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15일만에 거란에 굴복한 이유
926년 발해 멸망 이후 북방영토는 더 이상 한민족의 터전이 아니었다. 고려의 북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는 천리장성은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를 잇는 선이었고 조선의 북방한계선은 최대 압록강에서 두만강을 잇는 선에 불과했다. 한민족이 건국한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요하 주변과 요동·만주·연해주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그런데 왜 고려와 조선은 이처럼 광활한 영토를 버리고 한반도에 칩거한 것일까.
한민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방영토를 다시 밟은 것은 1870년경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 기근이 발생하자 먹고살 길을 찾아 비옥한 북방영토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926년부터 1870년까지 무려 950여 년 동안 한민족은 왜 북방영토를 버려둔 것일까. 우리는 930년을 전후하여 폭발한 것으로 밝혀진 백두산 화산 폭발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화산폭발지수 7.4에 이르는, 근 2000년간 지상 최대의 화산 폭발로 알려진 백두산 화산 폭발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거란은 925년 12월 말 발해를 침입했다. 거란이 이때 발해를 침입한 것으로 보아 아직 백두산 화산 폭발이 있기 전일 것이다. 보름 만에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홀한성에 동단국(東丹國)을 건국했지만 2년 만인 928년 발해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평(지금의 요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거란이 동단국의 수도를 천도한 것으로 보아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은 폭발 전일 것이다. 만일 이미 백두산 화산이 폭발했다면 모두 몰살당하여 이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란의 우려대로 백두산은 이후 대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화산폭발지수 7.4에 달하는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반경 200여㎞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백두산을 둘러싸고 포진해 있던 발해 5경은 거의 궤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북쪽으로 250㎞ 떨어진 상경 용천부는 어느 정도 무사했겠지만 이를 제외한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 중경 현덕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백두산 화산 폭발은 겨울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 백두산 정상에서 눈과 얼음이 마그마와 섞여 엄청난 양의 걸쭉한 라하르를 형성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압록강·두만강·송화강 물줄기를 타고 내려와 엄청난 홍수를 일으켰을 것이다.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발해의 촌락들은 이 홍수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 백두산에서 쏟아져 내린 화산재 등이 인근 지역을 수미터 두께로 덮어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속 160㎞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는 화산폭풍이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해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백두산 천지는 화산 폭발로 형성된 칼데라호수이다. 화산 폭발 전 백두산은 해발 3500m의 뾰족한 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산 폭발로 산정 부분이 날아가 버리고 함몰되어 지금의 천지가 형성된 것이다. 천지 한쪽이 무너져 장백폭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마그마가 흘러내린 가장 큰 골짜기 부분이다. 거대한 마그마 줄기가 협곡을 만들며 흘러내려 갔을 것이다. 이를 달문이라 부르는데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당시 백두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마그마 또는 라하르가 여러 골짜기를 만들어 냈다. 토문 또한 이러한 골짜기 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은 단 한 번의 폭발이 아니었다. 대폭발 이전부터 소규모 폭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대폭발 이후에도 크고 작은 폭발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에는 화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발해 사람들은 백두산 화산 활동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며 발해 왕조의 운이 다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민심은 급속도로 이반되고 거란은 손쉽게 발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9세기에 시작된 백두산의 화산 전조활동은 발해의 민심을 이반시켰고 발해의 쇠퇴를 가져왔다. 거란이 보름 만에 발해 국왕의 항복을 받아낸 비결이다. 그리고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의 근간이 파괴되고 말았으며 발해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에서 고려로 망명한 사람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고려에서는 내투(來投)라고 하였는데 많을 때는 한 번에 수만 명의 사람이 넘어오기도 하였다. 우리는 흔히 화산이 폭발하고 나면 일대가 비옥해져 농사짓기에 좋고 더 좋은 환경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화산재에 피복된 땅이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을 때 미국은 화산재 때문에 클러크 공군 기지를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다. 2000년 일본의 홋카이도 우수산이 폭발했을 때 산록에 부석과 화산재가 피복해 일대가 마치 사막과 같이 되고 말았다. 강하 화산재는 나무를 탄화시키지는 않지만 고사시키기에 충분한 열을 가지고 있다.
풍화되지 않은 화산재는 산성도가 강해 농경지나 목초지로 이용할 수 없고 부석은 식물의 뿌리가 통과하기 어렵다. 화산재가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은 하나의 화산 분화가 종식된 뒤 적어도 수백 년이 지나 화산 유리가 풍화되고 흡수되어 완전한 토양이 된 이후의 일이다. 화산재가 피복한 땅은 파종할 수 없고 따라서 수확할 수도 없다. 화산재가 피복된 지역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사막이고 불모지일 뿐이다. 1707년 후지산 분화가 있었다. 겨우 두께 1㎝ 정도의 화산재에 불과했지만 넓은 지역의 논과 밭, 가옥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새까만 화산재의 사막이 되고 말았다. 오랜 기간 논과 밭이 복구되지 못했고 피해를 입은 주변 마을의 인구가 급감하였다고 한다.
