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영광의 부상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며 잠을 청했으나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환국은 일어나 앉았다. 담배를 붙여물고 보다만 화집을 끌어당겨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들여다본다. 현란한 꿈 같은 색채의 세계,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을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은 느끼는 것이었다. 친구 중에는 례술 자체에 대한 것보다 시인 에세닌과 무희 덩컨과의 연애에 흥미를 갖듯, 칸딘스키와 니니아의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환국은 어쩐지 그것이 역겨웠다. 속물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여전히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밤은 깊어가는데, 캔버스 앞에 서본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쳐보듯 서 있다가 나이프로 물감을 이겨 캔버스에 찍어 발라본다. 오랫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 결국 새벽녘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환국은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에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밤을 꼬박 지샐 뻔했다. 장지문을 열여진 채, 복도 너머 유리문이 열려진 채였고, 모기향은 모두 재가 되어 토막토막 접시에 떨어져 있었다. 뒤뜰은 여남은 평쯤 될는지, 하숙집 노인이 잘 가꾼 수목은 싱싱했다. 이끼 낀 돌도 파아랗게 살아나 시원해 보였다. 수목에 맺힌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이곤 한다. 비가 멎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받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들려왔다.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환국은 담배를 붙여물면서 재떨이를 끌어당긴다. 계속 뭔가에 의해 강타를 당하는 느낌이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다!'
형용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치민다. 이성으로는 다스려지지않는, 왜 그런가조차 알 ㅜ 없는 기분이다. 이 팔 놔요, 그것은 결코 유인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인실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환국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 끔찍한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인실의 임신과 관계가 있었다. 이 팔 놔요, 비정한 그 목소리는 임신에 얽힌 어떤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추적, 그럼에도 불루하고 환국은 궁금증이나 걱정보다 강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실아주머니의 배가 불러야 했나!'
인실은 결혼을 해도 안 될 사람이요, 아이를 낳아서도 안 될 사람처럼, 그것을 기정사실이었던 것처럼, 신성불가침의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환국의 그것이 깨어지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풋사랑이라고나 할까, 청춘의 상흔이라고 해야 할까, 양소림의 모습과 손등의 그 혹은 연민과 혐오감가 자책감으로 환국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있다. 박외과 의원에 있던 허정윤과 결혼하여 딸인지 아들인지 아이들 낳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양소림은 생각할 때마다 환국은 지금도 썩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다. 사랑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고 자기 감정에 확신도 없는 채 소림의 불구를 목격했다는 것은, 그리고 혐오감과 함께 가책과 연민 때문에 갈등했었던 기억이 환국의 청춘을 조금은 병적으로 물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양소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명의 여성, 환국의 의식 빝바닥에는 어머니인 서희와 임명희, 유인실, 이 빼어난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서희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혈육으로서 보다 밀착된 감정이었지만 임정희와 유인실은 타인이면서, 타인이기 때문에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 때문에 오히려 수수께끼 같았으며 신기루와 같이,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다!'
배가 부른 모습, 삭막한 얼굴,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 어젯밤에 우동집에서 만난 인실은 쉬르레알리즘의 그림같이 괴이학고 비현실적이며 먼 피안에 서있는 목각인형 같기도 했다. 만난 그 순간보다 헤어진 뒤, 그 만남을 상기할 때 도무지 그것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다시 시작해 본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었다. 이 팔 놔요, 하던 타인의 목소리와 임산부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환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빠르게 이불을 개겨놓고 밖에 나가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사이상 식사는 어쩌실래요?"
하녀 오하츠가 와서 물었다. 머리에 빗질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본다.
"벌써 이렇게 됐나 열한시가 지났어."
"잠꾸러기."
오하츠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환국의 나이 또래, 낯빛은 검고 동그란 눈에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그런 말 말아요. 새벽녘에 잠이 들었거든."
"그래요? 난 그때 일어나 있었어요,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굉장히 무서웠어요."
"왜?"
"하늘이 우르르 쾅쾅, 번개가 번쩍번쩍."
"어떡한다?"
"뭘요?"
"열한시에 아침 먹기도 뭣하고 기다렸다가 점심이나 먹지 뭐."
"그래요? 그럼 그럭하세요."
