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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년~1921년)
흔히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루소와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플라시도 도밍고를 비교할 때 누가 과연 더 뛰어난 테너일까?"하고 말이지요. 우리가 요즘 CD로 재생되어 듣는 잡음속에 섞여 힘겹게 나오는 카루소의 음성과 디지털 녹음에 마크레빈슨 앰프를 통해 듣는 파바로티나 도밍고의 힘자고 시원한 노래를 들을 때 성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생기는 의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파바로티와 도밍고 자신들은 카루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1990년대 중반 영국 데카社에서 시판한 [파바로티와 이탈리아 테너들 / Rondo L.D 440-071-268-1)서두에서 파바로티는 카루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테너들에게 카루소란 존재하는 하나의 건물의 기초라 할 수 있다. 그 건물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무거우냐에 관계없이 그는 바로 그 건물의 기초이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내가 노래를 하려고 시작할 때 그는 내 마음속의 스승이었다."
튜욕 메트로 오페라에서 발행한 [오페라 백과사전]의 카루소 페이지를 도밍고가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훌륭한 테너 이름을 열거하라고 하면 여러명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테너로서의 모든 것을 갖춘 한 거인, 즉 모든 테너에게 하나의 신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엔리코 카루소이다"
그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음량, 파워, 감정의 표현, 그것은 신이 그에게 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오페라 가수로서의 생활중에 내가 노래하는 중에 문제점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의 레코드에서 해결점을 찾는다."
카루소의 후계자를 논하는 것은 그의 무덤에 대한 모독과 같다.
파바로티나 도밍고는 카루소가 죽은(1921년) 뒤에 태어나서 그의 육성을 들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카루소의 생존 당시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흔히 [제2의 카루소]라는 칭호를 듣는 메냐미노질리(1890~1957)는 카루소가 죽은 후 1921년 11월 [어메리칸 뮤지컬]지에 이렇게 기고했습니다.
"카루소의 후계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탈리아 아니 전세계의 성역인 그의 무덤에 대한 모독이다."
카루소의 친구이자 당시의 유명한 바리톤 안토니오 스카티(1899~1936)는 "카루소의 대를 이을 테너가 있을 수 없다. 그는 앞으로 영원토록 최고의 테너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루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테너는 큰 입과 큰 가슴, 그리고 90%는 기억력, 10%는 재능 그리고 많은 노력과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사실 그의 기억력은 가히 초인적이었습니다. 불과 2년의 정규 교육과 3년간의 불규칙적인 레슨 밖에 받지못한 그는 67개의 오페라를 불렀고, 7개국어로 이야기 했으며 4개국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에 대한 믿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그 당시 오페라 가수들의 건강을 전문적으로 돌보았던 런던의 의사 윌리엄 로이드는 카루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루소의 신체 구조는 노래하는 기계로서 완벽하다. 첫째 그의 앞치마에서 성대까지 길이가 어떤 가수의 그것보다 적어도 더 길었고, 성대 자체의 길이도 내가 본 그 누구의 성대보다도 더 길었다.
