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대답보다는 고독한 물음
悳泉 나병훈
1.
시는 대답보다는 고독한 물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물음의 실체는 결국 '나란 무엇인가?"다. 시는 시인의 명상과 체험으로부터 벼리어진 고통속에서의 탄생과 부활이어야 할 것이기에 결국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식의 '실존적 자아의식'으로의 귀환인 셈이다. 이러한 시의 본질을 짚어 볼 때 독자에게 자아의식적인 감정의 이입과 여운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체질에서 숙성되고 발효 된 육체와 영혼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그런 물음이어야 한다.
2.
물론 시에서의 '물음'은 거대 담론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물음'의 실체가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아나서는 데 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물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시인의 독자적 '체험과 자각'에 대해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소설가 하라노 게이치로의 최근 철학적 에세이를 차용 해 보자. 그는 " 사람에게도 그렇게 확고한 자아(='진정한 나')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나 속성을 한 꺼플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란 무엇인가』 21.9 21세기 북스) " 라고 적고 있다. 즉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그의 견해대로라면 진즉 시의 질료(質料)가 되어야 할 시인의 독자적 체험과 자각은 자기를 찾아나서는 (결국 발견하지 못할 한계적 인간으로서의 운명이겠지만 ) 고독한 빙벽(氷壁)에서 육화된 사유와 통찰로 내면화 된 중얼거림(노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고통과 고독속에서 육화하고 부활되는 인간의 노래이어야 한다. 다만 그 육화는 지나치지 않아야 독자와의 소통이가능 할 것임은 덧댈 필요가 없을 것이다.
3.
이러한 '물음의 시학 '을 실존적 자아의식으로 용해시켜 내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 고독한 여성성이자 모성적 생명의 시인 문정희다. 그는 '시작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시의 길은 오로지 '물음'뿐임을 단정한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 할 뿐이므로 '물음'의 유일한 출구이자 자신의 자아(自我) 투영시키는 시작 도구로서의 '언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이 진득하게 발효되고 육화된 문정희 시인의 최근작 「조장鳥藏」은 바로 고독한 빙벽(氷壁)에서 육화된 사유로 몸부림치는 음유시인의 고백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도드라져 보인다.
사막에서 시신을 쪼아 먹는 새를 본 후로는
세상의 모든 새들이 육친(肉親)으로 보인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 살과 피는
새의 눈처럼 날카롭고 의뭉하다
아무리 씻어도 죄 냄새가 난다
입술에 묻은 핏빛 슬픔과
검은 고독으로
詩를 쓴다
살덩이로 사는 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눈알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날개는 상처로 무겁기만 하다
발자국마다 따라오는 무덤을 끌고
그래 가자! 나의 육친(肉親)
사랑하는 나의 육신 (肉身)의 악마여
온몸을 으깨며 추락하는 빗물로 땅에 떨어져
결국 흙의 이빨에 물어뜯기고 말
나는 나의 시신(屍身)을 쪼아 먹는
한 마리의 쫓기는 검은 새이다
- 문정희, 「조장鳥藏」 전문
4.
문정희 시인은 八旬에 즈음해서야 비로소 '나의 神은 바로 절대적인 나(我)'라고 선언한다. 홀로 존재하는 들녘의 꽃 한송이, 허공의 하루살이 조차도 바로 神이라 명명 해 버리는 실존적 자아의식! 철저한 독자적 개성으로 무장 해 버린 절대적 생명의식만으로 숙성 된 시의 化神만이 범접할 수 있는 시원의 들꽃이며 허공의 하루살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은 곧 그녀가 독보적으로 구축 해 놓은 시의 성체로써 詩가 차오를 때면 응! 하고 입을 다물 뿐, 검은 고독한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 할 뿐이라는 그의 고백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이러한 연유로 시인은 앞으로도 어느 땅, 어느 년대기에도 없을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거침없이 토로하면서 자신의 지친 영혼과 살덩이를 시의 質料로 그녀의 神에게 진설(陳設)하고 있을 것이다.
5.
시의 '물음'에만 집중해서 행간을 들여다보자. 저 쫓겨다녀야 할 비운의 검은 새는 神으로 스스로 호칭한 실존적 자아의 메타포다. 조장(鳥藏)은 자아가 神의 몸으로 육화되는 존엄한 의례다. 그러므로 인간 한계로서 자신의 시신(屍身)을 쪼아 먹어야 하는 조장(鳥藏)을 주도한 검은 새의 살과 피는 죄악의 냄새로 영원히 남아 결코 지워 낼 수 없는 것이다. 고독하고 외로운 시인이 늘그막에 시력 50년 세월의 공력으로 깨우친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요 외로운 고독이 아닐까? 그 시철학적 아포리즘으로 찾아 온 깨달음은 곧 '나의 神은 바로 절대적인 나(我)' 이며 홀로 존재하는 들녘의 꽃 한송이, 허공의 하루살이 조차도 바로 神이라 명명 해 버리는 실존적 자아의식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6.
그러한 자아의식은 곧 홀로 존재하는 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은 무엇으로도 부정할 할 수 없는 우주의 절대적 존재이자 神의 실체요, 팔순에 즈음한 문정희 시인이 비로소 시원에서 터득한 절대적 생명의식의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형이 이 시의 행간에 큰 물줄기를 이루며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그런가하면 여성적인 생명의 호기로움이 강바닥에서 호기롭게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우주에서 단 하나 존재하는 문정희의 시강(詩江)이다.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