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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Croatia
11 문명과 자연이 만나는 곳, 크로아티아(6)-
네움 그리고 트로기르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땅이 나온다. 21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갖고 있는 보스니아 땅 네움, 이곳은 보스니아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닿아 있는 마을이다.
트로기르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로 로마와 베니치아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중세 도시이다. 9세기 비잔틴 세력과 12세기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일부가 되었던 곳이다.
아침이 밝었다. 식사를 하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는 로비에서 엘레나를 기다렸다. 엘레나가 나오기 10분 전에 내려와 차에 짐을 싣고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차에 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스플리트로 향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아침은 같은 장소라도 오후의 느낌과는 달랐다. 두브로브니크를 빠져나와 꼬불꼬불 가는 도로 운전을 하다가 한 잔씩 마시는 커피 맛이 좀 색다른 느낌이었다. 우리가 잠시 들렀다. 갈 곳은 네움이라는 휴게소이다. 약 한 시간 남짓 거리이다. 그곳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국경에 있는 휴게소이다. ‘네움’이라는 말은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네움이라는 휴게소를 아세요?”
“아뇨, 그런데 왜요?”하고 그녀는 되물었다.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요. 네움은 보스니아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닿아 있는 곳인데 아드리아 해에 면한 21.2킬로미터 길이의 해안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곳 슈퍼마켓과 레스토랑에서는 크로아티아와 주변지역의 토산품과 와인 등을 구입하기 좋고 가격도 저렴합니다. 와인 좋아하시죠? 그곳에 크로아티아 와인인 딩가치(Dingac), 뽀스트 업(Post Up) 그리고 화이트 와인인 뽀쉽(Posip)이 있죠. 이곳 와인은 크로아티아를 벗어나서는 구하기 힘든데 이 와인들이 맛이 좋습니다. 뽀쉽은 마르코 폴로 고향인 코르출라 섬에서 나온 화이트 와인으로 평균 12-13도 됩니다. 괜찮으시면 좀 사갈까 하구요. 우리가 마시거나 아니면 선물용으로도 괜찮습니다.”
꼬불꼬불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스톤(Ston)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저기 보세요. 스톤이라는 이정표 보이시죠?”하고 엘레나는 나를 보며 말하였다.
“네. 그런데 왜요?”
“스톤은 옛날 로마시대 이전부터 소금을 생산하였던 도시입니다. 유럽에서 아주 질 좋은 최고 순도를 자랑하는 소금을 생산하는 아주 오래된 염전이 있는 도시죠. 지금도 바다, 태양, 바람 등의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소금 생산을 한다는군요. 스톤은 첨가물이 전혀 없는 천연 소금으로 유명한데 아드리아 해 바닷물을 수로로 끌어 들여 전통 방식으로 질 높은 소금을 만든다고 하네요. 옛날부터 소금은 하얀 금으로 불리었다죠. 고대에는 소금 전쟁이 있을 만큼 중요하고 값어치 있던 것이죠.”
어느덧 우리는 네움 국경에 다다랐고 국경을 통과해 네움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켓에 들어가 이곳 크로아티아 와인인 딩가츠와 뽀쉽을 샀다. 우린 다시 또 크로아티아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이곳에서 국경을 통과해 다시 트로기르까지는 한 시간 남짓 소요된다.
차를 타고 국경을 통과하여 가는 동안 나는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크로아티아가 낙하산, 만년필, 넥타이, 수력발전소를 발명하고 만든 나라인 거 아시죠?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낙하산의 원리를 스케치 했지만 낙하산의 발명자로 파우스트 브란치치(Faust Brancic, 1551-1617)를 드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전하게 떨어질 수 있도록 범선에 쓰는 돛을 이용해 우산살처럼 끈을 만들어 현대의 낙하산의 원형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1595년 베네치아에서 실험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엘레나 씨 혹시 만년필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세요?”
“만년필을 발명한 사람은 워터맨 아닌가요?”
“에두아르 펜칼라(Eduard Penkala)라는 크로아티아 사람입니다. 그는 일종의 모세관 원리를 이용한 화학 펜을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력 발전소를 처음 만든 곳도 바로 이 나라죠. 물과 산이 많아서일까요? 그리고 현대의 많은 직장인들이 매일 매고 다니는 남성 소품의 완성이라는 넥타이가 바로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크라바트 즉 넥타이는 17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힘겹게 승리를 거둔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동맹국 군인들의 자축연에 참석한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맨 장방형의 천 조각이었습니다. 그들 크로아티아 군인의 무사 귀환을 위해 아내 혹은 애인들이 부적처럼 목에 걸어주었던 장방형의 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게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넥타이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때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불태워져 사라졌지만 영국으로 건너가 계속 유행을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직장인의 대명사처럼 된 것은 제이피 모건이라는 미국 은행에서부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행에서 직원을 뽑을 때 외모를 중시햇고 그때부터 퍼져 나가다가 아이비엠에 와서는 넥타이라는 것이 직장인의 상징처럼 된 것이죠.”