어느날 그가 등을 벽에 붙이고 서서 숨을 완전히 내쉰 후에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가슴에 붙이고 숨을 들이쉴 때 그 무거운 피아노가 몇 센티나 밀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관중들 앞에 설 때의 정신적인 자세가 두고 두고 후세의 테너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관중들이 "많은 돈을 주고 왔는데 그들이 나에게서 기대하는 것보다 150%더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뉴욕에서 공연 할 때는 한 번 공연에 2,500달러 이상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관중들의 기대가 너무 커서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약 2년 전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지휘자 볼프강 자발리시가 자기는 앞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또 요즘 오페라 가수들은 인기와 돈에만 집착해서 예술적인 면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베냐미노 질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성악가는 카루소가 남긴 예술적인 유산을, 즉 참된 음악의 순수함 그리고 아름다운, 그로 인한 참된 예술의 승리, 우리는 이것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
어릴 때 부터 노래를 좋아했지만 유년 시절의 꿈은 마도로스
카루소는 1873년 이탈리아의 나폴리의 한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문헌에 카루소 앞에 17명의 아이들이 다 죽고 열 여덟번째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카루소 자신도 "16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었다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1866년에 결혼할 때 어머니 안나 빌디니가 27세였고, 결혼 7년후 엔리코 카루소가 태어났으니 카루소 이전에 17명의 아이가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카루소는 1873년 2월 26일에 태어났는데 같은 달에 역사에 남을 두 오페라 가수가 태어났습니다. 영국 왕실에서 가수로서는 최초로 작위를 받은 클라라 버트(Clara Butt. 알토)와 그 유명한 베이스 샬리아핀(Fedor Chaliapin)이 같은 달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숙현되지 않은 그의 노래는 남들에게 그저 시끄럽게 들릴 뿐이어서 아버지의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기계공이었떤 그의 아버지는 아들 엔리코가 자기처럼 기계공으로 일하기를 권했고, 실제로 엔리코 카루소 자신도 기계 조작하는 것을 퍽 좋아했습니다. 그가 열 세 살때는 기계공으로 일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그가 훗날 축음기 회사인 빅터社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카루소는 어린 시절 고향 나폴리의 여느 아이들처럼 큰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후에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비행기가 없던 그 시절 배를 타고 수없이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 북미, 남미 등의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카루소의 음악적인 소지을 높이 평가해서 열 한 살때는 그 동네에 사는 아말리아 니올라에게 레슨을 받도록했습니다. 니올라는 좋은 선생이었느나 무척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불과 몇 달 후 뺨을 한 대 맞은 엔리코 카루소는 그 레슨도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그 지방의 합창단에 들어가서 교회, 결혼식, 부둣가 카페등에서 적은 돈을 받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첫 오페라 무대는 22세 때, 24세 때에는 푸치니의 오디션에도
카루소에 대한 문헌에는 항상 그를 가르친 스승으로 기글리모 베르기네로 되어 있으나 그는 별로 뛰어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카루소를 오디션한 뒤 카루소의 목소리가 "너무 작고 유리창을 울리는 바람소리 같다"고 하면서 가르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 부잣집 아들로 영향력이 있었던 미시아노가 우겨서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허락했으나 레슨비를 낼 돈이 없었던 카루소에게 노래하는 5년간의 수입의 1/4을 자기가 차지한다는 계약을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5년 후 그와 그 스승은 노래하는 5년간의 계약상의 의미를 가지고 재판을 하게 됩니다.
카루소는 그 선생으로부터 항상 괄세를 받았습니다. 언젠가 어느 기자가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음악을 배웠다."
카루소는 20세때 군대에 갔습니다. 마침 부대장이었떤 니글리아티 소령은 그의 노래를 듣고 성악과 피아노에 조예가 깊었던 코스타 백작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코스타 백작은 카루소가 입대한 지 불과 45일만에 그를 제대시켜주고, 그 자리에 카루소보다 두 살 아래 동생인 조바니를 대신 징집해 넣었습니다. 카루소가 훗날 성공한 후에 니글리아티 소령의 은혜를 항상 잊지 못하고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폴리 주위 도시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름이 신문에 처음 보도된 때는 스물 한 살때(1894년)였습니다. 그대 지휘자였던 롬바르디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목소리는 바리톤에 가까운 테너였으므로 높은 음을 발성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카루소가 오페라 무대에 처음으로 섰을 때는 스물 두 살 때로, 나폴리 극장에서 모렐리작[L'Amico Fransesco]였습니다.
카루소는 스물 네 살때(1897년) 골도니 극장에서 푸치니의 [라보엠]을 부르기 위해 푸치니의 오디션을 받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반주를 하던 푸치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러나 고함을 질렀습니다
"당신을 누가 나에게 보냈고? 하느님께서 보냈소?"
