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촌닭
선화는 낭패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찰떡같이 약속 해놓고 못 가겠다면 어쩌란 말이냐! 오늘 여행 간다는 꿈에 들뜬 기분을 날려 보내는 것도 아깝고, 창원에서 이 먼 육호광장까지 온 발품도 억울했다.
선화는 다시 한 번 필남에게 졸랐다.
“필남아! 네 엄마에게 내 사정 얘기도 해봐라.”
“미안해. 내가 몇 번 졸랐는지 아니? 외할머니 회갑 잔치라며 손톱도 들어가지 않아.”
“그럼 진작 전화를 줘야 할 게 아냐. 난 이미 육호광장까지 왔단 말야.”
“정말 미안해! 나도 챙기느라 미처 연락할 걸 깜빡 했어.”
선화는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탁 닫았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간다. 순간,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다. 좋아, 나 혼자라도 가지 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필남이 보다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야지. 위기가 기회라더니. 아자자자! 힘내자, 송선화!
촌닭이 보였다. 촌닭은 자기가 촌닭인 줄 모른다. 바쁜 걸음으로 선화 앞으로 와서 환하게 웃는다.
“일찍 나왔네. 필남이는?”
촌닭은 담임선생님이다. 선화와 필남이만 통하는 별명이다. 그것도 선화가 지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선생님은 자기보다 필남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늘도 봐라. 필남이가 왔는지를 먼저 묻지 않는가.
“오늘 못 가겠다는데요.”
“뭐라고?!”
저런다니깐. 필남이가 가지 않는다니까 저 당황하는 모습 봐. 얼른 스마트폰으로 필남이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걸어 되는 일이라면 내가 벌써 해결했을 걸 뭐. 입을 삐쭉이며 선화는 콧방귀를 뀐다.
필남이와 전화를 끊은 촌닭은 오늘 여행을 포기하려는 얼굴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필남이가 안 간다고 여행을 그냥 둘 수 없지.
“그냥 둘이서 가요.”
“둘이서?”
선생님은 선화의 생게망게한 말에 묘한 얼굴이 되었다. 선화는 싱긋 웃었지만, 속으로는 심술이 났다. 왜 둘이 가면 선생님 호주머니 사정도 좋을 건데 뭐. 선생님과 오순도순 손도 잡고. 그런데 선생님은 오직 필남이 뿐이란 말야, 어그 필남이!
선생님은 휴대폰을 꺼내어 톡톡 두드리더니 다른 아이들에게 전화를 건다. 결과는 주희도, 인주도, 영이도 모두 갑작스런 선생님 제안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 계획이 되어 있는데 오고 싶어도 못 오지 암.
뭐가 맘대로 안 되는지 곤혹스런 얼굴의 선생님, 영락없는 촌닭이다. 시골마당 구석에만 돌다가 읍내장터에 나온 촌닭! 선화는 스스로 생각해도 별명을 참 잘 지었다.
6학년이 되어 담임 발표를 하는 순간 선화는 올해 우리 학교에 새로 들어온 선생님이 담임이라는 걸 알았다. 김억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호기심을 품고 3반 교실에 가 앉아 있어도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짜증나!
“여기가 3반 교실이구나!”
낯이 발갛게 되어 뒤늦게 나타난 선생님, 나중 들은 얘긴데 2층 4반 교실로 잘못 가서 웃음꽃이 피었단다.
인상은 순해 보여 맘이 놓였다. 선화는 무엇보다 필남이와 한반이 된 것이 좋았다. 그리고 선생님도 좋아 보이니 이사 간 곳으로 학교를 옮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그 먼 곳까지 다니겠니?”
어머니는 걱정을 했지만, 이제 1년 남은 때에 학교를 옮기기가 싫었다. 결국 지금 촌닭 같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말투에서나, 옷차림에서 촌티가 났다. 선화와 필남이는 늘 붙어살다시피 가까이 지냈다. 어느 날 큰 발견이라도 한 듯 선화가 필남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선생님은 한 달이 지나도 바지가 늘 그 바지야.”
“바지가 그 하나뿐일까?”
“사택에서 혼자 산다는데 오늘 점심시간에 한번 가 본다?”
“그래, 몰래 가 보자.”
사택은 학교 남관 건물 남쪽에 여러 채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허름한 사택을 점찍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사택은 부엌 한 칸 방 한 칸 두 칸짜리 오막살이였다. 사방을 살피다가 쪽마루로 올라가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방안을 살폈다. 선화가 호들갑을 떨며
“어이구, 선생님 잠옷이 벽에 걸려 있는데 완전히 구식이야. 필남아, 너도 와서 봐.”
