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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말씀
제목 : 마음에 심어진 말씀
성경 : 약 1:19~21
찬송 : 203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1126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야고보에게 물으면, 우선 그는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곧 야고보서 전체를 위한 서론의 핵심부에 도달했습니다. 18절에 이어 21절이 그 절정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그 나름대로의 구원론적 근거를 펼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곧 그분의 뜻에 의한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들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하나님의 이런 구속적 행동이 실제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고,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고, 화내기는 더디게 하십시오. 사람이 화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온갖 음란함과 명백한 악을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하게 받으십시오.”
(약 1:19-21/유대인 신약성경)
√성도의 듣기와 말하기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은 원문에서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이스테)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적 행동, 그 변할 수 없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그 구원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실제적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으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사실이 실제로 어떻게 우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낼까요?
야고보는 이런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9~21절의 내용들은 18절에서 선포된, 야고보 식으로 표현된 구원의 사실에 근거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에 따라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넓게 보면 19~21절까지의 내용들입니다. 먼저는 매우 실천적인 지침이 19절 하반 절에 나옵니다. ‘듣고 말하는 문제’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1절에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그들 안에 ‘심겨’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더러운 것들과 악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21절은 야고보의 구원론과 윤리를 한 구절에 압축해서 표현한 야고보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우선, 19절을 살펴봅시다.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는 먼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침을 내려줍니다(참고, 1:2~4,8).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무엇을 해야 합니까? 흥미롭게도 말에 관련된 태도부터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보듯, 그들의 영적 출생이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는 점에서, 19절이 우선적으로 ‘말’의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렇게 우연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야고보는 3장에서 보다 심도 있게 말의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선 말의 문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람들의 말에 대한 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고, 또한 달라져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민첩해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하고 라고 했는데 그 말은 ‘타퀴스’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즉시라는 뜻입니다. 지체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포함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있어 지체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그의 순종이 즉각적이고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하시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즉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셨던 곳으로 달려갔던 것과 같은 순종을 말합니다. 그것이 듣기를 속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사람의 말도 ‘듣기를 속히 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말을 속히 들으면 함께 어리석게 될 뿐입니다. 요즘 보이스피싱에 왜 걸려듭니까? 어리석게 잘못된 말을 속히 듣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말을 할 때는 더디게 하고 남의 말은 잘 경청하라는 일반적인 잠언처럼 들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말을 민첩하게 들으라는 말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할 부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는 천천히 하라고 했습니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보통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 일에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려워합니다. 듣는 일에는 굼뱅이 보다 느리고, 말하는 데는 총알같이 빠릅니다. 듣는 일에 참을성이 없습니다. 들어도 매우 고집스럽고 둔하고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남이 말하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식으로, 자기중심으로 알아듣기가 다반사입니다. 반면에 말을 할 때는 얼마나 급하게 합니까?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중에 바로 끊고 들어와 그 말을 가로채고 자기 생각만 쏟아 붓기에 바쁩니다.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말이 급하고 격하면 분노를 자극합니다. 상대방의 노를 격동할 뿐 아니라, 자신의 분도 격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다툼과 시기와 분쟁이 일어납니다.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말의 문제는 화평이나 의를 이루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러기에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말실수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 법정에 고소하기까지 하며, 다투고 분쟁하며 하나님의 이름까지 욕되게 하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십시오. 그리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화내는 것도 더디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심겨진 성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도록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절은 그래서,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야고보의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민첩하고, 대신 자신이 말을 할 때는 극히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나 혹은 그분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심을 뜻하기도 하고(시 35:24), 조금 더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의미에서 누구를 ‘옳다’ 인정하시는 실제적인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사 46:13).
바울이 복음을 요약하여 ‘하나님의 의’라 표현한 문맥도 이런 경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롬 1:17; 3:21~22). 하지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의 제자들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그 ‘의’는 실제로 행하여 그 행위의 열매를 맺은 그런 ‘의로움’을 의미했습니다(마 5:17~20). 그렇다면 야고보는 20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요?