우리는 트로기르(Trogir)로 다가가고 있었다. 네움에서 트로기르까지는 한 시간 거리이다. 그리고 트로기르에서 스플리트까지는 28킬로미터, 차로 약 30분 거리이다.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둘이 하는 여행으로 바뀌어 여행하고 잇다. 엘레나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생각보다 발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역사를 이해하고 사물을 보는데도 남다른 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차창 밖을 보고 있는 엘레나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이곳 트로기르에 대해서 좀 아세요?”
“어떤 부분을 말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알지는 못하고 전혀 모른다고 하기도 좀 애매하네요.”
“그럼 아시는 것 좀 이야기해 주실래요?”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이곳 트로기르의 인구는 1,600명 정도이고, 스플리트에서 30분 거리로 서쪽으로 떨어진 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시오보(Ciovo)섬과 내륙 사이에 있는 작은 섬에 자리잡은 곳으로 유테스코 문화유산 도시인데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돌로 만든 도시라는 것이죠. 그리스, 로마,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곳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곳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른 유럽 도시도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이곳도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이 정착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로마의 주요 항구 도시로 발전하게 되죠.
이렇게 번영을 하다 4분(四分) 통치로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 후 고향인 스플리트로 돌아옵니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고향 스플리트와 그가 건설한 군사도시 살로나가 번창하게 되죠. 그 후 트로기르는 쇠퇴하게 됩니다.
“이곳은 그리스, 로마, 베네치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네요.”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엘레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이곳에 현재의 크로아티아인인 슬라브족이 이주해 온 게 언제인지 아세요?”
나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곳에 슬라브인이 이주해 온 것은 9세기 이후입니다. 슬라브인인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이주해오자 살로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도피처가 되면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 게 트로기르죠. 그리고 13세기 몽골인들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 헝가리의 벨라 4세가 이곳으로 피신한 적도 있고, 베네치아가 이곳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는 15세기인데 베네치아가 달마티아를 합병했을 때죠. 그러자 거기에 반대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죠. 그래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그때부터 베네치아의 긴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즉 1797년 베네치아가 몰락합니다. 하지만 트로기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1806년부터 1814년까지 잠깐 이곳을 점령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이곳이 본토에 귀속된 것은 언젭니까?”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엘레나와 나는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따라 트로기르로 향하고 있었다. 트로기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조그맣지만 구시가지는 미로와 같은 중세의 거리를 갖고 잇다. 많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거쳤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니 트로기르에 거의 다 왔다. 중부유럽에서도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고딕 양식의 복합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엘레나와 나는 차를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웠다. 거의 12시가 다 되었다. 점심을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인 듯하였다. 우선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주차장에서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 햇다. 내륙과 섬을 연결하는 학은 돌다리를 걸었다. 천천히 다리를 건너면서 구시가지로 향하였다.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본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많지 않다.
섬으로 들어서자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문이 하나 나왔다. 성의 북문이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손짓으로 문의 아치를 가리켰다.
“이 문이 북문입니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 오면 거의 이 문을 통해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북문은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리고 문 위를 보면 석상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석상이 누군지 아세요?”
“석상의 저 분은 트로기르에서 중요한 수호성인인 이반 오르시니 혹은 존 오르시니입니다. 존을 크로아티아에서는 이반이라 부릅니다. 그는 이곳 주교님이셨고 아주 오래전 12세기에 이곳에서 사셨습니다. 후에 성인 반열에 오르셨지요. 이 마을의 수호성인입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섬 안으로 들어갔다. 섬은 동서로 800미터이고 남북으로는 300미터이다. 크지 않은 이 섬은 인공 섬이다.
나는 북문으로 들어가면서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트로기르는 크로아티아에서 오래된 해변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 도시는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프랑스의 마르세요, 니스, 흑해 연안의 도시 등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도 그리스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적들로부터 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반도였던 이곳에 운하를 파서 본토와 분리시킵니다. 이 인공 섬은 매우 작고 지대가 낮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밀물 때 집이 해수에 침수되는 경우가 불행하게도 가끔씩 생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베니치아의 밀물현상이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엘레나와 나는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식당, 호텔 그리고 기념품 가게 등이 있었다.
