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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삼상7:12-14, 눅5:27-39
새해 첫날 규모 7.6 강진이 발생한 일본 혼슈 중부 이시카와현 노토반도는 피해지 곳곳에선 아비규환 같은 생존자 구조 및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면적 420㎢에 2만2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와지마시는 이번 지진으로 도로는 찢어지고 다리는 무너졌고 주택은 폐허로 변해버린 지진피해상황을 보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7층짜리 건물이 뿌리부터 뽑혀 나온 듯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도로를 덮쳤으며 아침마다 사람들이 몰리던 시장은 지진 여파로 발생한 대형 화재로 인해 200여 동의 목조 상가가 불타버린 아사이치 시장 거리에선 여전히 검은 잿더미 사이로 연기가 솟아오르는 지역에선 건물이 잿더미로 변하고 도시가 연기로 뒤덮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6일 오후 7시 기준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126명, 연락이 두절된 자도 211명에 달하며 집을 떠나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이재민 6만 여명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계속되는 여진으로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시카와현에선 지진 후 3만3800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겼고, 9만5000가구가 단수 상태다. 노토반도에 지난 2020년 12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3년 동안 발생한 지진은 506차례였는데 지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군발지진 지역에서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하며 전문가들은 노토 반도에서 이번 강진 이후에도 지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진 전문가들이 지적했다.
새해들이 기상이변은 유럽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5일 AP통신은 전날 핀란드 지역의 기온은 영하 43.1도로 올겨울 들어 가장 낮았다고 보도하면서 북유럽에 극강 한파가 덮치면서 주요 도로가 결빙으로 폐쇄돼 곳곳에 교통이 마비됐고 수천가구에 전기가 끊겼다. 또 유럽 중북부 일대에는 또 다시 폭우가 쏟아져 인명사고까지 발생 하는 등 홍수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은 기온이 영하 38도까지 떨어졌으며 덴마크에서는 서부와 북부에 강풍과 눈이 불어닥쳤고 한파로 고속도로와 주요 도로 곳곳이 폐쇄되면서 운전자들이 몇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추위에 떨어야 했다고 전했다. 독일 중북부 등은 지난해 연말 쏟아진 폭우로 인해 홍수 피해를 봤고 프랑스에서는 작년 11월과 12월에 홍수가 났던 북부의 여러 마을이 또다시 물에 잠겨 이재민 수백명이 발생했고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중부, 트렌트강 인근에서 광범위한 홍수가 났다. 새해들어서 일본이나 유럽에서 지구온난화로 기후재앙이 닥치면서 종말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것 같지는 않은지요? 새해들어 이런 기후변화로 세계는 너무 불안안 가운데 한 해를 보내면서 하는 말들이 지난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고 말하면서 돌이켜보면 누구에게나 세월은 참 빠르게 지나면서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가 우크라아나를 침공한 전쟁은 벌써 2년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지난해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이 시작했는데 이 전쟁이 레바논에 있느 헤즈볼라로 확대되고 이란이 개입할 명분을 쌓으면서 세계3차 대전의 전조는 아닌지 불안만 더해 갑니다. 이런 것이 새해 지구촌의 모습이니 지난해도 다사다난하였던 한 해 였는데 새해에도 어려운 상황이 계속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셨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새해가 없이 매일 똑 같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세상일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 꿈과 소원이 있어서 올해에는 뭔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지만 성경은 해아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인생들이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새것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떴던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왔던 계절이 올해에도 다시 오리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새것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죽었던 자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산 소망이 있다면 이것을 가리켜 새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씀드리면서 그래도 우리의 생명을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올 한해에도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실 것을 믿으면서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풀이 풍부하여 목동들이 그곳에서 양을 치는데 목동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는데 하루 종일 양들이 풀 뜯는 동안에 목동들은 피리를 불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양들을 급히 나무 아래로 피신시키기도 하며 어떤 때는 낭떨어지기에 떨어진 양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 싸우기도 합니다.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를 지내는 동안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래도 해질 무렵이면 산 위에 있는 목동은 산밑에 있는 목동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고 합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으니 주님을 찬양합시다” 이 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타고 산 아래로 널리 퍼지게 되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목동들도 그 소리를 듣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주께 감사합시다” 화답하면서 하산 한다고 합니다. 알프스 목동들에게 다사단하였던 하루를 마감하는 구호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목동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나 우리들이 한해를 마감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하루를 마치면서 오늘 하루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동들을 생각하실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지난 한 해동안 우리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를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 합니다.
