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노라.
왕상 8:12~30, 시편 100
고전 3:10~17, 마 12:1~8
창조절 열한째 주일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너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어떻게 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노동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법을 어기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너무 시장하여 자기 부하들과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 주는 성경 대목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 제단의 떡을 먹지 않았느냐? 또 모세의 율법에 보면, 비록 안식일이라도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당번하는 일은 허용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안식일에 시장기를 견디지 못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문제 삼고 있느냐? 그렇게 반문했습니다. 얼핏 봐도 바리새인들에게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편협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두 가지 본문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얼마나 왜곡되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웅처럼 받드는 내용입니다. 다윗과 모세를 인용하면서, 너희가 성경을 봐도 한 참 잘못 보고 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사회적 이슈가 되는 부분을 성경을 통해 말하려 할 때, 내가 제대로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성경이 원래 말하는 내용이 맞는가? 하나님의 뜻도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신중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철저히 믿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임에도 엉뚱하게 인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고 해석해서 자기주장을 펴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성경도구주의에 빠져서 왜곡된 사상을 전할 때가 많습니다. 가장 심각한 상황입니다. 설교나 말씀을 전할 때 내 주장을 성경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깊이 더 생생하게 본질적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성경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그것은 목사가 성도들에게 전달할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교인들도 그것을 이해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성경에 대해 무지하거나 부족한 데 무조건 주장하고 아는 척을 해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을 잘 이해하고 전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인이 아닙니까? 신앙인인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흠을 잡을까, 그런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연유한 것인가, 보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이 갖는 본질이나 그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느 조항에 얽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항목 하나만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트집을 잡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상황이나 처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과 같은 법을 앞세우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하고 공감을 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시장했으면 하는 마음 말입니다.
얼마나 시장했으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까?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와서 면담을 요청하면 무슨 마음이 필요하다고요? 오죽 했으면 이렇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물론 요즘 정황으로 보면, 나름대로의 정황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내세우기 전에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감하고 함께 하고 연대하고 마음을 풀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없습니다. 결국 어떤 것을 이해할 때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자기 편협한 사상이나 생각이 앞서서 오히려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그런 상황까지 전락해서 예수님이 거기에 대 놓고 말씀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느니라.” 성전 안에서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제사의 떡을 먹은 다윗의 일행과 모세의 법에 기록된 성전 안에서 제사장의 안식일 어긴 것에 대한 것은 결국 성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 안에서 벌어진 엄청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해 준 것은 그 성전이나 그 안에서 적용되는 안식일법보다 사람이 더 우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보다 율법의 안식일법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자체도 그것보다 더 큰 분이지만, 사람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말씀으로서의 율법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성전의 건물보다 내가, 주님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성전이나 율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비가 없는 제사, 사랑이 없는 제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남에 대한 정죄, 그것도 성경을 잘 몰라서 무죄한 자를 판단하여 정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대통령도 주권자인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니 저렇게 안하무인이고 여전히 미련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잘 알게 되어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되면, 주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안식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법은 사람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생명존중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법으로 사람을 위해하고 옭아매고 트집 잡고 공격하고 정죄한다면, 법 정신 위반입니다.
지금 정권이 법을 위반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어길 만큼 어겨놓고 국민보고 실정법, 시위하는 법 어기지 말라고 합니다. 참으로 웃깁니다. 이런 후안무치도 없습니다. 여러분, 법이나 제도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보다 귀한 존재가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외경사상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성전이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우리 또한 성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 성전을 더럽힐 수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그랬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전,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권력자라도, 대통령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존엄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더럽히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전포고입니다. 어느 누구도 안식일 법이니 성전이니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도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전 개념을 달리해야 합니다.
3.
열왕기 상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드리는 연설과 기도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한 약속을 언급합니다. 29절에서 하는 말이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이 강했다가, 포로가 되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고, 그러다가 신약에 와서 주님과 바울에 의하면,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 속에 거하여, 그 사람이 성전이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한다 할 때 우리는 사람 건축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만큼 거룩한 존재가 없으니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폭을 넓혀 사람을 잘 세우고 건축해서 성전이 성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사람, 그 성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비를 실천한다면,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자비를 실천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자비를 불교의 용어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은 불교나기독교나 본질입니다. 불교는 자비,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하지만, 제가 불교를 잘 모르니 기독교는 자비와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예배보다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비와 사랑은 종교적 언어라기보다 삶의 언어이고 생활의 언어이고 실천의 언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을 거치면서 엄청난 성전을 지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메시아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참 화신이신, 그래서 삶 전체를 우리를 위해 자비로, 사랑으로 내어주신 주님을 그리스도로 모십니다. 우리 안에 제사보다 자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