오하츠는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환국은 휴지로 빗을 닦아 서랍속에 넣고 복도로 나온다. 소나무 밑둥 가까운 곳에 함지만한 크기의 앙증스런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둘레에 이끼 낀 작은 정원석을 배치하고 곰상스럽게 만들어놓은 연못을 소일거리가 없는 이 집 노인의 손장난이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이게 무슨 자리지?'
인실과의 만남은 그렇다 치고 요즘 환국의 주변 사정은 어젯밤일에 못지 않게 우울한 것이었다. 우울한 정도를 지나 어떤 위기일식으로 환국에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가정부의 이름으로 거금을 강탈해간 진주의 사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윤국이와 마찬가지로 환국은 부친이 관련됐을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환국은 윤국이처럼 피가 끓었다기보다 부친은 연상한 그 의식 자체에 깊은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부친을 연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위험 인물로 인식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경찰관의 취조를 받게 된다면, 아니 그보다 고문을 당한다면? 고문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환국은 견디어낼 용기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것은 자기 심중이 노출 되지 않을까 그것이었고 저도 모르게 취조하는 상대가 자기 심증을 포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자기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과 그 사건이 끝내 미궁으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소망, 지나치게 경계하는 그런 심리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환국의 긴장을 자중하게 했다. 신간회해산, 예맹검거, 최근에 있었던 중국인 습격 사건 등,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동경에서 바라보는 환국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고, 뭔지 모르지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게 했던 것이다.
방학이었지만 환국이 동경에 남아 있는 것은 부친 길상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쪽 사정이 복잡하니까 돌아올 것 없고 대신 송영광을 찾으라는 인현의 전갈이 있었다. 지난 초봄, 그 사건이 있기 직전에 환국은 동경으로 왔다. 떠나올 때 부친은 송영광을 찾으라는 당부를 했다. 분위기를 보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는데도 또다시 전갈을 받고 보니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송영광이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국은 송관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송관수가 진주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형평사운동, 과거 의병으로 산에 들어간 일, 남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다 안다. 그러나 환국은 형평사운동이 관수가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하튼 부친이 시키는 대로 환국은 고향으로 가지 않았는데 돌아가지 않을 외적 구실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동안 환국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지난 좀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목적이나 선택의 변경에서 오는 준비라 해도 좋고, 화구를 메고 교외로 나다니며 스케치는 하는 행위, 하고 싶어서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방학을 이용해 한다는 구실도 되는 것이다. 미술학교로 옮기게 된 데는 부친 길상의 도움이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려면 자유업을 가지는 게 유리하지요. 행동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거구, 내기분을 만일 환국이가 망설이고 있다면 용기를 주고 권하고 싶을 정도요. 소질이 있는 것도 다행이며 마음을 굳힌 모양이라 당신도 응낙하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그 아이는 이 집을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는 거요. 조만간, 우리 민족에게 급박한 사태가 밀려올 것이오, 앞으로 세상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변할 것인즉, 그 점을 명심해야 하오. 솔직한 내 시점을 말하자면 환국의 일본 유학, 그것이 마땅치 않소. 환국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했어야. 당신이 그 점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은 알지만."
결국 서희는 길상에게 설득당한 듯했으나, 그러나 서희는 자기마음속에서 납득을 하지 않는 한 굽힐 여자는 아니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자유업이란 말을 다소 효력이 있었고 중국 유학 운운은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서희는 환국의 결심히 확도하다는 것을 았았다. 확고한 것이라면 반대는 모자간 서로 상처를 남기는 결과밖에 되지 못한다. 서희는 자기 고집을 꺾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설득당하기보다 남편에게 설득당했다는 편이 어미로서 위신의 훼손도 없을 것인즉, 길상도 모르지는 않았다. 서희가 남편에게 복종하여 고집을 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상은 서희의 현명함을 믿었고 꺾이지 않는 성품을 사랑했다. 그의 인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환국은 큰 마찰없이 숙원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앞날의 방향이 달라졌다 하여 환국의 유학 생활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동안 그는 계속 하여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법서대신 미술에 관한 서적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정도였다. 노부부가 사는 조촐한 하숙집, 그것도 하나래(별채)여서 거처는 늘 조용했고 쓰는 공간도 뒤뜰을 합하여 넓은 현이며 아틀리에는 아닐지라고 불편한 것은 없었다.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노부부는 사족출신으로 상당한 교양이 있었으며 가족 관계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허전하여 한 사람쯤 하숙생을 둔자를 취지였으므로 환국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잘생기고 점잖으며 예의바르고 깔끔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하며 노부부는 졸업할 때까지 있어달라오히려 부탁을 했다. 동경에서의 환국의 신변은 단순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문제는 진주에 있었고 영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경에 오면서부터 부산 P보고 출신의 유학생을 만나 수소문했다. 그들의 소개로 다른 대학, 혹은 전문학교에 있는 P보고 출신도 만났다. 그러나 영광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숫제 송영광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환국은 초조했다. 자신이 없어졌다. 동경 넓은 바닥에서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 가 김성방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 것을 깨달았다. 과연 그는 동경에 있는가, 그것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름쯤 됐는지 환국은 화구를 메오 다마가와강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말 좀 물겠는데."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조선말이었다.
