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10/190521]효(孝)에 약한 선배의 마음씀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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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글 작가’를 자처하는 나로선 ‘자유인(自由人)’이 된 지난 3월 이후 생활이 아무래도 밋밋하기에 ‘글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일. 글의 주제나 스타일 등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글 쓰는 횟수가 적을 것은 안봐도 비디오이지 않는가. 이러한 때, 이것만큼은 꼭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까지 든 ‘팩트(fact)’가 생겨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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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간간이 인사를 하고 지내는 고향선배(옆동네)가 있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어릴 적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7년 선배로 알고 있다(우리 나이로 71세). 77년인가, 돈암동 표구사 앞을 지나는데 ‘자네, 누구 동생 아니냐’며 아는 체를 했던 것같다. 그분은 그 가게에서 표구일을 배우고 있다 했다. 외로운 서울생활에 만난 고향 선배이기에 무척 반가웠다. 가끔 들르곤 했는데, 79년 공덕동에 표구사를 차려 독립을 하였고, 그곳에서 2008년까지 자리를 지키다, 현재의 아현동 굴레방다리 고개로 옮겼으니 햇수로 40년 동안 표구작업만 외곬로 한 것이다. 우연히 훌륭한 스승을 만나 문인화를 틈틈이 익혔는데, 개인전만도 인사동에서 2회 가졌고, 각종 대회에서 최우수상 등도 거머쥔 중견 문인화가가 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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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초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에 축하방문을 했는데, 30여개의 작품이 모두 좋았다. 모란꽃 그림을 보고 불쑥 뜽금맞은 부탁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선뜻 1월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그림 한 폭을 그려주겠다고 해 깜짝 놀랐다. 전시회 작가들의 작품은 크기에 상관없이 최소 200만원 이상 된다는 것쯤을 알고 있는데, 돈을 드릴 처지도 안되니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선배는 “당신이 어머니를 위한 그 마음이 고맙다. 작품값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해 나를 더욱 감격시켰다. 약속은 곧바로 이어졌다. ‘獻牡丹畵於愚泉先慈堂’(우천 최영록의 돌아가신 어머니께 모란화를 그려 바치다)라는 화제(畫題)로 가로 45 ×세로 37cm의 멋드러진 문인화를 품격있게 표구까지 하여 선물한 것이다. 모란은 부귀와 영예를 상징하는 ‘꽃 중의 꽃(花王)’이다. 이건 누가 봐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우리 아버지의 근황을 묻더니 아버지께 드리라며 당신이 직접 그린 그림의 합죽선까지 주는 게 아닌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재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위에게도 “요즘 세상에 아흔이 넘은 장인을 모시는 그런 고마운 친구가 어디 있느냐”며 부채 하나를 더 얹어준다. 이건 숫제 ‘감동의 도가니’이다. 내가 뭐라고, 무엇 하나 해드린 게 있다고, 이런 귀한 선물을 하나도 아니고, 3점이나 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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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배 말씀은 이러했다.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부러운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인데, 당신은 그러지 못했던 게 마음에 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 효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 고마운 마음이 들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데, 당신이 가진 재주가 그림을 그리고 표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까 부담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선배는 나의 아버지를 옆동네이고 누구누구의 아버지니까 말은 많이 들었어도 잘 알지 못한다. 더구나 나의 매제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처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걸까? 말씀만 그리해도 고마울 일이지 않는가. 어찌 이런 고마운 선물을 어찌 그냥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받지 않을 게 뻔하므로, 가게를 나오면서 벽에 걸려 있는 선배의 잠바주머니에 얼마 안되지만 지폐 몇 장을 찔러둔 채 부리나케 돌아서는 길, 선배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워 찔끔 눈물까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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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를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 성품이 태생(胎生)부터 ‘진국’인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정말로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줄 줄은 몰랐다. 전라도 탯말로는 ‘고진 중의 고진’이다. 고진은 ‘법 없이도 사는 선한 사람’을 이른다. 어느 동네나 고진이 한 명쯤은 있었다. 동네의 온갖 궂은 일을 솔선수범하여 하거나, 남에게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고 자기 손해도 묵묵히 감수하는 사람, 서양으로는 ‘사마리아人’인 셈이다. 선배는 주변에 ‘선(善)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낯도 모르는 남의 집 사위도 효도라는 관점에서 고마운 것이었으리라. 선배가 그려준 모란화는 스캔을 하여 어머니가 안계신 채 처음 맞는 어버이날에 맞춰 펴낸 <어머니, 봄이 왔어요>라는 사모곡 책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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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생각난 이야기를 덧붙어야 한다. 30년 전인가, 선배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87폭 병풍 제작을 부탁했었다. 그해 추석 전날 그 병풍을 메고 우리집 고향 대문 앞을 들어서던 선배의 모습이 뚜렷히 떠올랐다. 당시 40만원을 달라고 했던 것같은데, 지금 말로 하면 ‘껌값’, 거저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고 차례를 지내거나 선조들의 제사때 병풍을 쓰겠다고 하니 거의 무료봉사를 해준 것이 틀림없다. 당시 문인화 7폭의 그림값만 해도 얼마였을까? 그 병풍은 지금도 고향집에 잘 모셔져 있다. 직장 초년병이었던 내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인데, 그때 40만원이면 지금 얼마나 될까? 이제 와 생각하니, 새삼 고맙지 아니한가. 세상은 이런 선한 분들의 착한 마음과 마음들이 모여 굴러가는 것이리라.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같은 세상일지라도 ‘한 줄기 빛’만 있다면 살만하지 아니한가. “제가 뭐라고?” 이렇게 귀한 선물들을 연거푸 주시다니요? 이 꼭두새벽에 오직 선배의 순정(純情)의 마음씨에 찬탄과 경의를 표합니다. 선배, 참말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