1995년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가장 위대한 기수로 선정
27세때(1900년)에 토스카니 지휘하에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라보엠]을 불렀습니다. 그의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02년 2월에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소프라노 넬리 멜바와 몬테카를로에서, 그리고 3월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베르디작 [리골레토]를 부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다음달 4월 11일,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그의 역사적인 첫 레코드 취입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어떤 문헌에는 Pathe社와 Zonophone社에서 1901년에 녹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Zonophone社가 1903년 4월, Pathe社가 1903년 10월에 실린더에 녹음한 것으로 확인됨)
그라모폰社와 녹음한 3분 내외의 곡 열 곡 중 [토스카]중 "별은 빛나건만" (그라모폰 #52349)의 음반을 통해 들은 뉴욕 메트로 극장의 감독은 1903년 11월 시즌 오프닝 프로인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역을 맡겼습니다. 그의 나이 30세때의 일이었는데 그로써 그는 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21년 8월 2일 교향 나폴리에서 늑막염 후유증으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5년 12월 31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 년동안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엔리코 카루소를 가장 위대한 가수로 선정했습니다.
다정 다감했던 카루소, 장난기 또한 유명해 에피소드도 많아
1995년 12월 31일자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1천년 동안 최고의 작곡으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선정했습니다. 카루소는 위대한 테너로서 존경을 받아왔지만 인간 카루소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카루소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특별한 교육이나 레슨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부둣가에서 몇 푼의 적은 보수를 받고 여객선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이 교회 저 교회의 음악 행사에 솔리스트나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훗날 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되어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폴리에서 가난하게 자란 "서민 카루소"로서 변함이 없었습니다.
카루소는 친구 사귀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아무나하고 어울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독일, 영국, 스페인 등 많은 나라들의 황제들로부터 최고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뉴욕시의 "명예 경찰서장" 훈장을 받았을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제일 좋아했다는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는 길에서 만난 팬들과 이야기하다가 자기 넥타이핀을 주거나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오페라 티켓을 주는 일은 흔히 있었고, 어떤 때는 음식점에 식사하러 갔다가 음식점 종업원들을 위해 즉석 코메디쇼를 하고 식사하고 있던 손님들의 음식값을 모두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은행에 갔을 때 한 은행 직원이 그가 그 유명한 카루소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루소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러 은행원의 의심을 풀어 주었습니다.
카루소의 장난기 또한 유명했습니다. 오페라 공연 도중 어느 가수가 모자를 쓰려고 하니 뒤집혀 놓여 있는 모자안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고, 어느 가수는 코트를 입으려 하니 누가 소매를 바늘로 기워 놓아 무척 당황했습니다. 모두 카루소의 짓이었습니다.
따듯한 인간애로 동료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1908년 그의 불멸의 연인 아다가 그를 배반하고 카루소의 자동차 운전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했을 때 그는 크나큰 충격 속에 심한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카루소를 극진히 돌보아준 정원사로 일하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 하인이 고맙게 생각되어 그는 독일에서의 오페라 공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독일 활제 빌헤름2세가 카루소를 단둘만의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원사와 같이 갈 수 없다면 그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빌헤름 2세는 카루소에게 "만일 내가 독일 황제가 아니었다면 당신의 정원사가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묵고 있는 호텔에 들어가던 카루소가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모피 코트를 벗어서 입혀 주는 것을 보았다고 뒷날 그 당시 유명했던 프리다 헴펠(소프라노)이 회고했습니다. 카루소가 죽은 뒤 그가 살아있을때 정기적으로 수표를 보내 재정적으로 도와주던 120명의 명단이 발견되었습니다 .
그는 많은 레코딩을 남겼는데 독창곡이 실린 수많은 명반이 있습니다. "의상을 입어라(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빅터 88061", "그대의 찬 손 (푸치니의 라보엠) 빅터 88002", "정결한 아이다(베르디의 아이다) 빅터 88127", "별은 빛나건만(푸치니의 토스카) 빅터 87044", 그리고 "라셀이여 너의 요람을(발레비의 유태여인) 빅터 88625"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테너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주옥 같은 중창곡들이 녹음된 명반들이 있습니다. 인간 카루소의 일면을 보여주는 음반들입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된 때와는 달리, 그때는 많은 오페라 가수들이 같은 기차 혹은 배를 타고 장기간 공연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에 따르는 가수들간의 대인 관계의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훗날 테너 존 맥코맥은 "내가 카루소와 14년 사귀는 동안 한번도 그가 다른 가수들의 흉을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항상 동료들을 여러모로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베이스를 부른 카루소, 관객은 물론 평론가도 눈치 못채
1913년 필라델피아 푸치니의 [라보엠] 공연을 위해 뉴욕에서 출발한 기차안에서였습니다. [라보엠]의 콜리네 역을 맡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스페인 출신 베이스 드 세귤로라가 목이 잠겨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 같다고 큰 걱정을 했습니다. 카루소가 웃으면서 "걱정마 내가 대신 부를께"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 세귤로라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베이스 아리아로 유명한 "Veccia Zimarra, Senti(안녕 낡은 외투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페라 공연시 드 세귤로라는 2막까지는 무사히 넘겼습니다. (3막에는 콜리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없음). 4막에서 콜리네가 "Veccia Zimarra, Senti(안녕 낡은 외투여)"를 부를 때가 되었습니다. 드 세귤로라는 도저히 그 곡을 부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몹시 급해진 그는 카루소 옆에가서 남이 들리지 않게 애원했습니다.