"혹시 최환국이 아닌지요?"
상고머리에 신색이 그리 좋아 뵈지 않는 중키의 청년이었다.
"그렇소만……"
청년은 갑자기 활기에 넘친 표정이 되어
"나 김수봉이다!"
"……?"
"모르겠나? 보통학교를 오학년까지 같이 댕긴 김수봉, 알겠지?"
"아아, 아!"
"알겠지?"
"그래 그렇구나! 맞아, 김수봉이다.!"
"겨우 알아보네."
활기찼던 표정이 갑자기 시들면서 서운해하는 기색은 나타내었다. 그러나 환국은 반가웠다.
"하기야 뭐, 자네하고 나하고는 처지가 다르니깐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모르고 지나쳐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래 여기는 언제 왔나?"
"아마 자네하고 비슷한 시게에 왔을 거다."
서운해한 것을 넘어서 김수봉 얼굴에 비애 같은 것이 서린다. 환국은 그것을 느꼈다.
"뭘 하나 지금?"
"……"
"학교에 다니나?"
"학교? 청강생을 학생이라 할 수 있는지, 하기는 처세상 학생이라하긴 하지. 하하핫핫…… 하하하"
비애는 무산되고 김수봉은 쾌할하게 웃었다.
"하여간에 반갑다. 어디 가서 쉬면서 얘기하자."
"그랬으면 좋겠는데 글세……"
머뭇거린다.
"일행이 있어서 오늘은 그만, 다음에 만나지 뭐."
김수봉은 뒤돌아보았다. 환국이도 그의 시건을 따라 수봉의 등뒤를 바라보았으나 일행이라 할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질 않았다. 높은 하늘에 구름만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기슭에 하얀 물새만 몇 마리 머물고 있었다.
"일행도 함께 가면 될 거 아닌가?"
"아니,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애인하고 함께 왔어?"
환국은 웃으며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수봉도 픽 웃었다.
"그럼 잠깐 기다리게."
환국은 수첩을 꺼내어 재빠르게 자기 하숙집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수첩에서 적은 것을 뿍 찢어 김수봉에게 내밀었다.
"이거 내 있는 곳 주소야."
수봉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보다 밖에서 한번 만나자. 만날 날짜를 약속해서."
"그럴까?"
"언제면 좋겠나?"
"오늘이 일요일이니깐 내일말고…… 수요일이면."
"나는 언제든지 좋다. 방학이니까."
"참 방학인데, 왜 안 갔나?"
"볼일이 좀 있어서."
시간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환국은 김수봉과 헤어졌다. 그와 헤어져서 한참 지난 후 환국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진작 그 생각을 왜 못했다!'
수봉이 부산 P고보와 관련이 있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보통학교 오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해간 김수봉은 그 후 P고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수요일에 만날 건데 뭐.'
그러나 불안하고 초초했다. 손안에 든 물고기를 놓친 그런 기분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도 되는 것인지, 사정에 의해 그가 못 올 경우, 명심코 주소를 들고 그가 만나러 오지 않는 한 환국은 김수봉을 찾아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영광이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가 그를 뒤쫒고 이쓴 만큼 어떤 강박과도 같은 심리, 그러나 설사 김수봉은 만난나 하더라도 수봉이 영광을 알고 있고 영광을 찾을 단서를 갖고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약속된 날 약속되 시간까지 환국은 초조해 있었다. 그런데 김수봉은 송영광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식을 왜 찾으려 하나?"
"그 사람 부친하고 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한동네서 자랐거든."
"그거야 뭐 흔히 있는 일 아닌가."