엘레나는 나에게 “토로기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나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대답하였다.
엘레나가 나에게 설명하였다.
“원래 이곳은 그리스어로 트라구리온이라 불렀습니다. 염소 언덕이란 뜻이죠. 달마티아 지역의 마을 중에는 염소와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대 이쪽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염소와 양을 많이 키웠답니다. 트로기르란 지금 이름은 옛 그리스 이름 트라구리온이 크로아티아어로 변형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섬은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의 대부분의 집들은 14-15세기에 만들어진 겁니다. 섬의 서쪽 지역은 귀족들이 살았던 곳이랍니다. 그래서 각 집의 대문에 가문 문장이 있는 곳이 많이 있지요. 달마티아의 다른 집처럼 이곳의 거의 모든 집들은 석회암으로 지어졌는데 전체 크로아티아 해변도시에서는 거의 석회암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 역시 그 지역 석회암으로 지어진 겁니다.”
엘레나의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어떻게 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하고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엘레나와 나는 들어왔던 반대편 해안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구시가지를 보기로 하였다. 좁은 골목을 따라 나갔다.
조그만 골목길을 걷고 있는 것이 누군가와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골목을 거의 빠져나갈 때 쯤 있는 성당을 보면서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이 조그만 섬 안에 성당이 열세 개나 된답니다. 여기 이 성당은 가르멜 성모 성당이라고 하는데요, 일 년에 한두 번만 미사를 드린다는군요. 이 섬에는 몇 천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성당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섬에는 도미니크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 이렇게 두 개의 수도원이 있습니다.”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우리가 처음 들어온 곳은 북문이고 가로질러 나왔으니 이곳은 섬의 남쪽이다.
“저 앞의 큰 섬은 치오보라 불리는 섬인데 본토와 이 작은 섬 그리고 저 큰 섬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리가 총 세 개입니다. 우리가 건넌 다리는 스톤 브리지 즉 돌다리, 그리고 그 옆에 북쪽으로 나무 다리 그리고 이 섬과 큰 섬을 연결하는 다리 이렇게 세 개입니다. 치오보 섬엔 요트클럽, 그 근처엔 작은 조선소도 있답니다. 그 옆에 멋진 호텔이 하나 들어설 거라는군요. 저 치오보 섬 서편으로 베네치아가 축조한 요새가 보입니다. 카메르 렝고라고 부르며 15세기 것이죠. 도미니크 수도원 하나가 그 섬 안에 있는데 그 큰 수도원에 수도사 한 분이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17세기부터 수도원으로 사용했다는군요.”
엘레나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자연스럽게 남문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구시가지의 모습이 베네치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고 엘레나에게 물었다.
엘레나는 “그렇군요. 아무래도 그들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기 때문 아닐까요?”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갓다.
“트로기르는 15세기 전까지는 크로아티아 왕이나 군주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 이후 18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은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지요. 그래서 구시가지의 모습이 베네치아를 연상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 짧지만 나폴레옹, 다음에 다시 오스트리아, 1919년부터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었습니다. 1919년 트로기르와 스플리트는 단 한 번 공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두브로브니크가 당한 공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더군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전쟁의 흔적을 찾긴 힘들다고 합니다.”
앞쪽으로 트로기르의 성벽이 보였다. 나는 엘레나에게 성벽을 가리켰다.
“트로기르의 옛 도시 성벽입니다. 이 성벽은 원래 이 섬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침략 때 프랑스 군대가 대부분의 성벽을 파괴했습니다. 16세기에 지어진 성벽입니다.”
우리는 남문에 도착하였다.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이건 작은 대기실이랄까, 이탈리아어 그대로 로자라고 불렀는데요. 16세기 것입니다. 이 로자는 중세 때 사람들이 구시가지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했던 곳입니다. 중세 땐 외지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행진하듯이 그냥 막 들어갈 수 없었죠. 또한 이곳은 저녁에 늦게 오는 사람이 잠을 청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6시쯤 마지막 저녁 종을 울린 후 트로기르 안으로 들어가는 이 중앙문은 닫혔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잠을 자야했다는군요.”
엘레나와 나는 남문을 통해 들어가 트로기르의 주 광장으로 갔다.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이다. 성문을 통과하면서 보이는 오른편에 있는 건물은 성 니콜라스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원래는 베네딕트 수도회 건물이었다. 현재 여섯 분의 수녀님들이 머물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성 니콜라스 성당을 가리키며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성 니콜라스는 선원들의 수호성인이죠. 트로기르의 거의 모든 집안에는 선원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곳에 기부를 많이 했지요. 그래서 이 성당은 카이로스라 불리는 유명한 아트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라 불리는 그리스의 젊은 신을 조각한 그리스 작품이 가장 유명한데요.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죠.”