"제발 대신 불러주게" 그러나 테너가 바리톤곡도 아닌 베이스 아리아를 부른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카루소도 크게 당황했습니다 .
"안돼, 가사도 기억이 안나"
하지만 상황은 급했습니다. 극중에서는 차디찬 방안에서 미미는 죽어가고 무젯타는 보석을 팔아 미미의 약값을 구한다면서 방을 나가고 이제 콜리네가 헌 외투를 팔러 나가야 했습니다. 마침내 오케스트라 지휘자 폴라코의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카루소가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하고 드 세귤로라는 모자로 얼굴을 약간 가려 노래를 부르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거기 앉아 있던 관중들은 물론 신문사에서 나온 음악 평론기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드 세귤로라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베이스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오나벽해서 마치 첼로를 드는 것 같았다."
주의 사람들의 권유로 1916년 빅터社가 카루소의 베이스 노래를 녹음했으나 그 당시의 음반으로 발매되지 않고 카루소가 죽은 후에 RCA社에서 1930년대에 기념판을 발매했습니다.
역사상 최고로 일컬어지는 티타 루포와의 이중창
당대의 최고의 바리톤이라면 누구나 티타 루포(Titta Ruffo 1877~1953를 지명합니다. 테너인 카루소의 아들 카루소 2세는 당시 카루소와 버금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는 루포라고 했습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자기 생애에서 만난 가수들 중 가장 훌륭한 오페라 가수로 카루소와 루포, 그리고 소프라노 테트라지니를 뽑았습니다. 카루소와 루포의 오페라 [오텔로] 중 "대리석 같은 하늘에 맹세한다"는 역사상 최고의 이중창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이야고의 거짓 모함으로 아내의 부정을 확신하는 오텔로와 이야고가 복수를 맹세하는 아리아입니다.
타마뇨, 제나텔로와 더불어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오텔로 중 한 사람인 플라시도 도밍고도 이 음반(빅터89075)를 카루소 음반 중 최고의 명반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카루소는 어떤 이유인지 실제 오페라에서는 한번도 오텔로 역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19세기말의 오텔로 역의 전설적인 가수 타미뇨는 1905년에 죽었고 또 문헌에 보면 카루소는 무어종족(오텔로는 유색인종인 무어족임)에 흥미가 많아 자기방으로 무어족 가구로 장식하고 집안에서 무어종족의 옷을 자주 입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카루소는 언젠가 자기가 부를 오텔로 역을 위해 준비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카루소는 [오텔로] 중 이 곡 말고도 또 한 장의 음반(빅터 87071, 안녕, 영광이어)를 남겼습니다.
안토니오 스카티와의 완벽한 이중창
카루소에게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친했던 친구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인 바리톤 안토니오 스카티였습니다. 카루소보다 더 일찍 세계적인 가수로 알려졌던 스카티가 1902년에 카루소를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데뷔하도록 주선했습니다.