"그런데 영광이 그 사람 부친께서 날 찾아오셨다. 꼭 만나서 전해달라 하시면서 돈을 주시더군."
환국은 신중하게 부친이 개입되지 않는 선에서 말하는 것이었고 수봉은 뭔지 모르지만 심각한 표정이다.
"돈만이라면 자네편에 보내도 되겠으나 그분 말씀이 꼭 만나라,아주 간곡한 부탁을 하셨기에."
"하기는, 왜 안 그러겠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엉망이다."
하면서 수봉은 영광과의 관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광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서로 아는 사이다. 우리가 진주 있을 때 이웃에 살았거든. 그래서 집안 내력도 잘 아는데, 부산으로 이사 간 후 다시 영광이를 만난 것은 고보 삼학년 때, 그 자식은 일학년이었고, 영광이네 집은 부산 온 후 수도 없이 이사를 한 모양이고. 옛날의 알음으로 우리집에 세들어서 한 일 년 남짓 살았다. 처음 부산에 와씅ㄹ 떄는 점방도 장만하고 집도 있고 괜찮게 살았다 했는데, 영광이 아부지가 자네도 알겠지만 왜경에게 쫒기는 몸이고 보니…… 영광이하고 나하고 학년 차이는 있으나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없다. 아마 자네하고는 동갑일 게다. 고보에 늦게 들어왔고 또 무슨 일 때문인지 일 년을 구워먹었다 하고, 그나마 제대로 했으면 금년에는 졸업을 했을 텐데…… 온통 망가져버렸다. 사람될까 싶지도 않고."
환국은 여러 가지 생각을 머리속에 굴리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 침착한 상태로 돌아가서 수봉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나도 집안 형편이 뭐 그렇고 그런 정도라서 대학 간다는 것은 바랄 수 없고 집에서는 졸업한 뒤 금융 조합에 취직해서 장가나 가라, 그러나 무턱대놓고 배를 탔지. 설마 무슨 수가 없을라구, 혈기만 믿었다. 말도 마라. 참말로 말도 마라. 조선서 고보 출신이면 그래도 괜찮다고들 하는데 일본서는 인간 쓰레기다. 조선서는 왜놈 종질한다고 손가락질하던 반도〔고참 점원 혹은 책임자〕는커녕 고조〔심부름꾼〕자리 하나 내주는 줄 아나? 노동밖에는 할 게 없다. 공사판에서 벽돌 지고 모래 나르고 그나마 풀발선 오야지를 만나야 일거리도 없어 걸리고 품삯도 제대로 받지. 일본서 조선 놈은 사람이 아니다. 쓰레기지. 영국놈이 중국에 와서 저희들 술집에 중국인과 파리는 사양한다 그랬다지만."
"돌아가지. 돌아가아."
"오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지금도 공사판에 나간다 그 말인가?"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에키야〔화원〕에 있었지.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는데, 하기는 공사판도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지만, 지금은 고물장수다."
"구즈히로이(쓰레기 줍는 것)란 말인가?"
"아니, 제대로 차리고 다니면서 고맨구다사이(실례합니다), 고맨구다사이."
하다가 수봉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오면 쓰지 않는 것 팔아라, 그거지."
"그래, 그 편이 낫던가?"
"났지, 좀 유식하다는 게 밑천이 되고 동정도 받고,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스러우니까. 비굴해질 때도 많지만 누가 하라 마라 그런 소리는 안 듣지, 공사판에 모여드는 인종이라는 게, 그게 별의별 게다 있거던. 걸핏하면 아이쿠치 뽑아들고 생사를 겨루는가 하면 경찰의 끄나풀이 있고 아나키스트 공산당이 있고 밥만 먹여주고 임금을 몽땅 말아올리는 조직도 있고, 노동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땜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판에서도 인종 차별, 지역적 감정, 인간이란 참말이지 어디까지 사악하고 악독한지 바닥을 모르겠어. 젊은 날의 꿈이라는 거, 그거 물거품보다 더 허망한 것이더라. 이 세상에 달콤한 것은 없다. 어디로 가나 그것은 없어."
"그러면 돌아가아. 나 자신도 그래. 부모님 덕분에 유학이랍시고 와 있지만 허송셍월이야."
"안 돌아갈 거다. 청운의 뜻, 그 따위 어리석고 낭만적인 것, 이미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의 과정이다. 나, 나는 백기 들고 돌아가지는 않는다."
