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25.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 27. 어떠한 사람이기에
8: 25. 우리가 죽겠나이다.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
1]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여기 언급된 제자 중에는 풍랑과 배를 다루는 일에 노련한 어부 출신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위경(crisis)을 헤쳐 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드디어 현상적으로는 바다에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께 나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2] 주여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구원하소서'란 '구출하다', '보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소조'(*)의 제 1 부정 과거형으로서 즉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이는 눈앞에 닥칠 위기의 급박성을 또렷이 나타내 준다. 제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간청을 하고 있다. 마가는 이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 38)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 2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인 통일성 가운데서 각 저자 간의 다양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당시 위험에 직면해 있던 배 안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 말해졌을 것이지만 저자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외침만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여 구원하소서.'란 용어는 '우리를'이라는 목적어가 첨가된 상태로(Metzger) 1세기 이후의 예배 의식 중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3] 우리가 죽겠나이다.
헬라 원문에 현재시제로 묘사된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죽어가고 있나이다.'가 된다.
제자들은 자신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록 조그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 가닥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다. 이는 곧 날마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분노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줄 자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고 죽을 지경에 있었으나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간증했다.
* 고후 1: 8-10 –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위기에 직면한 신앙
본문은 제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 과신과 신뢰 속에 살아가지만 자기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하게 될 때 깊은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면 놀라운 구원의 손길로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신다. 본문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하여 불안에 떠는 모습은 보기 좋은 것은 아니나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전적으로 주만을 의지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일깨워 준다.
(1) 주님께 나아갔다.
①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이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또한 모든 능력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 골 1: 28-29 –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렇듯 자신과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자만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함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무능한 자일 뿐 아니라 한계 앞에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시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 즉 그 무능함을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②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적절한 해결자를 찾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온전하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해결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다.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풍랑의 어려움과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자를 예수로 삼고 그만을 의지하였다. 우리가 믿는 세상적인 대상들은 불완전하나 주님은 완전한 분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순리이듯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그와 같다.
* 시 84: 12 -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 잠 3: 26 -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 잠 30: 5 -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복 있는 자가 되자.
(2) 제자들은 주님을 배웠다.
① 우리의 영혼을 깨워야 한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운 것은 어두움에서 밝은 빛을 보리라는 희망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빛을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구원의 때가 더욱 가까이 왔으므로 이는 더욱 절실하다.
* 마 24: 43 -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② 주님을 깨우기 위해 두드려야 한다.
제자들은 자기의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을 깨우는 적극적인 행위를 시도하였다. 만일 제자들이 주저앉아 한탄하였다면 그들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들은 구원의 길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
기독교는 적극적인 신앙의 종교다. 그러므로 우리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도 주님을 깨워야 한다. 그리고 끈기 있게 우리의 처지를 알려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주의 구원의 손에 의해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약 1: 5-8 –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3) 제자들은 주님께 호소하였다.
① 구원하소서
이 말은 우리 전체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물에 빠져 도와 달라고 구원을 요청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대로 빠져 죽고 만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어야 한다.
* 롬 10: 9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 히 7: 25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 롬 10: 10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 행 2: 21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나중까지 견뎌야 한다.
* 마 10: 22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② 죽겠나이다.
인생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경에 처한 제자들의 탄식은 아주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께 매달렸다.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하여서 뿐만 아니라 어려운 지경에서나 외롭고 괴로울 때 항상 자비와 긍휼을 구하여야 한다.
ⓑ 그 탄식은 열성에 찬 음성이어야 한다.
이는 마치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과 같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도움을 얻고자 할 때 열심을 가지고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심을 가지시듯 우리도 그 열심을 품어야 한다.
8: 26.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 아래 머물러 있었다.
예수께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 신앙적 성향과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이었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불완전한 믿음은 그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들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올리고피스토이) 하시고
이 말은 믿음의 양이 작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본서에서는 이 말이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볼 때 자주 사용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 40)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둘은 모두 믿음과 두려움과의 대립된 성질, 곧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보인다.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
* 요일 4: 18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3]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이는 예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혹자(Bruce)에 의하면 이 표현은 실제적 권능의 행사라기보다 하나의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권위를 약화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시다.