발해 주민들의 고려로의 내투 현황에 대해 살펴보자. 거란의 침공 이전인 925년 가을부터 겨울에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내용이 고려사 권1 태조세가, 태조 을유 8년에 기록 되어있다. 또한 발해가 망한 926년 이후에도 고려 태조 10년(927년), 11년, 12년, 17년, 21년, 경종 4년(979년)까지 발해 유민들이 많게는 수만 명씩 이주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을 종합해 보면 50년 동안 내투한 발해 유민이 1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록된 것만 이 정도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발해에서 고려로 내투한 발해인의 약 75%가 고려 태조연간(921~938)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백두산 화산 활동이 가장 왕성했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하여 인근 지역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의 유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한반도로 남하한 이유이다. 이로 인하여 발해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만 것이다.
대폭발 이후에도 꾸준히 소규모 폭발을 되풀이했다. 백두산은 거의 100년에 한 번꼴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 1403년 1월 27일을 보면 갑산의 영괴, 이라 등지에 반쯤 타고 마른 재가 비처럼 내렸다고 기록 되어있다. 선조 30년 1597년 10월 2일에도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이 삼수군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군데가 무너지고 고을 건너편에 있는 시루바위의 반쪽이 무너졌다고 서장을 올렸다. 숙종 28년 1702년 6월 3일에도 함경도 부령부에서 하늘과 땅이 갑자기 캄캄해졌는데, 때로 혹 누른빛이 돌기도 하면서 연기와 불꽃같은 것이 일어나는 듯 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또한 천지조수(天池釣叟; 천지에서 낚시하는 사람 ) 유건봉이 기록한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誌略)에 의하면 1903년 봄, 별안간 호수 한가운데 폭발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중에서 차바퀴만큼 큰 불덩어리가 떨어지고 수면 위에서 수많은 불꽃이 낮처럼 환하게 밝게 보였다. 포성이 벼락처럼 울리고 파도가 하늘 높이로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2시간쯤 지나 동쪽에 햇빛이 생겼다.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잔잔해지고 안개는 산봉우리에만 걸려 있었다고 적었다.
10세기 초 백두산 화산 대폭발 이후 백두산 반경 200㎞ 이내 지역은 황무지가 되고 말았고 이 지역이 다시 비옥해지는 데에는 수백 년이 필요했다. 1980년에 화산폭발지수 5의 규모로 폭발한 미국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지역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모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산폭발지수 7.4의 규모였던 백두산 화산 폭발 지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해보면 백두산 대폭발 이후 이 지역의 역사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지역을 버리고 주변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일부는 북쪽으로 일부는 서쪽으로 일부는 남쪽으로…. 편서풍이 강하게 부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백두산 동쪽으로는 화산재가 두껍게 쌓여 갈 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잡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유목민들이 가장 먼저 유입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여진족이다. 아직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합한 상황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 백두산 일대에 여진족이 활동한 이유이다. 여진족의 아골타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였고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민족은 고려와 조선왕조를 거치고 있었는데 북방영토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익의 성호사설 제2권을 보면 ‘함경도(咸鏡道)는 모두 말갈(靺鞨)의 땅이었다. 지금에 와서 경계를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 영토 안에 있는 폐사군(廢四郡)도 가끔 외적의 침범이 있어서 모두 이민을 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데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국토는 금구(金甌)와 같이 완전하게 되었으니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15권 강계고서(疆界考序)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조가 일어나서는 함경의 남쪽과 마천령의 북쪽을 차츰 우리의 판도로 끌어들였고,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에 무산부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 이래로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에서 발원하고 장백산의 남맥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만년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명을 받들어 정계비를 세우니 드디어 두 강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지금 저들의 땅과 우리 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을 상고해 보면, 연하 지방에 군·현·보·위가 있지는 않으나 두만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영고탑부내 혼춘 와이객이고 압록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길림부내 책외 번지로서 흥경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약용은 두만강 북쪽을 숙신의 땅으로 정의하고 삼한 이래로 한민족의 땅이 아니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생각해 볼 때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성호 이익 선생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 모두 조선의 실학자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가진 선비들인 것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이 위와 같은 글을 쓴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간도반환청구소송을 구상할 당시 두 가지 큰 난관이 있었다. 하나는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이 북방영토를 더 이상 경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조선과 청 모두 백두산 일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양국 모두 토문과 두만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경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을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 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대 윤성효 교수의 ‘백두산 대폭발의 날’과 소원주 박사의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자연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펼쳐지는 주장들은 명쾌했다. 10세기 초 백두산 화산 폭발은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인간의 기록은 없지만 위대한 자연의 기록은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