들고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건 자네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인 것인가?"
"실은 어느것인지 나도 몰라. 어쩌면 무작정 그럴 거다. 자네는 허송세월이라, 자네다운 말이지. 하지만 여기 와 있는 몇몇 동창들은 그렇지 않아. 판검사, 고등관, 그걸 잡은 듯 안하무인이다. 개새끼들! 왜놈한테 발발 기면서 동족에게는 거만스럽게, 정말이지 테러라도 하고 싶은 심정 알겠나? 자넨 모를 거다."
"더러 그런 사람도 있겠지. 자네가 그런 처지라면 어찌겠나?"
수봉은 말문이 막힌 듯 환국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환국이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공산주의 한다 하고 사회주의 한다 하고 껍적거리는 놈들, 날 만나면 피해간다. 손 벌릴까 깊어. 그라고 내 행색이 초라하니까 그러는 거지. 참말로 사람 웃기는 거는 가시나들 끼고 댕기면서 천석지기 만석지기 부잣집 아들놈들 떨어진 내복 안 입고 카페 가서 고급술 마시면서 공산주의 한다는 거지. 허참."
"그러면 나도 할말이 없다. 그는 그렇고 송영광이 그 사람의 근항에 대해서 얘기해주게."
"그간의 사정은 알고 있나? 그러니까 조선에서 있었던 일."
"자세히는."
"그럼 그 일에 대해서는 말 안 하겠다. 그러니까 작년 늦은 여름이던가? 집에서 주소를 얻어 영광이가 날 찾아왔더라.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면서, 꼴은 말이 아니고, 역전에서 왜놈하고 쌈박질을 했던 모양이라 유치장에서 하룻밤 잤다 하는데 이마에는 피멍이 들고, 원래 그 자식 성직이 과격하거든. 도둑질을 하든 강도질을 하든 조선에는 안 돌아간다 하길래 졸업을 눈앞에 두고 뛰쳐나온 심정을 모르지는 않으나 경솔했다고 나무랐지. 했더니 형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 뛰쳐나온 게 아니고 퇴학을 당했는데 어쩔 것이냐 하며 악을 쓰더라구. 하여간에 골치가 아프게 돼 있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훤하게 잘생긴 놈이, 자네가 만나보면 그놈 지식 상태가 어떤지 알게 될 거다. 측은한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때는 지긋지긋해."
"하여간에 만나봐야겠네. 지금이라도."
"지금은 안 돼."
"왜?"
"여기 없다."
"뭐? 어디 갔는데!"
"관서 지방에 일 나갔다."
"일 나가다니?"
"노가다지 뭐. 전에 알던 오야지한테 붙여주었는데, 글쎄 얼마나 갈란지. 나하고 고물장사도 할 수 있고 전에 있던 우에키야에 말해 줄 수도 있지만, 그놈 자식 성질 꽉 죽어야, 세상살이가 어떤 건지 알아야 그래야 제 명대로 살거다."
환국은 아직 송영광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광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닐 때의 초조함과는 달리 이제는 영광과의 대면을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순순히 이쪽 호의를 받아줄 것인지, 상처투성이의 젊은 그가 어느 면으로 보나 우월해 뵈는 환국을 반발 없이 대해줄 것인지 그것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사길 환국은 미리부터 그것은 느끼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환국은 노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점심상에 그들과 환국은 마주않았다. 오하츠가 시중을 들었다.
"사이상 웬일이지?"
"네?"
환국은 아리요시노인의 노처 오시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감색에 흰 무늬가 있는 가수리(붓으로 살짝 스친 것 같은 잔 무늬가 있는 천)의 기모노를 단정하게 입은 오시마는 미소를 지으며,
"전에 없이 늦잠을 자고, 그것도 아마 열한시까지 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젯밤, 새벽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사내자식이 네모 반듯한 것도 좋은 건 아니지. 더러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고, 사이는 너무 얌전해."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칠심을 바라보는 노부부, 아리요시 노인은 깡마르고 안경을 썼고 오시마는 다소 비대했으나 흉하지 않을 정도 깨끗하게 늙은 양주였고 건강한 것 같았다.
"여보, 그렇지도 않아요. 사이상은 술도 마시는 눈치예요. 담배도 피고."
오시마는 영감이 환국을 비판한다 생각했는지 열심히 변호하는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술 마시는 건 비밀이었는데 오하츠가 일러바쳤군요."