카루소와 스카티의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중 이중창 "최후의 부탁이다(빅터 89001)"는 카루소 최고의 명반 중 하나입니다. 1906년에 녹음한 이 음반은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카루소의 음성과 스카티의 음성을 구별할 수 없는 완벽한 이중창이어서 어느 부분을 두 사람 중 누가 부르는지 구별할 수 없어 많은 사람의 논쟁을 유발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빅터社는 많은 음반의 뒷면에 하얀 글자로 가사를 프린트해서 발매하기 시작했습니다. (1902~1923까지의 클래식판은 단면만 녹음되어 있음)
카루소의 아들 카루소2세는 자기 아버지의 많은 재능 중 가장 특이한 재능은 다른 가수와 같이 노래를 할 때 그 가수의 음성에 맞추어 자기의 음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재능이었다고 기술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가 191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카루소가 오페라 [리골레토]에 출연할 때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는 "카루소가 다른 가수들과 중창을 부를 때는 솔리스트의 표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감탄했습니다.
미모의 소프라노와 아룬 황금의 콤비, 제랄딘 파라와의 사랑의 이중창
당시 미국 오페라 무대에서의 주연급 가수들은 거의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때 미국사람들의 자존심을 지켜 준 두 사람의 소프라노가 있었습니다. 엠마 이엠스와 제랄딘 파라였습니다. 특히 뛰어난 미모로 영화 배우로도 활약한 파라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파라가 처음 세계 오페라계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습니다.
특히 독일 베를린에서의 1904년 공연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파라는 뉴욕 메트로 오페라에서 푸치니의 [나비 부인]을 부른 최초의 가수였습니다.(1907년) 카루소와 파라는 황금의 콤비로 두 사람이 오페라에 같이 출연할 때는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이 세기의 콤비가 오페라 [나비 부인] 1막 마지막 부분의 핑커튼과 나비 부인이 첫날밤에 부르는 달콤한 사랑의 이중창을 녹음했습니다. (빅터 89017, 1908년 레코딩)
제랄딘 파라와 카루소는 1904년 3월 몬테칼로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파라가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리허설 때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는 나는 느끼지 못했으나 우리가 실제 오페라 푸치니의 라보엠을 공연할 때 그의 엄청난 성량에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만일 지휘자가 나에게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뻔 했다."
카루소와 미모의 소프라노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친분 이상의 것으로 많은 소문이 있었으나 두 사람만의 비밀로 묻혀버렸습니다. 훗날 제랄딘 파라는 토스카나니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루치아]중의 6중창, 이 아픔을 그 누가 억제할 수 있으리..
빅터社의 음반 발매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음반이 있습니다. 도니제티 [람메르모의 루치아] 중 2막 마지막의 잘 알려진 6중창입니다.
"이 아픔을 그 누가 억제할 수 있으리(빅터 96200)"
루치아는 오빠의 계략에 속아서 자기 애인 에드가르도가 자기를 배반한 것으로 오해해서 오빠가 원하는 세력가와 결혼하기로 승락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이제 막 결혼 증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때 그의 애인 에드가르도가 도착해서 그 또한 루치아가 자기를 배반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소프라노, 테너 등 다섯 명이 각각 전혀 다른 감정으로 부르는 오페라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빅터社는 1908년에 카루소, 소프라노 셈브리치, 바리톤 스카트 등 세계 정상급 가수들을 동원하여 이 곡을 녹음했습니다. 음반 자체가 명반이었으나 그것보다도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은 다름아닌 가격이었습니다. 그때 영국 그라모폰社에서 녹음한 것을 수압 판매한 타마뇨, 멜바, 파티 등의 음반만 특별히 $5, 다른 정상급 가수들의 단면 음반이 $2 혹은 $3였고 클래식 판이 아닌 일반 음반은 양면 레코딩에 $0.75~$1였습니다. 그때 $7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빅터社의 예상은 맞았습니다. "여섯 명의 세계 정상급 오페라 가수의노래를 집안에서 들을 수 있다"는 기치를 건 이 판은 곧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불과 5분짜리 단면 녹음의 음반에서 $7라는 가격은 1970년대 디지털 녹음 LP가 나올때까지 무려 70년가까이 기록을 유지했습니다.
빅터社는 이 곡을 세번 녹음했습니다. 세 번 모두 에드가르도 역을 카루소가 맡고 루치아 역은 20세기 초반 최고의 소프라노들인 셈브리치, 테트라지니, 그리고 갈리쿠르치가 불렀습니다.
요즘 CD나LP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앞의 세 녹음 중 녹음 상태가 비교적 좋은 1917년에 녹음한 갈리 쿠르치와의 6중창이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