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3. 17;30 서초동
찬바람 휘 돌아치는 서초동 식당골목엔 냉기가 가득찼고,
불경기에 지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보며 걷는다.
여느 때 이 시간이면 휘황찬란한 불빛을 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갈 텐데
군데군데 간판불이 꺼져 어려움을 몸으로 말한다.
십년 넘게 단골로 들락거리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
항상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던 여직원이 없고 낯선 여인이 자리를 안내한다.
여기도 최저임금으로 고통을 받아 구조조정을 했는가,
손님은 꽤 많은 편인데, 오랜 기간 친숙했던 얼굴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괜히 심란해진다.
어제와 오늘 투병 중인 친구들과 통화를 하며 가슴이 많이 저렸지.
나도 이젠 본격적인 상실(喪失)의 세계에 들어온 모양이라
무엇을 얻기보다는 사라지고, 떠나고, 기억을 못하는 처지가 익숙해진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보다 친숙한 사람들 곁에 오래있고 싶은 심리는
누구나 다 비슷하다.
가까운 친구의 아픈 소식과 지인의 부음(訃音)을 받던지, 늘 보던 친숙한
얼굴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몇 날 며칠 신경이 쓰인다.
색사온(色思溫)이라,
표정 즉 낯빛은 항상 온화하게 가진 사람이 좋다.
은행의 영업점에서 근무하려면 업무실적도 중요하지만 친절을 수반한
고객만족이 상당한 position을 차지한다.
현역 지점장 시절 직원을 상대로 고객만족(customer satisfaction) 교육 시
무사고 운전자론을 많이 이야기 했다.
장기 무사고 운전 비결이란 "양보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이미 늦었다. 따라서
양보하려 마음먹기 전에 이미 양보가 되어 있어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친절도 마찬가지다.
친절하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해야 한다.
바쁜 와중에 힘이 들거나 싫더라도 나타내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사라진 빈자리가 오늘따라 더 커 보인다.
20;30
취객들로 시끄러워야 할 식당가 골목길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절간의
묵언수행(默言修行) 분위기를 연출한다.
찬바람 씽씽대는 골목을 벗어나 이층버스를 탄다.
한강 건너편 조망은 어스름하고, 얼어붙지 않은 강물엔 가로등불이 스며들어
바다의 윤슬처럼 반짝인다.
폰을 꺼내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메모를 하던 중 문자메시지 알림이 뜬다.
오늘은 또 누가 세상을 떠났을까.
휴! 다행이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잠시 명복을 빈다.
요즘 알림이나 대화는 카카오 톡을 거의 이용하고 문자메시지는 별로 이용을
안하기에 메시지 소리는 어김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訃音)뿐이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승사자가 다녀갔다고 농담을 하지만 매일 서너 번씩
들리는 소리는 유쾌한 소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애별리고와 원증회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미운 사람과 함께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애별리고(哀別離苦)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기에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 한다.
인간의 삶이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발생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 편하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또 이렇게 하루하루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타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간다.
인생도 그렇게 오고 가고, 사람도 사랑도 세월 속에 이렇게 오고 가는 게
신(神)이 주신 인간세상의 섭리(攝理)이리라.
2019. 2. 13. 늦은 밤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참 글 잘 쓴다. 잘 읽고 가네...
인간의 삶이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발생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영원히 살것 처럼
착각하고 사는 나의 삶을 되볼아보는 시간이었다
포르노 류선생의 지당한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