"일러바쳤다기보다."
오하츠가 변명하려 하자
"오하츠, 걱정할 것 없다. 사이가 술을 마신다니까 한결 맘이 놓이는 구나."
아리요시 노인의 말에 모두 웃는다.
"여보!"
"무슨 항의가 또 남아 있소?"
아리요시 노인은 오싱코(소금에 절인 배추에 왜간장을 친 것)를사각사각 씹으며 노처를 바라본다.
"그게 아닙니다. 사이상은 우리 다미오를 많이 닮았어요. 당신은 그리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 눈에는 사이가 다미오 같은 추남으로 보인니까? 큰일났군."
"그건 너무 심합니다. 우리 다미오도 그만하며 괜찮지요. 사이상만큼은 아니지만, 저는 성격이 닮았다 싶었습니다."
"다미오가 누굽니까?"
환국이 물었다. 오시마가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손자라오."
"그런데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요?"
"여기 없으니까."
입속에 밥이 든 채 아리요시 노인이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환국에게 오시마가 설명해준다.
"지금 그애는 영국에 가 있어요. 유학간 거요. 사이상보다 두세살위, 스물넷이니까."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멀리 보냈느냐 그 얘기지? 누구나 그런 얘기 하지만 사정이 있어요. 그애 아버지가 죽은 지 십오 년, 다미오가 아홉 살때 죽었어요. 아카몬출신으로 장차 교수나 문사로도 대성할 거라 주위에서들 그랬지. 영문학이 전공인데 그애는 영국으로 유학하고 싶어했으나 외아들이어서 우리도 반대했고 본인도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았어. 그러고는 세상을 다 못 살고 갔으니 손자에게나마, 그리 된 거지 뭐."
오시마는 담담하게 말하다가 끝에 와서 흐지부지 끓었다. 아리요시 노인도 표정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순간 환국은 노부부의 외로움이 가슴 저리게 전해져왔다. 여태 손자가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자기에게 졸업까지 있어달라 했던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엽차를 마신 뒤,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환국은 하나래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쩔까 하고 그는 생각한다. 조찬하를 찾아가볼까 하다가 인실에 관한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또 자신이 없다기보다 인실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망설여졌던 것이다.
"사이상!"
오하츠가 불렀다.
"손님이에요, 사이상!"
"아아."
환국은 일어섰다. 뒤뜰을 돌아 현관 쪽으로 나갔을 때 오하츠는 환국을 힐끗 쳐다보며,
"어딘지 좀,"
머뭇거리듯 말했다.
"뭐가?"
"이상한 사람 같아요."
"무서운 사람이이?"
"아니……"
"초라해 뵌단 말이지?"
오하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라한 것하고 이상한 건 상당한 차이야."
환국은 수봉이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과연 수봉이었다. 그는 담벽에 박쥐처럼 붙어 있다가 문을 열고 환국이 내다보자 허겁지겁 다가왔다.
"나하고 가주어야겠다."
"하여간 잠시 들어와. 나가는 건 어렵잖으니까."
"그게 아니다. 사정이 바쁘다."
일상복인 듯 두 번 만났을 때보다 수봉의 차림은 초라했다기보다 남루했다. 낯빛도 나빴고 몹시 긴장해 있었다.
"영광이 때문이다."
'사고가 난 게로구나!'
비로소 환국은 깨닫는다.
"잠시만 기다려."
방으로 돌아온 환국은 책상 서랍 속에서 돈을 꺼내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둘러 나왔다.
"'가자."
수봉의 걸음은 빨랐다. 그를 따라 환국이도 걸음을 빨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 죽게 됐다!"
"뭐라구?"
"우선 병원에 떼메다놓고 이리로 달려왔다."
"다 죽게 되나니, 왜?"
"그런 설명할 새 없다. 어서 가자!"
전차를 타고 또 갈아타고 하는 동안 수봉의 말에 의할것 같음면 어젯밤 열두시가 지난 뒤 송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수봉은 또 사고쳤구나!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데다 입고 있는 옷이 찢기고 얼굴에는 찰상, 꼴을 보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수봉이 새들어 사는 다리미 석 장짜리 방으로 들어선 그는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다가 하는 말이 술을 사달라고 했다.
"미친놈, 지랄하네. 돈 벌어왔으면 니가 술을 사지. 내가 왜?"
