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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주먹(그 겸손과 위력)
정영도
(동아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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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상항은 패닉(Panic)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처절한 정신적 상황 역시 황폐와 파국 그 자체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방위(方位) 상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혼란과 무법과 무질서로 인한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 같은 사회에 대한 청년들의 절망 등은 사회 전체를 살벌한 반인간적인 양상으로 전변(轉變) 시켰다.
이 당시의, 즉 휴전 직후의 사회적 혼란은 1945년 8.15 해방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는 그 성격 자체에서 아주 달랐다. 처참한 전쟁에서 전상(戰傷)으로 죽어가는 뭇 사람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면서 사람들의 이성은 마비되고 본능과 충동이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인간상호간의 관계는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동물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충동적인 감정이 오가는 비인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달리 말하면 대화와 타협, 이해와 양보는 찿아볼 수 없고 거칠은 언어폭행과 물리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야만적인 사회적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파행적인 현상들은 일일이 기술할 수 없기에 1950년 초 중반기에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필자로서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했던 약간의 풍조 또는 세태라고나 할까, 지금 돌이켜 보면 낭만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약간의 이야기들을, 말하자면 그 시대 그 시절의 청년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코로나로 인한 홀로있음에서 오는 권태(倦怠)를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구상유취(口尙乳臭)에 속하는 이야기로만 비하(卑下)하지말고 담담한 심정으로 들어봄직 할 것 같아 여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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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사람들은 전쟁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청년 사회에는 기묘한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먹이 센 녀석이 청년 사회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졌고 그를 중심으로 일종의 세력권이 형성되었다. 주먹이 센 녀석이 청년들에게는 한 사람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을 그 당시 청년들은 ‘가다’ 또는‘어깨’라고 불렀다. 가다라는 말은 일본의‘야꾸자’라는 말에서 비롯하는 표현으로서 대체로 싸움 실력이 뛰어난 청년 보스를 ‘가다’(肩), 우리 말로 ‘어깨’라고 불렀다. 예컨대 고등학교에서 싸움 실력이 뛰어난 녀석을 고교생들은‘가다’라고 부르며 그를 추종하곤 했다. 한 녀석이 가다가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과정, 일종의 축구 경기에서 진행되는 토너멘트(Tournament) 같은 과정을 거쳐 최종 승자(勝者)의 자리에 올라서야 가다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다는 오늘날 매스컴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그런 깡패나 또는 조폭과는 그 성격에 있어 전혀 다르다. 깡패는 장돌뱅이나 또는 한 지역사회를 무대로 자그마한 이익사업에 관여하여 푼돈 정도를 갈취하는 건달을 가리킨다면, 조폭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을 활동영역으로 삼고 항상 흉기를 휴대하고 동시에 정당 조직에 가까운 시스템(System)을 편성하여 운영한다. 조폭은 기업에 가까운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경쟁 업체를 압박 하기 위해서는 칼잡이들을 보내어 흉기로 협박 공갈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까지도 스스럼없이 자행한다. 깡패나 조폭은 국가 사회 발전에 장애가 되는 기생충에 속한다.
그러나 1950년대 청년사회에서 일종의 낭만적인 풍운아로서 가다 및 어깨는 젊은날의 객기(客氣)를 바탕으로 힘을 과시할 때의, 즉 젊은날 한때의 혈기를 발산하던 시절의 낭만에 속한다. 1950년대의 학생사회 또는 대학생 시절, 그리고 청년 실업군(實業群)에 속하던, 이른바 기성세대 및 기성사회에 저항하던 다소 지적인 청년군에서 나온 가다며 어깨는 분명히 깡패나 조폭과는 그것이 귀속(歸屬)하는 카테고리(Category)가 전혀 다르다.