1.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023년의 한 해도 세계는 전쟁으로 한해를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을 통해 목숨을 잃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들은 뉴스를 통해 보아왔다. 우리나라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므로 전쟁하는 나라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나라도 남북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 평화는 공짜로 주어지는게 아니라 양쪽이 힘의 균형이 있을 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이 확대된다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지만 역사적으로 한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파멸케도 하시는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한국과 한국교회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로 시작하는 새 해가 되기를 믿습니다.
(1)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삼상7:12)
BC 1050년 경만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사람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땅도 뺏기고 추수하면 곡식도 뺏기고 늘 불안한 삶을 살았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마음을 다해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으로부터 고난받는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배반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아세라) 같은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알은 농사의 풍요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남신이며 아스다롯 즉 아세라는 다산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여신이다. 주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농사풍요도 자녀의 생산도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부족들이 믿던 신들을 믿어야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우상들을 섬겼으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블레셋을 일으켜 징계하신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된 사무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우상을 없애는 일인데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20:3-5) 3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사무엘 선지자는 그동안 은밀하게 섬겨왔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미스바 성회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기로 다짐하자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삶에서 우상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들이 만든 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성회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7:8)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였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금식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쳐들어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우박이 떨어지니 아무리 강한 블레셋 군대라 하더라도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추격한 그 곳에 돌로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기념비를 에벤에셀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7:12)는 뜻입니다. 그 후 블레셋은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였고 후에는 빼앗겼던 에그론에서부터 가드까지 회복하였습니다(삼상7:14).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우상을 얼마나 숭배할까요? 아니 교회다니면서 우상을 숭배한다고? 교회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우상은 섬기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정말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우상입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하면 쾌락이 우상이 되고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고 자식을 더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성도들이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좋아하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인데 우리들의 삶속에 위와 같은 우상들이 있다는 것은 그 우상이 언제나 나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들은 결국 “나”인 셈이다. 즉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기쁘게 하면 결국 내가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알고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어도 이런 “나”라는 우상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런 우상숭배는 불의한 자들이 하는 것이며 천국행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토색(속여서 빼앗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날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여기에서 나는 해당안된다고 하는 목사가 몇이나 되겠으며 또 대부분 목사들이 자신업적을 내기위해 교회를 크게 짓고 성장시킨다고 한다면 그것도 자신의 업적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우상숭배하는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안목이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들을 위해 살아간다고 한다면 이는 주님의 교회가 마치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못한 강도의 소굴, 범죄의 집단으로 까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고 주구장창 외치는 그 목사나 그 교인들은 이제 자신들은 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날마다 주여 주여 할지라도 빛 좋은 개살구처럼 막상 그들의 삶속엔 주님을 위한 삶은 온데 간데 없고, 모두 하나같이 주님보다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중 시내산 밑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우상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다 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고로 사도 바울은 우리 몸에 대해 기록하기를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셨으므로 우리 몸의 주인은 주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님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지금 한국교회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이런 우상숭배자들이(빌3:19) 교회들 마다 가득차서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불신자들조차 교회가 이렇게 타락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살리고자 하늘나라 영광 버리시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멸시천대를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런 망극한 은혜를 잊고서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히 멸망 받을 불신자들처럼 산다면 우리들은 배은망덕한 자요 그 분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망령되게 하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분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 지난해 불순종했던 것들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지내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받으면서 새벽에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으면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하였을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격하는 애굽 군대들을 수장 시켰으며 광야에서 목이 말랐을 때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하셨고 또 르비딤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기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주셨고 옷이 헤지거나 신발이 닳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불만인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민14:2-3)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3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아내와 자녀들이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이 말은 가나안 정탐군들이 정탐보고를 듣고 우리가 미리 본 가나안땅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거대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 땅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한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차라리 출애굽하지 않고서 이집트 땅에서 죽었으면 좋았다는 이런 불순종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와 같은 불평과 불순종으로 얼룩진 40년의 세월을 싯딤 땅에 묻어 버리고 정결한 심령이 되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배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강 물속에서 돌들을 취하여 길갈 땅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2024년의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다시는 지난날의 잘못된 죄악들을 되풀이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하고 마음속에 기념비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들도 이 시간 지난해의 모든 불순종한 것들을 역사의 뒤안길에 영원히 묻어 버리고 다시는 지난날의 죄악들을 되풀이 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생활로 시작하는 한해가 되어지기를 믿습니다.