'꾸짖으신데'(*, 에페티메센)란 말은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아직 채 꾸짖는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그 꾸짖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때 바람뿐만 아니라 바다에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다.
4]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에게네토 갈레네 메가레)
직역하면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놀라운 능력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말씀은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하게 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다. 여기서 마태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예수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탄에 의해 시험받으셨으나 사탄을 꾸짖으셨다.
* 마 4: 1-11 –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귀신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처럼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 잠드셨으나 당신과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잠재우셨다.
* 마 12: 22-32 – 22 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8: 27. 어떠한 사람이기에 -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
1] 그 사람들이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이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Meyer, Jerome, Nosger).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항했기 때문에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Weiss)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 막 4: 36 -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2] 놀랍게 여겨 이르되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전인격적으로 응답 됨으로 인해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 마 9: 33 -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 마 14: 33 -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포타포스 에스틴 후토스)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 앞에서 그들은 몹시 놀라 그가 하나님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보잘것없었음을 실토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이다.
4]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헬라어 원문에는 '순종하는고'란 말 속에 '그에게'를 강조하여 '아우토 휘파쿠우신'(*), 즉 '그에게 순종하는 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자연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다. 이 같은 자연의 지배는 구약적 배경에서 예수의 신적 탁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 시 89: 9 -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 시 107: 25-30 –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 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 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 사건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비유적으로도 잘 적용된다. 이 세상은 종종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삶의 온갖 풍랑을 제거해 주실 수 있다.
주께서는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고, 고요히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 의탁하는 믿음이다.
* 시 50: 15 -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시 62: 1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5]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본문은 바다의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잠든 예수를 깨우는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꾸짖는 예수의 말씀이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신앙인의 담대함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꾸짖으시는 이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① 이 말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으냐? 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바다의 풍랑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제자들의 공포는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공포가 용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곁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질병을 말씀으로 고치신 능력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의 능력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자신들의 곁에 누워 편히 잠들고 계신 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처럼 성도가 두려움에 떠는 것은 그의 옆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주님이 그들을 떠났다며 좌절했다.
②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 는 책망이다.
우리는 사탄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그의 능력을 믿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의 능력은 부인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알 뿐만 아니라 믿는다. 다만 전적으로 그만을 믿고 신뢰하지 못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더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소망은 단절되고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③ 모든 염려를 책임질 것이라는 말이다.
'곧 일어나사'. 이 말은 그가 그들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해 주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당하는 고통을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그는 즉시 일어나 우리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펼치셨다.
(2)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괴롭히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꾸짖으신다.
① 예수님은 자연이 성도를 거스리고 대항할 때 자연을 꾸짖으셨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정복과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하신 자연에 질서를 세우셨다. 그런데 인간, 아니 성도를 거스리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오만을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② 사람을 꾸짖기도 하신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은 핍박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꾸짖고 책망하셨다.
* 행 9: 4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성도를 박해하는 모든 불신자를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보좌 앞에서 크게 꾸짖고 책망하신다.
* 막 8: 33 -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③ 그는 성도를 미혹하는 사탄을 꾸짖으신다.
* 슥 3: 2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하나님과 교회의 궁극적인 원수요 대적자인 사탄이 책망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3) 만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잔잔하게 되거늘'. 하나님을 대항하고 성도를 괴롭히며 교회를 대적하는 많은 것들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의 법을 거역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꾸짖으시는 바다가 잔잔해졌듯이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스도께 책망받는 모든 것들은 결국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4)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① 우리가 믿을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변적이고 유한하며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아무도 인간에게 소망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지혜는 한계가 있고 방백들이나 왕의 권력 역시 불안전하여 진정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실한 주이신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
②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져온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믿는 자만이 구원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사탄, 악한 자를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주와 그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건은 반드시 믿음밖에 없음을 언제나 명심하여야 한다.
③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백부장(마 8: 5-13), 모세, 여호수아 모두가 이러한 믿음으로 믿는 믿음의 실상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과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