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은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이다.
임진왜란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명의 제도를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마련했고
지방에는 초관과 속오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허용,
병사의 면역(免役), 노비의 방량(放良) 등이 일부 허용됨에 따라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근본적으로 군역(軍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책들은 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군비의 확장, 국가의 지출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역·공납·납세를 강요했고
이에 따른 이농현상이 광범하게 나타났다.
그결과 공물의 미납화,
양전수세의 간편화,
면세전 확대 방지책,
병역의 납세화,
환곡책,
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전란으로 궁전·관청건물들과 홍문관·춘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었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 내부 간에도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권세력·지식인층들의 사상에는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이는 이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전쟁을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정권이 등장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국내적으로 〈무가제법〉·〈대오법도〉·〈참근교대제〉 등을 제정하여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우고,
도요토미의 팽창주의와는 달리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외교역의 단일적 통일체제를 갖추었다.
더욱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과의 통교회복을 서둘러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귀환문제 등에 적극적인 유화책을 썼다.
그리하여 1604년
승려 유정이
일본으로 가 교섭을 하여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又吉) 등의 사절을 파견했으며,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일본은 전쟁중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활자·
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건주위(建州衛) 및 하다[哈達]·휘파[輝發]·우리[烏拉] 등 여러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