엘레나와 나는 중앙광장에 왔다. 이 광장의 이름은 요한 바오로 2세 광장 혹은 나르도니 광장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티칸의 전전 교황님, 그 분의 이름을 따서 이 광장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나는 남쪽을 가리키며 엘레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저기 남쪽에 있는 로자를 보세요. 이 로자는 15세기 것입니다. 정의의 마당이라고 불리죠. 안을 보면 재판과느이 탁자가 있고요. 저기 위쪽으로 보면 정의의 상징인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으로는 트로기르의 중요한 성인들이 계십니다. 왼쪽은 북문에서 봤던 성 이반 오르시니입니다. 그는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수호성인입니다. 그래서 도시모형을 손에 들고 계시죠. 그리고 오른쪽은 성 로베로 입니다. 크로아티아 이름으로는 로렌스입니다. 이 성당이 성 로렌스에게 봉헌된 성당입니다. 두 성인 사이에 빈 공간이 보이죠? 원래 베네치아의 상징이며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상이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이라 오해하여 사자상을 파괴했답니다.
남쪽에 기마상이 보이지요? 중요한 분이고 트로기르 시민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마상 오른편에 쓰여 있듯이 페타르 페르슬라비치입니다. 그는 원래 주교였습니다만 오스만 투르크 군과의 전투 때문에 유명하답니다. 16세기에 전사했지요. 이 부조는 크로아티아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인 이반 메스트로비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로자 옆의 시계탑이 있는 성당은 성 세바스티안에 봉헌된 성당입니다. 그의 모습이 정문에 있습니다. 15세기 때 피렌체 니콜라스 작품입니다. 세바스티안은 원래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군인이었는데 크리스천이 되었고 그 죄목으로 다른 군사들의 활에 순교당했답니다. 이 성당은 15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성당이라기보다는 기념관입니다. 문 열었을 때 들어가 보면 1990년대 세르비아와의 4년 전쟁 때 전사한 트로기르의 젊은 군인들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 건물은 시청이고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광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 로렌스 성당이겠죠. 메인 성당인 이 성당은 성 로렌스에 봉헌된 성당입니다. 몇 세기에 지어졌는지 말하기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당은 400년 이상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12세기에 짓기 시작해서 16세기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당 안팎으로 서로 다른 양식이 혼재해 있습니다. 하지만 주된 양식은 로마네스크입니다. 종탑을 보면 여러 가지 양식을 볼 수 있는데 0층은 로마네스크, 1층은 고딕양식, 2층은 베네치아 양식입니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이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글쎄요?” 하고 엘레나는 짧게 대답하였다. 광장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부분은 정문입니다. 여기 밖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라도반의 정문이라 불립니다.”
“라도반의 정문?”
“라도반이란 이름을 가진 장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13세기초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보고 잇는 정문 중 가장 큰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달마티아에서 로마네스트 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 지중해 지역에서는 성당 문에 사자가 자주 보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두 마리의 사자가 보이는데요. 저 사자는 베네치아 사자가 아닙니다. 베네치아의 상징이 사자인 거 아시죠? 예전에 사람들은 사자는 두 눈을 뜬 채로 잠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당 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사자 위의 오른쪽은 아담, 왼쪽은 이브입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위를 보라고 하였다.
“높이 올려다보면 로브로의 작품인 성 로렌스의 상이 보입니다. 위쪽에는 성경에 나오는 분들의 조각이 보이고요. 가장 유명한 부분은 중앙 아치 부분입니다. 중앙 아치 부분에는 각 달의 12궁도에 맞춰서 풍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럽의 많은 성당에서 볼 수 있죠.
사실 우리는 위쪽의 여섯 개 달만 보이지요. 중앙 아치의 왼편 12월부터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돼지를 도살하고 있는 그 위에 소시지를 굽고 있는 사람은 1월, 사다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2월, 포도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3월, 그리고 반대편 아래로 3월이 다시 보이고, 그 위 양털을 깎는 4월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상행활을 나타낸 것이죠. 이것이 전체 정문 작품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13세기 초반의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 아주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성당 앞 광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더 많으 ㄴ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당을 나와 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식당은 골목 안에 있는 조그만 식당이었다. 식사 후 다시 북문으로 향하였고 돌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걸어갓다. 30분 거리의 스플리트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