학교마다 가다들이 있었다. 두 서너 명의 가다들 가운데 제1인자의 가다가 총가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국경일이며 시 도대항 체육대회며 시민대운동회가 자주 개최되곤 했다. 이러한 큰 행사가 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날에는 각 고등학교 학생 대표단들이 학교의 교기와 악대를 앞세워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행사에서는 반드시 의전 행사가 끝나고 대개는 도심지 간선도로에 나가 퍼레이드(Parade)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독특한 관례였다. 각 고등학교마다 퍼레이드에 있어 선두에 나서고자 경쟁이 심했다. 학교 교기를 앞세우고 뒤이어 학교의 악대가 뒤따르며 그 바로 다음에 당해 고등학교 대표단이 행진에 나선다. 퍼레이드에 있어 선두에서 행진하는 학교가 아무래도 시민들의 눈에 가장 인상 깊게 남기 마련이어서 고등학교마다 자기네가 선두에서 퍼레이드를 진행하고자 했다. 이 때는 교명의 가나다 순(順)도 다른 어떤 규정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도시 전체의 주먹 세계를 천하통일한 총가다가 있는 학교가 행진의 선두 자리를 차지한다. 총가다가 나와서 우리 학교가 선두에 선다라고 선언하면 그것이 일종의 명령이 되고 각 고등학교를 대표하는 가다들이 나와서 서로 기(氣) 싸움을 하지만 도시 전체를 주름잡는 총가다가 나와서 각 가다들에게 쏘아붙이는 레이저 시선에 기가 꺽이고 행진은 스무스(Smooth)하게 진행된다.
한 도시의 총가다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고등학교마다의 총가다들이 심심찮게 그리고 끊임없이 한 도시내 고등학교 전체를 지배하는 총가다에게 도전장을 내곤 한다. 그런 경우에 현재의 총가다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고는 특정한 날짜에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 각 고등학교에서 주먹께나 쓰는 녀석들이 거의 다 싸움판의 관전자로 나온다. 그것은 마치 링 주변에 빙둘러앉아 복싱 챔피언 타이틀전을 관전하는 것과도 같다.두 맞수들 간의 한판의 대결은 시간을 정해 놓고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속칭(俗稱) 치고 박는 치열한 숙명적인 결전이 된다. 이 숙명의 대결에서는 평소 갈고 딱은 싸움 기술이 총동원된다. 관전하는 대표들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실력을 대비시켜 자신의 도전 의지를 스스로 헤아려 본다. 싸우는 실력이 참으로 탁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도전을 포기하고는 무조건 형님으로 모시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1950년대 중반기의 일이다. 당시 필자가 중학교 저학년에 다니던 시절이다. 그 당시 대구시를 비롯한 경상도에 산재해 있던 고등학교 전체를 주름잡던 불세출의 총가다였던 K가 슈퍼스타로 등장했다. K의 별명은 ‘꼿대’였다. 꼿대라는 별명이 무슨 의미를 함축(含蓄)하고 있는지, 필자로서는 지금까지도 아는 바 없다.꼿대는 살인 펀치(Punch)라는 별칭을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과연 그가 싸움판에서 상대자를 하나의 펀치로 살인을 했는지 어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필자는 K의 펀치가 살인적일 정도로 아주 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과장된 표현쯤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꼿대는 하여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1대1 대결에서 한번도 져 본 일이 없는 시라소니와 같은 무패의 타고난 주먹의 소유자였다. 그가 싸움판에서 실력 발휘한 모습을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공중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꼿대는 한국전쟁 직후까지 한국의 주먹 세계를 장악했던 김두한 선생을 방불할만큼 1대1 대결에서는 순간적으로 상대자를 향해 뛰어오르면서 왼쪽 발은 상대자의 교복 상단에 있는 윗주머니의 언저리를 발가락으로 디디고 서면서 오른 발로 상대자의 양쪽 뺨을 후려 갈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글자 그대로 신기(神技)이며 어떤 점에서는 예술일 것만 같다. 관전한 많은 젊은 녀석들은 이것을 보고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 그시절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경상도 학생치고 이 신화적인 사실을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을 정도 였다.
