생들을 섬기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생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죄인들을 정죄치 않으시고 품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고귀한 목숨까지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섬김과 희생 없이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영접하게 될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때 선교사이신 서서평(徐舒平) 선교사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입니다. 그녀는 독일 남부에서 미혼모 딸로 태어나 불우 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간호대를 입학 한 그녀는 친구를 따라 예배에 참석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에 큰 감명을 받고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자 결단합니다. 그리고 선교와 봉사활동을 통해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의료시설이 부족해 환자들이 길가에 버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조선의 죽어가는 병자들을 섬기기 위해 자원하여 20일 동안 배를 타고 조선에 왔습니다. 이때가 1912년 그녀의 나이 32세였습니다. 그리고 22년간을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가난한 여인들을 교육하고, 14명의 고아들을 자식으로 입양해서 섬겼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님과 같은 이런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희생과 섬김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런 섬김과 희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끝없이 경쟁하고 싸우고 다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새롭게 섬김의 종 예수님을 영접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있는 곳에서 낮아져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9-34절말씀은 지난 9:27-31절에 나온 말씀과 흡사합니다. 두 명의 소경이 주변의 만류에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와 눈을 뜬 내용은 비슷합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신 후에 이곳에 기록을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영적인 소경과 같은 제자들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현재 모습은 반복해서 십자가의 도리를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는가를 소경들을 통해서 보여주심으로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현재 영적 소경과 같은 제자들이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영적 소경임을 깨닫고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29절을 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여리고에서 떠나가실 때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이때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이때 무리가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그러자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그들은 제자들과 달리 자신들이 예수님께 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져 주셨습니다. 메시야의 긍휼과 자비의 손이 닿았을 때 그들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현재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소경처럼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을 때, 그리고 예수님께 “주여 우리의 눈을 뜨기를 원하나이다.”하며 자신의 소원을 아뢸 때 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감겨진 우리의 눈을 만져주십니다. 이때 영적인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소경들처럼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후에 가룟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준에 기초하여 섬기는 종의 자세를 가지고 교회와 이웃과 더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사실 섬기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나라에서도 크고 위대한 자로 여깁니다. 국민MC로 연애대상 최다 수상자이기도 한 유재석은 처음부터 인기를 받는 연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 연예계에 데뷔한 것은 ‘KBS 개그제’였습니다. 그때 그는 기대와 달리 장려상을 받게 되자 크게 실망을 합니다. 실망한 마음에 상을 받으러 내려올 때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으로 귀를 후비며 내려왔습니다. 그의 이 행동으로 인해 그는 많은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지적을 받습니다. 이때 유재석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유재석의 겸손과 섬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남을 높이려고 하고, 남이 보든 안보든 상관하지 않고 언제든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자신보다 남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언제나‘도우미’, ‘섬기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가 섬기는 자가 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는 어느새 국민 MC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땅에 떨어진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를 다시 높이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섬김의 자세를 회복하고 우리 주변과 이웃부터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뭇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고 이 시대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곳에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향력 있는 삶을 통해 바닥에 떨어진 기독교의 신뢰도를 회복하고 교회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