(3) 이제까지 지켜주셨던 것을 감사하자
지난해에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물질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말 우리 모두들 엄청난 고생을 하였음에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과 가정과 각종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도 도우셨고 광야에서도 도우셨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도우셔서 지금 쳐들어온 블레셋을 물리쳐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올해도 여기까지 도우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오늘도 도우실 것이고 내일도 도우실 것이고 올 한해에도 도우실 것이고 세상 끝날까지 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은 고난중에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리 레빈이라고 하는 50대의 미국 해외 특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에서 취재를 하다가 회교도들에게 잡혀 독방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대개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은 한 달이 채 못되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역시 독방에 감금된지 며칠이 지나자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났는데 아내는 평소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니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서 그는 혼자 생각하기를 “그렇지. 여기까지 내가 지내온 것은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내가 왜 외롭게 지내는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 감옥 안에서도 저를 돌봐주시고 나가게 하옵소서” 무신론자가 독방에 갇히니까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있던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났고 기쁨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가둬 놓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없어지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년 후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무신론은 완전히 떠나버렸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막 주께로 돌아온 자들에게도 변함없이 도와주시는 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미스바에서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은 그 후 에그론, 가드까지 빼앗겼던 땅을 찾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인데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로 이스라엘 땅 중에 가장 기름진 땅에 속하는 땅을 다시 찾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두 사람의 잊지 못할 사건을 마음속에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시나무 불꽃속에서 모세를 만나주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고래뱃속에서 요나를 구원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실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가시떨기나무가 불꽃속에 불붙었지만 가시나무가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불이 떨어져도 우리들을 태워 없애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 요나가 고래뱃속에 3일간 있었으나 고래가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토해내듯이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토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건한 신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나 요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반드시 구원된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고 요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올 한해에도 우리들을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돕고 내일도 도울 것이고 영원토록 도우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하루를 마감하는 목동들과 같은 감사의 찬양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매일 누구에게나 86400원을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
지난 한해를 도우신 하나님께서는 올 한해를 선물로 주셨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3600초인데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86400초인데 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86400원이라 돈이 매일 각자 통장계좌로 입금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쁠까? 그러나 그 돈은 저축할 수 없으며 그날 밤 자정이 지나면 남은 돈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든지 그날 선물로 받은 그 하루를 함부로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고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시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 현재(present)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귀한 선물(present)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소중함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누가 일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재수하는 학생에게 물어본다면 일년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달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미숙아를 낳았던 산모에게 물어보면 한달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주간의 소중함을 알까? 선데이 주간지를 내는 편집자에게 물어보면 한주간의 소중함을 말하여 줄 것이다. 누가 하루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일용근로자에게 물어보면 하루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 시간의 소중함을 알 것인가? 이별을 하는 연인들에게 물어보면 그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일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방금 출발하는 기차를 놓친 그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시라. 누가 1초의 소중함을 알까? 스피드스케이트에서 은메달 딴 선수에게 물어보라. 이처럼 사람마다 시간의 소중함이 다 다를 것이다.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정말 오늘이 어떤 날인가요? 어제 이 세상을 마감했던 자들이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그 날이 바로 오늘 아닌가? 그렇다면 이처럼 시간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우리들이 감사의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지난 한해도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금년 한해에도 해와 달이 우리들을 상치 못하게 할 것이고 재앙이 해치 않도록 도와주실 것이고 북한이 우리들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도우실 줄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가리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마태가 주님의 제자가 된 후 자신의 집에서 주님과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잔치를 벌릴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왜 금식하지 않고 이런 자들과 먹느냐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양가죽 부대에 담아서 발효시켰는데 새 포도주는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내뿜고 팽창하기 때문에 신축성이 없는 헌 가죽 부대로는 포도주를 발효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효중인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게 되고 술도 쏟아지게 되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새 술은 새부대에 넣으라는 의미
양가죽의 기름기를 제거하면 물이나 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그릇이 되므로 옛사람들은 양가죽으로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 삼았습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과정에 가스가 발생할 때 새 부대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그 가스를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그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란 예수님의 복음과 새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낡은 부대'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로 하는 당시의 유대교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가리키는 말로서 변하지 않은 나의 마음이라고 보면 딱 맞습니다. 유대인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자만에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만 '율법'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둘째는 자신들만 '할례의식'을 한다는 자부심.