1950년대 중반 어느 뜨거운 여름 날 이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던 꼿대는 패거리들과 더불어 경북 동해안의 영덕 대게로 유명한 영덕항을 찿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러 부둣가, 이른바 선창을 걷고 있었다. 때마침 선창에서 구멍난 어망을 깁고 있던 한 젊은 촌놈 어부의 어망을 무심코 밟고 지나갔다. 촌놈 어부와 꼿대 간에 시비가 일어 났다. 어망을 정성스럽게 깁고 있던 촌놈 어부가 왜 어망을 밟고 있느냐고 항의했다. 화가 난 꼿대가 촌놈 어부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억울하다고 생각한 촌놈 어부가 아주 세차게 덤볐다. 꼬대는 그 순간 촌놈 어부의 턱에 라이트 훅(right Hook)을 먹이고 뒤이어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레프트 훅(left Hook)을 바디(Body, 권투에서는 명치를 의미함)에 명중시켰다. 살인 펀치의 파워(Power)를 지니고 있던 꼿대의 이 정도의 라이트 훅과 레프트 훅의 연결 동작에 의한 가격은 과장하면 황소조차 나가 떨어진다. 그러나 촌놈 어부에게 꼿대의 주먹은 단지 솜방망이에 지나지 않았다. 싸움 실전이라곤 한번도 경험한 일이 없고 지금껏 단순 노동으로, 즉 어부생활만으로 일관해온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촌놈 어부는늘 바다에서 산태(山汰) 같은 파도와 싸우며 바다 한 가운데를 향해 그 무거운 어망을 던지는 도상에서 축적된 어깨의 힘은 가히 도시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펀치력, 이른바 핵주먹의 힘은 어깨에서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촌놈 어부의 역동적인 어깨에서 나오는 펀치력은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의 핵주먹을 능가했을 것으로 상상된다.
영덕 촌놈 어부는 경상도 총가다이며 살인 펀치의 소유자인 꼿대의 얼굴을 향해 반사적으로 막무가내로 주먹을 날렸다. 꼿대 K는 큰 대자(大字) 모양으로 나가 떨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다. 꼿대의 카리스마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일자무식 영덕 촌놈의 무대가리 주먹 한방에 사라져버렸다. 꼿대 K는 그 날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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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허리에 찬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 빛이 나고 위력을 지닌다고 했다. 칼집에서 쉽게 뽑아든 칼은 그 순간 위력을 잃는다.
싸움 기술에 있어 탁월하고 수많은 싸움의 실전을 경험한 노련한 가다일수록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며 주머니 속에 고요히 잠재운다. 총가다는 함부로 쉽게 누구와도 싸움을 해서는 안 되며,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하는 경우에도 비록 상대가 무명이고 나약하다고 하더라도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신중하게 싸워야 하며 조심 조심 전전긍긍(戰戰兢兢) 상대를 요리 해야 하는 것이다.
“호랑이가 한 마리의 토끼를 사냥할 때에도 함부로 덮치지 않으며
아주 신중을 기해서 완전한 기회다라고 판단이 설 때 공격을 가한다”
모든 일에는 이러한 이치가 적용된다. 여하튼 총가다는 항상 겸손 해야 하고 경거망동 해서는 안 되며, 생사(生死)가 걸린 일이 아닌 한 자기 주머니 속 주먹을 함부로 사용 해서는 안 된다.
생각건대 이 세상의 어떤 분야, 어떤 부문,어떤 시간,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 있어서이든 “내가 최고야”라고 생각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경우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임자를 만나기 마련이다. 불운하게도 비극을 맛볼 수도 있다. 자기적(自己的) 카리스마(Charisma)에 빠져 있는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녀석은 반드시 임자를 만나 치명타를 입는다. 그것은 이 세상의 원리요 이치(理致)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개그(Gag)에서처럼 “학사 위에 석사 있고, 석사 위에 박사 있고, 박사 위에 도사 있고, 도사 위에 산신령(山神靈) 있다” 그러면 산신령 위에 무엇이 있을까? 그 위에는 볼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단지 이해할 뿐인 신(神)이 있다.
그대는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말을 반추하려무나!
“교만은 간질병이다.”
* 정영도 교수님과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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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 할 수 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