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0일 아침, 백제문화권으로 향했다. 첫 답사인 만큼 큰 기대와 설렘을 안고 떠났다. 답사 둘째날부터 비가 왔지만, 답사의 즐거움이 커서인지 우리가 가는 답사지의 운치를 더해줄 뿐이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부슬거리는 봄비의 기운을 한껏 받아가며 백제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이번에 답사한 백제문화권은 성왕, 위덕왕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551년 위덕왕의 부친인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옛 땅을 회복하였지만, 2년 후 신라의 배신적인 기습공격으로 백제군은 쫓겨나고 말았다. 성왕의 아들인 부여창(위덕왕)은 권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 공격을 단행하였는데 격려차 성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향하다가 신라의 공격을 받아 격파당했다고 한다. 성왕은 신라의 노비에게 생포당해 결국 노비의 칼에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충청북도 옥천에서 있었던 유명한 관산성 전투이다. 554년 성왕을 비롯하여 3만명의 군사가 전사한 관산성 패전이후 백제의 국력은 뚜렷한 약화의 조짐을 보였다.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의 패사가 자신에게 있었음을 시인하고 급기야 원로대신들에게 스님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제신과 백성들의 만류에 따라 출가를 포기하는 대신 100명의 백성들을 출가시키고 여러 차례의 공덕재를 베풀어 즉위초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아버지를 죽게 만든 위덕왕의 심정은 정말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능산리 사찰과 그안에 봉안한 금동대향로 모두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는 동시에 성왕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백제를 불교를 통해 하나로 묶어주기 위함이었다. 성왕의 이름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약칭인데 ‘불법의 바퀴로 세계를 교화시키는 최고의 통치자’를 뜻하는 것으로, 성왕은 살아생전에 전륜성왕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불법을 백제 중흥의 구심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위덕왕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불교를 통해 백제의 중흥을 다시 도모하였던 것이다.
금동대향로에 빼곡히 조각해놓은 문양은 사람과 동물 등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데, 한반도에 살고 있지 않은 코끼리나 악어 등의 동물들도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백제를 세상의 중심이자 불국토의 나라로 만드려고 했던 성왕의 꿈을 향로에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나에겐 그저 아름답고 세련된 '백제의 미'를 상징했던 금동대향로가 사연을 알고보니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며, 한편으론 백제의 중흥을 다짐하며 피워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는 위덕왕을 상상해본다.
왕흥사 역시 위덕왕과 관련이 깊은 절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이곳의 목탑지에서 사리함이 발굴 되었다. 발굴된 청동제사리함에는 29자의 명문이 세겨져 있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이것은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찰주(刹柱)를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묘한 변화로 셋이 되어있었다”는 내용이다. 왕자의 죽음으로 왕족의 결속과 왕권의 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위덕왕이 직접 사찰과 탑을 지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또한 왕흥사의 위치는 위덕왕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아버지 성왕이 시작한 사비성의 불국토화 작업을 완성하는 거점이기도 한 이곳에 아들을 위한 절을 지은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절을 지었을 위덕왕의 심정이 비오는 왕흥사지의 모습과 겹친다.
자신의 호기로 아버지를 잃고,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아들까지 잃었던 위덕왕. 백제를 45년이나 다스렸던 왕이기에 앞서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한 남자가 안쓰럽게까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