셋째는 자신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
이런 선민의식이나 교만심이 바로 낡은 부대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인 중에 주님을 메시야로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몬과 84년 동안 과부로 살아오던 안나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에 사로잡힌 낡은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눅5:32).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의사로서 병자인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라는 전제하에 예수님은 새로운 교훈을 주셨는데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새롭게 변하여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으로 바로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새 술의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터지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복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 준수나 도덕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하는 자들입니다. 새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첫째,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잠언 4장 23에서 무롯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인데 새 부대는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낡은 부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새 언약이요 곧 새 포도주이니 그분을 믿는 우리들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만 얽매어 사는 인생은 발전이 없습니다. 과거를 토대로 새로움을 개척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키며 윤택하게 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유한한 그 짧은 세월도 이미 반은 써버린 상태라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정말 필요한데 사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부입니까? 명예입니까? 부와 명예는 왔다가도 사라지는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금보다 귀한 시간을 사용하여도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부모를, 내 식솔들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사랑해야 하고 또 우리의 삶 자체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감사하고, 이웃과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오늘도 내가 일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 주변에 나에게 말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것처럼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늘 이웃을 사랑하면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엔돌핀도 솟아나서 건강과 젊음도 유지할 수 있고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남에게 누가 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좋은 이웃들을 만나기 위해서 먼저 우리들 고집들을 버렸을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확언컨대 생각만 바꾸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2024년엔 우리 우리이웃에 대해 더욱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며 우리들 마음의 공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꾸며 나가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새해에는 영육간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현대의학은 예방 의학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들이 700만명 정도이며 국내적으로 35000명이라고 합니다. 누가 이 코로나에 걸려 사망에 이르렀는가? 평소 폐가 건강하다면 코로나병균은 몸에 들어오더라도 힘을 못 쓰지만 만약 저항력이 약하면 병에 쉽게 걸리게 되는 것이니 이럴 때일수록 건강관리를 잘해서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몸은 영과 육과 혼이 한 몸으로 되어 있으므로 육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외형이고 실은 영혼이 우리 몸의 실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믿고 전할 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현대인에게 건강을 해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온다고 해도 찬송과 기도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예배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육을 위해서는 식사도 거르지 않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영혼을 위해서는 예배를 통해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사람들 속에는 ‘죄악의 쓴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이 가득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죄악의 쓴물도 해결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59:1-2) 1 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므로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쓴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힘이나 지식이나 수고로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로만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표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하기 위하여 한 나무를 던지라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 나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나무의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만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게 길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에게만 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쓴 물들을 단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쓴물인 미움과 분노는 먼저는 자기를 파괴하고 후에는 그 미움과 분노를 토해낸 쓴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독이 퍼지면서 파게 시키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음의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은 말하기를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과 같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역설했는데 그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 박사를 비평하고 비난하자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는데도“ 화를 내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인내와 온유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화, 분노, 신경질과 같은 감정과 함께 맺힐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개를 묶어놓고 4시간 동안 마구 때렸더니 개는 바짝 독이 올랐다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개를 풀어 놓으면 누구든 물어 죽일 듯이 약이 올랐을 때 주사기로 피를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보통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라 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고 하니까 혈기를 부리고 미움을 품으면 몸에 독이 생겨 일찍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을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속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는 비결이 곧 예수를 믿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음에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생기게 됩니다. 아담이 범죄 하자 두려움 마음이 생겨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이 발달해있지만 예수님을 떠나 죄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이유는 과거보다 죄악이 난폭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분석했더니 대부분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자기 약점에 대한 두려움이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그것뿐 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을 읽어 보기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의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후, 염려 불안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미국 시민은 백만 명이 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죽은 군인 수보다 그들을 보내놓고 염려와 불안으로 심장마비로 죽은 가족이 세배 반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워싱톤DC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는 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였습니다. 링컨은 전쟁과 관련된 모든 두려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받았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산 소망 때문에 어떤 절망에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벧전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상속유업을 받게 하셨으니.
인간이 아무리 죽음앞에서 두려울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산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소망을 주는 말씀이십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배경을 잠깐 소개 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때, 그가 17세 되던 해, 그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영국인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다 무너지고 자기 가족들이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 매어 자살할 생각을 했는데 그때, 어떤 목사가 성경책 한 권을 주었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 땅에 와서 숱한 은혜를 베풀었건만,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절망적인 상황과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던 그 장면이 몰트만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며‘ 아! 나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가 있구나! 나의 가슴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다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하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겨서 그는 소망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무릎 꿇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게 된 후 몰트만의 삶은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새해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깊이 생각하면 불안과 공포는 물러가고 승리의 깃발을 날릴 수 있습니다.
(3)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야 영육간이 건강합니다
육신의 건강은 하루 밥 세끼를 잘 먹고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각자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적 체력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보약먹더라도 운동부족이면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신앙생활도 내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읽고 암송하고 찬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의 제물입니다. 찬양은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이어지는 것인데 한 주에 한곡씩이라도 외우면 이러한 말씀 암송과 찬양 외우기는 뇌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치매 예방에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4년에는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니 각자가 건강관리를 잘하여 하루하루 죄로 만연된 이 세상을 선으로 싸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앙생활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노력하고 마귀세력과 싸워서 승리하였을 때 오는 결실입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누릴 날이 올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세가 가까워지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서 날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