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기행첩의 제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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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송도 여행은 당시 개성 유수(留守)를 지낸 오수채(吳遂采, 1692-1759)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근무하던 지방관리들이 친구들을 불러 함께 유람을 하고 이를 시나 그림으로 남기는 일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일이다.
[송도기행첩]에는 오수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박연폭포] 그림 뒷면에 그의 시 ‘범사정(泛槎亭)’이 적혀 있고 그의 호인 체천(棣天)과 자인 사수(士受) 인장이 찍혀 있다. 또한 화첩 마지막 면에 있는 강세황의 시에는 ‘오제(五弟)’라는 인물이 화첩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오제는 오수채의 손자 오언사(吳彦思, 1734-1776)로 보고 있다. 이러한 친분을 보이는 오수채와 강세황은 선친대부터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다.
강세황이 개성을 방문한 1757년에 개성의 유수로서 오수채는 1648년 편찬된 [송도지]를 보완하여 [송도속지]를 간행했다. 지리지 발간은 18세기에 전국적인 현상인데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다. [송도속지]에는 범사정, 태안창, 대흥산성 등과 같이 [송도지] 발간 이후 새롭게 조성된 장소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송도기행첩]에도 이곳을 그린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군량미 창고 태안창(泰安倉)에서 바라본 풍경 그림이 3점이나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흥산성, 군기고 대흥사, 행궁인 대승당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장소들이 다른 송도기행 문학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공적 기능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송도기행첩]과 다른 기행사경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강세황의 여름 여행의 추억을 담은 [송도기행첩]은 회화사적으로는 개성 주변 명승지 그림을 한데 모은 현존하는 유일한 화첩이라는 점과 음영법, 투시도법의 서양화법이나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도입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문화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집안 간의 오랜 교유 관계와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명승지를 유람하고 시와 그림으로 남기는 풍조를 보여주며 또한 지리서를 편찬한 관료의 공적을 기념하려는 측면도 반영하고 있는 다층적 의미의 화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