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교수님의 판비량론 관련 글을 인터넷에서 보다가 궁금증이 생겨서 여쭤봅니다. 정인 부정인 불성인 상위인에 대해서는 설명이 있는데, 불공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서 그런데, 불공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입니다.
정인(正因), 부정인(不正因), 불성인(不成因), 상위인(相違因) 그리고 질문하신 불공인(不共因)은 원효 스님의 <판비량론>에서도 거론되지만, 더 넓게는 불교인식논리학인 인명학(因明學)과 관련된 전문용어입니다.
인명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불교인식논리학을 개관하면서 답을 하겠습니다.
불교인식논리학에서는 지식을 얻는 수단을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현량은 감각과 같은 직접지각(Perception), 비량은 추론(Inference)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비량은 다시 위자비량(爲自比量)과 위타비량(爲他比量)으로 나누어지는데, 위자비량은 '자기를 위한 추론', 위타비량은 '남을 위한 추론'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눈 앞에 보이는 불, 뜨거운 불은 현량을 통해 인식되고, 먼 산에서 연기가 보일 때, 그 산 어딘가에 있을 불이라는 개념은 비량을 통해 인식됩니다. 현량으로 아는 불은 뜨겁고 밝지만, 비량을 통해 인식한 불은 '개념으로서의 불', '생각 속의 불'이기에 물건을 태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먼 산에서 연기가 보일 때, 그곳에 불이 있을 것이라고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근거를 대면서 이를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 때 서양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유사한 삼지작법의 추론식을 작성해야 하는데, 이런 삼지작법의 추론식을 위타비량이라고 부릅니다. '연기 → 불'의 추론을 위타비량의 삼지작법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장(宗, 종) : 저 산에 불이 있다.
이유(因, 인) : (저 산에) 연기가 있기 때문에
실례(喩, 유) : 마치 아궁이와 같이
이렇게 삼지작법의 추론식에 오류가 없을 경우, 이 추론식에 사용된 '이유(因, 인)'를 '정인(正因), 즉 '올바른 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삼지작법의 추론식에서 세 가지 구성 요소인 주장(종), 이유(인), 실례(유)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잘못 제시되어 있을 경우 이런 추론식은 타당할 수 없습니다. 즉 논리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추론식 중에는, 주장을 잘못 제시한 경우도 있고, 이유를 잘못 제시한 경우도 있고, 실례를 잘못 제시한 경우도 있습니다. 차례대로 사립종(似立宗, 사이비로 세운 주장), 사인(似因, 사이비 이유), 사유(似喩, 사이비 실례)라고 부릅니다.
불교인식논리학을 정립한 디그나가(Dignāga)의 제자로 추정되는 상까라스와민(상갈라주)의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에서는 추론식의 구성요소인 주장, 이유, 실례를 잘못 제시할 경우 추론식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33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를 표로 만들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질문에서 "정인 부정인 불성인 상위인에 대해서는 설명이 있는데, 불공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서 그런데, 불공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라고 물으셨는데, 불공인은 위의 표에서 잘못된 이유(사인) 가운데 부정인 중의 하나인 15번의 불공부정인(不共不定因)을 의미합니다. <인명입정리론>에서는 불공부정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역: 言不共者 如說聲常 所聞性故 常無常品 皆離此因 常無常外 餘非有故 是猶豫因 此所聞性 其猶何等
산스끄리뜨 원문: ②asādhārano yathā śabdaḥ śravaṇatvān nitya iti/ tad dhi nityānityapakṣābhyāṃ vyāvṛttavān nityānityavinirmuktasya cānyāsaṃbhavāt saṃśayahetuḥ/ kiṃbhūtasyāsya śrāvaṇatvam iti//
우리말 번역: ②공통되지 않은 것은 예를 들어 ‘소리는 들리기 때문에 상주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실로 상주함과 무상함이라는 주제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또 상주함과 무상함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들린다는 것이 어떤 존재에 속할 것인지, 의심스러운 이유이다.