필남이도 삼국시대에 입었을 법한 구닥다리 잠옷을 보았다. 등 뒤에서 선화는 쫑알거리기를
“그 잠옷도 한 달 동안 씻지 않았을 거야.”
이 소문은 아이들에게 퍼져 선생님 귀에 들어갔을 것이지만 태평이었다. 잠옷을 석 달 동안 안 씻어도 괜찮다 뭐! 이런 배짱인 것 같다.
선화는 그런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화는 늘 흉을 보며 말끝마다 톡톡 타박을 주는데도 선생님은 웃어넘겼다. 그뿐 아니라 선화를 참 좋아했다. 선화는 자기를 위해주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거다. 촌닭 같은 선생님을 왜 좋아할까?
아,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 저번 주에는 무학산에 희망하는 아이들을 모아 등반까지 하였다. 선화는 별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필남이가 간다는 바람에 같이 가게 되었다. 갔다 온 결과는 동그라미다. 올라가는 길에 추적하이킹이라며 군데군데 할 일을 써놓아 지루하지 않게 올라갔다. 가서도 재미나게 놀았다. 선생님과 한 번 더 가고 싶다. 그 뒤로 무언지 모르게 선생님은 자석처럼 선화를 끌어 당겼다.
그러던 중 선생님과 한 번 더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단 셋이.
“선생님, 내일은 어린이날인데 한 턱 쓰시죠?”
“어떻게?”
“같이 어디 여행가요.”
“부모와 같이 좋은 곳에 갈 계획이 있을 건데……”
“없어요. 필남이와 셋이 여행가요.”
“어디로?”
“표충사로 가요.”
“그 먼 곳으로? 선생님은 차도 없는데.”
“버스로 가면 돼요. 내일 육호광장에서 10시에 만납시다.”
쉽게 넘어왔다. 촌닭 선생님이라 이렇게 순진하다니까. 그 약속이 필남이 때문에 파임을 당했다. 그때 반가운 선생님의 목소리! 이게 웬 떡이냐?
“좋아! 일단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자.”
선화는 겁도 났지만, 그것보다 선생님이 허락을 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표충사까지 버스를 탔을 때는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갔다. 바깥 풍경도 볼 만하다. 답답한 시내 건물들을 벗어나자 시원한 산과 들판이 나타난다. 선화는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바깥 경치를 구경하면서 신났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기분이 좋아?”
“예, 따봉이에요.”
밀양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또 한참을 더 갔다. 산속 깊은 곳에 절이 나타났다. 선화는 선생님 뒤를 졸랑졸랑 따라갔다.
“손잡을까?”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며 팔을 내민다. 이건 선화가 먼저 제안하려 한 거다. 혼자서는 어려웠는데. 대신 선생님은 학교에서 대할 때보다 더 다정하다. 마치 아버지 같다. 선화는 스스럽게 선생님 손을 잡았다. 소양배양하고 싶다. 그런데 선생님과 단 둘이 되니 까불댈 수 없다. 말 잘 듣는 강아지마냥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졸랑졸랑 따라다녔다.
표충사는 제법 큰 절이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에도 가보고, 종각도 구경했다. 흐흐, 이 모습을 필남이가 보아야 하는데. 오늘은 선생님이 완전히 내 것이야.
선생님은 호젓한 식당에 가서 산채비빔밥도 사 주시고, 오고가는 버스표도 다 계산했다. 선화는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 된 기분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멋질 줄이야.
어라! 집으로 오는 버스는 뜻밖에 만원이었다. 다행히 일찍 버스를 탔기 때문에 선생님과 선화는 자리를 잡았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곁에 서 있으니 맘이 편하지 않았다. 얼굴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는데
“선화는 내 무릎에 앉고, 그 자리에는 이 분을 앉게 해야겠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어디 숙녀가 아저씨의 앞에 안겨 간단 말이냐.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 말에 고분고분해진다. 착한 일이니까 따라야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따님과 절에 온 모양이죠?”
“아, 예. 오늘 약속을 해서요.”
“따님이 아빠 닮아서 그런지 참 예쁘네요.”
“예쁘기는 하지만 말괄량이랍니다.”
선생님은 천연덕스럽게 옆자리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선화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이 고맙고, 그리고 미안했다. 흠, 앞으로는 선생님을 촌닭이라 절대 부르지 않겠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선화는 기분이 날아갈 듯하였다. 어머니가 보이자 곧 오늘 선생님과 단둘이 표충사까지 간 자랑을 늘어놓았다. 선화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는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뭐라고! 선생님과 단 둘이서만 갔단 말이냐? 앞으로 혼자서는 절대 따라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