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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추천여행지 스크랩 한국의 정원 그 위상을 높일 201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바람흔적 추천 0 조회 64 10.10.16 21: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추분은 가을로 접어 드는 길목이다. 봄도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을만큼 좋은 계절도 없을 것이다.

계곡마다 단풍으로 수 놓아지는 철이니 이 만큼 좋은때는 없을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선한마음,착한마음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 것을 영원히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화분이 생기고, 정원이 생긴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주위 아파트나 사무실에 화분이 있고 주택에는 화단이나 정원이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최는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정원을 가꾸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하여 왔는지 세계인에게 보여 줄수있는 기회가 될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내국인에게는 우리나라에 산재해있는 정원이나 공원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될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사철이 뚜렸하여 세계어느나라보다 아름답다.

봄에는 꽃피고,여름에는 녹음우거져 산속계곡에는 개울물이 흘르고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물드니 금수강산이 된다.

겨울에 온천지가 백설로 덮여 한폭의 동양화가 되는 곳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이다.

 

정원이라는 단어는 뜰과 언덕의 합성어라고하며 ,

숙종실록에 "정원"이라는 용어가 나오는것을 볼때 우리나라의 정원의 역사도 꽤 오래되었다고 볼수있다.

기록상으로 조선시대라고 하지만 그이전 경주 안압지, 백제 궁남지 같은 아름다운 정원이 그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정원은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형태로, 적극적으로는 낙원의 모형이기도 하다.

나무, 꽃, 연못, 바위 등으로 꾸민 정원은 아름다운 자연을 소유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길들여진

자연의 질서정연함을 드러냄을 뜻하기도 한다 

소나무등 침엽수 보다 사계절 변화를 느낄수있는 활엽수를 많이  사용한 점도 한국정원의 특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5대 정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경주 안압지, 창덕궁 비원, 서울 성락원,

전남 담양 소쇄원과함께 보길도부용동(사적368호)을 꼽는다고 한다.

 

창덕궁 비원과  서울 성낙원을 나는 아직 가보질 못한곳이다. 안압지,소쇄원 ,보길도부용동은 한두번씩 다녀온 곳이라

그곳에 대해서 이야기 해본다. 

 

         1) 해남보길도 부용동 세연정

해남보길도는 땅끝마을에서 선편 이용해야 한다. 늦은 봄쯤에 가야하는데

년초에 다녀온곳이라 진면목을 볼수 없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2만8000여평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로 한번 다녀온 사람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낸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 로 피신했다.이때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1587~1671) 는 왕을 돕기 위해 수 백명

  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으나 도중에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세상볼

   면목이 없다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윤선도는  

   섬 하나에  들렸는데 그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은신처를 잡게 되었으니

                                                                     그 곳이보길도다.     

  

 격자봉 (425m)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마치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산 아래에 살림집 낙서재짓고 건너편에 독서처 로

동천석실(洞天石室) 을 지었다.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판석(굴뚝다리)으로 막아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 물 을 끌어들여 네모난 인공연못을 만든 다음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못 가운데에는 일곱 개 의 육중한 자연석을 호쾌하게 포치하여 장대한공간감을

 연출하고 동서 양쪽의 큼직한 너럭바위를 대(臺)로 삼아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

 (漁父四時司)에 맞추어 악공은 피리불고 무희는 춤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윤선도는 13년간 부용동을 가꾸어 당시엔 건물이 모두25채였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인공 섬의 배롱나무가 마지막 꽃대를 피우는 모습도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2) 자연의 아름다움 옮겨놓은것 같은곳 담양 소쇄원

 

담양소쇄원은 예전에 가족과 함께 다녀온 곳이다.

넓다란 주차장에서 내려 대나무숲을 지나면 개울에 물이 흘러 나오고

자연속에 세워진 정자가 어울러져 한폭의 그림을보는뜻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적 제304호. 중종대의 처사 양산보(梁山甫 )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화를 입자 낙향해 은거지로 꾸민 별서정원이다.

 

"소쇄"는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뜻한다.

양산보는 이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호도 소쇄옹이라 했다.

 조성시기는 1530 ~ 40년 대로 추정되며

                                                                   무등산 북쪽기슭 광주호에서 흘러내리는 자연계류를 중심으로

자연적인 비탈면의 일부를 계단 처리해 건축물과 첨경물을 배치하고, 조경 식물로 15종류의  나무와 5종류의 초화를 심은

 약1,400평의 정원이다.


 

3) 신라고도 경주 안압지

 경주 안압지는 부산과 거리가 가까워 자주가는 곳이다.

야경이 좋은 안압지이지만 휘황찬란한 안압지는 한번 밖에 보질 못했다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정원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위 치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1
문의/안내 안압지 매표소 054-772-4041

 

 4) 서울 성락원

   아직 가보지 못한곳이다  앞으로 서울 상경시 비원과 함께 둘러보기 위해 자료를 모아 보았다.

 

 성락원(城樂園)은 조선 철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간 살아 별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조선시대 민가 조원으로는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오른쪽의 작은 계곡을 내려다 보면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옛 선현들은 산과 계곡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는 바위에 무슨

  무슨 동천(洞天)이란 글을 새겨 놓는데, 이 곳의 경관이 빼어나다 보니 동천이란 

   각자(刻字)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제가 아는 곳에 동천이란 각자 바위가 있는 곳은 부암동 이다

, 백사골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 무계정사지에는 '청계동천(靑溪洞天)'이란 각자 바위가 있습니다.
성락원은 개인의 사유 재산이기도 하며 성락원은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으며,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이란 글은 성락원의 자맥을 보호하는 뜻도 있다.

 

또한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200∼300년 되는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 바깥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며, 이곳 성락원은 자연과 인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한껏 더해주고 있다.

                                                                                                                   자료출처 : 서울문화유산답사 (아전의 blog)

 

5) 서울 창덕운 비원

    서울가기가 그렇게 힘들어 아직 비원을 못가봤다.

     일부러 시간내어 여행이라는 이름을 갖고 올라가지 않으면  볼수 없을것 같다.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

 

백제 왕궁의 정원으로 알려진 부여 궁남지도 연꽃이 필무렵 아름다운 정원이다. 한국의 정원은 대부분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고 이용하는 곳이라 세계 어떤나라보다 정원이나 공원이 잘가꾸어져 있다고 할수 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하면 우리나라 정원의 아름다움이 세계인들에게  알려질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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