위의 우리말 번역은 산스끄리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공통되지 않은 것'이 한역의 '不共(불공)'에 해당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추론식을 다시 풀어서 쓰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장(종) : 소리는 상주한다.
이유(인) : (귀에) 들리기 때문에
이 추론식에는 실례가 누락되어 있는데, '귀에 들리는 것'으로 소리 이외의 실례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삼지작법의 추론식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그 추론식에 사용된 인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인(因)의 삼상(三相)]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1상 - 변시종법성(遍是宗法性): 추론식에서 주장의 주제에 반드시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제2상 - 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한 가지 사례 이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제3상 - 이품변무성(異品遍無性): 다른 경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추론식에서 사용된 이유(인) 명제가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제1상인 변시종법성을 어기면 불성인의 사인이 되고, 제2상인 동품정유성과 제3상인 이품변무성을 모두 어기면 상위인이 되며, 제2상인 동품정유성만 어기면 불공부정인(不共不定因), 제3상인 이품변무성만 어기면 공부정인(共不定因)이 됩니다.
질문에서 "불공인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지금 설명했듯이 삼지작법의 추론식에 사용된 이유(인) 명제가 '인의 삼상' 가운데 제2상인 동품정유상을 어긴 인(因)입니다. 불공이라는 말은 공무(共無)라고 표현하는 게 이해하기 쉬운데, '같은 경우와 다른 경우' 모두(共, 공)에서 인(因)을 충족하는 사례를 찾을 수 없기에(無)에 '공무(共無)의 인(因)'이라는 의미에서 불공인(不共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인명입정리론>에서 예로 든 불공부정인을 갖는 추론식에 사용된 이유(因) 명제가 '인의 3상'을 충족하는지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추론식
주장(종) : 소리는 상주한다.
이유(인) : (귀에) 들리기 때문에
변시종법성의 검토: 귀에 들리는 것이 소리인가? → 그렇다. (인의 삼상 가운데 제1상을 충족함)
동품정유성의 검토: 상주하는 것(同品) 중에 귀에 들리는 것이 있는가? → 없다(전혀 없다: 遍無). (제2상은 충족 못함)
이품변무성의 검토: 상주하지 않는 것(異品) 중에 귀에 들리는 것이 있는가? → 없다(전혀 없다: 遍無). (제3상을 충족함)
어떤 추론식에 사용된 이유(인) 명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인의 3상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귀에 들림 → 소리'의 추론식은 동품정유성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같은 경우(동품)에서도 귀에 들리는 사례를 찾을 수 없고(무), 다른 경우(이품)에도 귀에 들리는 사례를 찾을 수 없기에, 두 경우(공) 모두 사례가 없어서(무 = 불) '불공(不共)부정인(不定因)'인 것입니다.
참고로, 삼지작법의 추론식에 사용된 이유(因) 명제가 상위인인지, 공부정인인지, 불공부정인인지, 정인인지 감별하는 방법으로 구구인(九句因) 이론이 있습니다. 추론식의 인(因)이 '인(因)의 3상' 가운데 제2상인 동품정유성과 제3상인 이품변무성을 충족하는지 검토하는 방법입니다. 디그나가가 창안한 것인데, 이를 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불공인은 이 표에서 ⑤不共不定因(불공부정인)에 해당합니다.
더 공부하실 분들을 위해서 이상의 설명의 근거인 <인명입정리론> 한역, 산스끄리뜨 원문, 우리말 번역 대조본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그리고 20여 년 전에 불교TV에서 <인도불교의 사상과 역사> 강의를 하면서 불교인식논리학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는데, 본 카페에도 강의영상 게시판을 만들어 놓았지만, 아래에 링크 소개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1. 불교인식논리학의 등장과 기본 골격 http://cafe.daum.net/buddhology/UHPx
42. 증인의 종류와 인의 삼상 https://cafe.daum.net/buddhology/UHPx/42
43. 불교인식논리학의 오류론 https://cafe.daum.net/buddhology/UHPx/43
44. 진나의 9구인설 https://cafe.daum.net/buddhology/UHPx/44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네 훌륭한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