했더니
"일이고 자시고, 끝내기 전에 와버렸으니 품삯이야 그냥 떠내려갔지."
"왜 또 그랬어!"
"한 놈 때려눕히고 도망왔지 뭐. 그 새끼들 벌떼같이 덤벼들어서 있으면 맞아죽겠더라."
"구제불능이다. 내가 뭐랬나, 참고 또 참아라. 쇠 귀에 경 읽기다. 이젠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
"그 새끼들 센진어쩌구, 사람의 오장을 뒤집어놓는데 참을수가 있어야지. 나도 후회하고 있어."
"일본서 센진 어쩌구 한다해서 시비했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못 당할 거다. 니가 센진이지 그러면 왜놈이더나? 쪽바리가!"
하다가 수봉은 홧김에 술을 사다 영광과 나누어 마신 뒤 과히 멀지 않은 곳,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나가야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영광의 거처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마신 술탓인지 몸이 찌부듯해서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있던 수봉은 여자 비명에 놀라 일어났다. 나가보니 영광이와 함께 있는 여자, 수봉은 함께 있는 여자라 했다.
"영광씨가 죽어요! 사, 살려주어, 으 흐흐흣…… 매, 매를 맞고."
부들부들 떨면서 여자는 울부짖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뛰었지. 나가야 뒤켠에 있는 공지로 달려갔을 때 영광이는 엎드러져 있었고 이미 놈들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참말이지 비참해서 두 눈 뜨고 볼 수가……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고 안아 일으키는데 팔과 다리가 부러졌는지 제 마음대로 덜렁거리고, 마치 망치로 때려부순 장난감 같더라니까. 의식도 없었고 혜숙씨 말이 건장한 사내 세 놈이 와서 다짜고짜 공지로 끌고 나가서 팼다는 거라. 아마 영광이가 때려눕혔다는 그놈의 한패거리가 뒤쫓아와서 보복을 한 모양이다. 그래가지고는 사람 될까 싶지가 않다. 살아도 병신이 되거나, 미친놈! 그렇게 타일렀는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래도 그 자식 일본 와서 죽으려고 작심을 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
영광을 메다왔나는 병원은 간다부근에 있었다. 외과 전문의 개인 병원인데 규모는 꽤 컸다. 수봉과 환국이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복도 옆의 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봉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라기보다 소녀라 해야 할 에띠고, 아이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연신 떨면서
"아무말 없어요."
"내 만나보지, 의살."
환국은 진찰실 문을 밀고 마치 쳐들어가기라도 하듯, 간호원이 뭐라 하는데 개의치 않고 의사 앞에 섰다.
"환자의 보호잡니다."
처방을 쓰고 있던 의사는 안경 너무 눈을 치뜨고 환국을 보았다. 사십대 중반쯤 깐깐하게 생긴 사내다. 그는 다시 처방을 쓰고 나서 간호원에게 그걸 넘겨주고 다시 환국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요."
"어느 환자 말입니까?"
"송영광입니다."
"아아, 그 조선인."
했다. 그리고 의외란 듯 환국의 차림새를 살핀다.
"어떻습니까 상태가."
"굉장히 험하더군. 말짱 다 망가졌어요. 장출혈도 있고."
"그, 그럼 살겠습니까!"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수속이나 밟으시오."
"네. 그,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부,부탁합니다."
환국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환자하고 어떤 관계요?"
순간적으로
"사촌입니다."
거짓말을 했다. 어떤 관계냐고 묻는 의사의 목소리는 헌병이나 경찰관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사촌, 사촌치고는…… 좋소. 나가서 기다리시오."
진찰실은 나와 도어를 닫는 순간 환국은 좀더 의사에게 매달려봤어야 했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뭐라 하던가?"
수봉이 물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하던가?"
"지장이 없으면 수술하려 하겠나. 기다려보자.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가서 수속을 해야겠다."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돈을 낸다는 뜻이었다.
"고맙다."
수봉은 환국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듯 떨고만 있었다. 수봉이 환국의 하숙으로 달려간 첫째 이유는 수술이든 입원이든 바로 그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고, 수속에 필요한 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혜, 혜숙씨"
수봉의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라고 여기는 강혜숙 씨"
하고 소개를 했다.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최환국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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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4부/3권/4편) 6장 영광의 부상
黎明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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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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