야고보서가 기록된 것이 바울 서신 이전이든지 혹은 바울 서신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사람을 옳다 여기시는 행위, 혹은 그의 약속을 성취하는 신실함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도리어 구약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처럼 순전히 도덕적 관점에서만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20절의 하나님의 의는 18절의 하나님의 뜻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섭리적 구속의 의지와 동시에 그렇게 구원받은 백성의 영적, 도덕적 의에 대한 요구와 명령을 뜻합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 구분은 되지만 결코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점은 후에 2:22~23절에서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실제로 의를 행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야고보의 주장에서 다시금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20절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로운 요구와 명령들뿐 아니라, 18절에서 전제된 그의 구원과 재창조를 위한 주권적인 구원의 의지도 배제하지 않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할 때, 이 ‘이룬다’는 개념 역시 순전히 인간 편의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 속에 하나님이 ‘의’로서 명령하시고 또한 18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뜻’으로서 드러내신 그의 주권적 역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격노하는 일은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이루어 그 열매를 얻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가 행하여 이루어내는 그 역사가 순전히 그 자신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나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뜻하셨다’는 표현들이 그 배경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1:4절에서 사람이 인내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인내의 역사 자체가 단지 그 자신만의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게 하신 인내, 곧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쉽게 노하고 분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릴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우리의 구원과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커다란 방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8절의 진리의 말씀과 같은 것이며, 이는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야고보서나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씨앗’에 비유하여 그것이 마음에 심겨 있다는 이미지를 유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고 항상 있다’하여 야고보서 1:21b의 경우처럼 그 말씀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시사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40:7~8절의 배경입니다.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베드로전서 1:22-23절의 문맥은, 이렇게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도들이 거듭난 것은 바로 이렇게 풀과 같이 썩지 아니하는 씨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야고보가 1:21절에서 ‘그 심긴 말씀’이라 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가장 큰 특징이 그들 속에 심겨 있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야고보의 ‘말씀-구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렇게 중생한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 속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속에는 풀의 꽃과 같이 곧 스러져 갈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스러지고 나도 영원히 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씨앗, 곧 그 썩지 않는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운명을 같이 할 존재들입니다. 비록 풀의 꽃과 같은 세상 속에서 씨앗처럼 흩어져 있지만, 이를테면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따라 격동하며 그것에 유혹되고 미혹되어 사망의 길을 갈 수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겸손과 온유함으로 그들 안에 심긴 그 말씀의 씨앗들을 품고 받아들여, 하나님과 세상 앞에 의와 화평, 생명의 열매들을 맺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고 존재이며 사명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제부터 그의 흩어진 교회들에게 그들 안에 심긴 말씀을 어떻게 온유하게 받아들일 것인지, 세상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 심긴 말씀을 따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로써 야고보는 1장 2절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시험의 문제에 관해서 드디어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시험은 세상의 유혹, 정욕의 잘못된 추구 때문에 생깁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뉜 마음, 곧 두 마음이 있습니다. 이 두 마음이 문제의 뿌리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나뉜 마음입니다. 거기에 시험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두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시험은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시기와 분냄과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마음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결심만으로 될까요? 야고보는 이 두 마음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복음의 사실을 야고보는 전혀 새롭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적 존재, 그의 심령의 가장 큰 특징은 진리의 말씀, 곧 그의 심령에 심겨진 말씀입니다. 야고보가 염려하는 그 마음, 하나님의 교회의 마음, 성도들의 마음은 이미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폭풍과도 같은 시험 한 가운데를 지나갑니다. 어떻게 이 두 마음을 해결할까요?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그 해답을 복음에서 찾습니다. 먼저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의 말씀으로 그분의 백성을 낳으셨고,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영영히 서는 살아 있는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심령 속에 심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나뉘는 중인지도 모르나, 결코 두 마음으로 완전히 갈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 심긴 말씀을 버리는 일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령을 여전히 하나로 붙들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속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세상을 향한 마음도 바로 그 섬긴 말씀이 붙들고 있습니다. 두 마음의 치유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 세상 속에 흩어진 교회들이 당한 가장 심각한 문제인 ‘두 마음’의 도전에 대해, 야고보가 선포한 복음입니다. 야고보가 새롭게 이해한 복음입니다.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두 마음의 치유는 이미 그의 심령 속에 있는 그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워야 하는 가장 큰 대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어떤 사람도, 성공도 사명도 결코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의 ‘두 마음’입니다. 두 마음의 치유는 복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 심긴 말씀을 모든 겸손과 모든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이끄는 대로 순복해야 합니다. 그 길 끝에서 여러분은 다름 아닌, 드디어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한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심긴 성도는 무엇보다 말하고 듣는 일에 온전한 자로 자라야 됩니다.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