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답변에 대한 대글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질문을 올리셨습니다.
교수님의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 추가로 여쭙니다. 영국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 지각들의 다발 또는 묶음에 불과하다' 라고 하여 불교의 오온과 상당히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온은 훗설이 현상학에서 이야기 하는 '경험적 자아' 라는 개념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훗설은 경험적 자아 이전에 경험적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자아'가 있다 라고 합니다. 선험적 자아는 선험적이기 때문에 경험될 수 없지만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인식주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무아는 경험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한데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 자체를 부정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의 주체, 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자, 차를 타고 있을 때 타인은 볼 수 없는 차안의 풍경을 보고 있는 자, 이런 인식주관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논의가 불가능해 지는 것 아닌가요? 어리석음이란 어떤 중생이 가진 속성이지 인식주관 없이 텅빈 우주공간이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봅니다.
(이어서) "선험적 자아(인식주관)은 경험할 수 없는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항상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공동의 관점이나 너의 관점이나 그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점"이라는 것이 바로 인식주관이고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제의 입장에서도 인식주관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달은 후에는 나의 관점이 아닌 모든 중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건가요? 불길의 비유에서 불길의 실체가 없는 것이지(진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길이 이동하는 자체는 있는 것이다(속제)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오온, 경험적 자아에 대한 비유로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은 살아있는 동안 변화 없이 고정적으로 항상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변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본 카페와 같은 다음카페의 경우, 관리자는 회원의 닉네임과 성별, 나이만 알 수 있을 뿐이고, 이름이나 이메일 주소 등 신상정보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시스템입니다. 질문에 대한 제 답변에 미진한 점이 있으면 ‘경식구민’님처럼 이렇게 다시 질문을 올리셔도 좋겠습니다.
‘경식구민’님께서 다시 질문을 올리시면서 서양철학자 ‘흄’과 ‘후설’을 거론하셨는데, 현대의 많은 불교 연구가들이 ‘흄’의 철학과 불교의 유사성에 대해 얘기합니다. 오온설도 그렇지만 인과관계에 대한 흄의 비판적 통찰 역시 <중론(中論)>의 인과론(因果論) 비판과 유사합니다. 또 후설의 현상학은 19세기에 서양 학계에서 기승을 부리던 물리주의(Physicalism)의 극복을 위한 모색이었다고 합니다.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을 창안하여 정신성에 근거하여 세계를 재구성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학문적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서양철학 가운데 불교와 유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아무 전제 없이 삶과 죽음, 인생과 세계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서양의 사상가, 과학자들을 ‘독각행자(獨覺行者)’라고 부릅니다. 불교를 모르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기에 ‘독각불(獨覺佛)’은 아니지만, ‘독각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라는 의미에서 독각행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문, 연각(독각), 보살’의 삼승(三乘)의 수행자가 모두 부처님 제자이듯이 독각행자인 동서양의 사상가, 과학자 모두 넓은 의미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익명의 불교도 - 독각행자 영산회상도’라는 현대적 탱화를 제작(유지원 作)하여 본 카페에 올려놓았는데,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7/2
‘재밋거리’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후설이 말하는 ‘선험적 자아’의 유무로 논의를 벌이면 얘기가 옆길로 새게 됩니다. 후설의 ‘선험적 자아’의 정체에 대해서 다시 여러 가지 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의 취지만 추려서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질문에서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인식주관)’를 말씀하셨는데, ‘선험적 자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불교의 무아는 경험적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한데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 자체를 부정하는지 아닌지?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의 주체, 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자, 차를 타고 있을 때 타인은 볼 수 없는 차안의 풍경을 보고 있는 자, 이런 인식주관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논의가 불가능해 지는 것 아닌가?
나는 항상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공동의 관점이나 너의 관점이나 그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점"이라는 것이 바로 인식주관이고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제의 입장에서도 인식주관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달은 후에는 나의 관점이 아닌 모든 중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건가요?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은 살아있는 동안 변화 없이 고정적으로 항상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기서 말씀하시는 ‘경험적 자아’는 ‘객관화된 자아’, ‘선험적 자아(인식주관)’는 ‘주관으로서의 자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자동차에 비유할 때, 이런 두 가지 자아의 의미가 보다 명료해질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동일한 하나의 자동차인데, 그 모습이 두 가지입니다. 왼쪽의 자동차 밖에서 본 모습과 오른쪽의 자동차 안의 운전석에서 본 모습입니다. 우리가 ‘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시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객관화 시켜서 제3자가 바라보듯이 ‘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고, 이와 달리 지금 이 순간 내가 주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그렇게 바라보는 자’로서의 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밖에서 본 자동차’처럼 나를 생각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서 바라보는 주관’으로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질문에서 “불길의 비유에서 불길의 실체가 없는 것이지(진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불길이 이동하는 자체는 있는 것이다(속제)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오온, 경험적 자아에 대한 비유로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라고 쓰셨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과 같이 ‘밖에서 본 자동차’의 모습이 ‘이동하지만(속제) 실체가 없는(진제) 불길’에 해당합니다. 사실 자동차의 경우도 속제에서는 “자동차가 이동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진제에서는 “자동차 역시 그 전체가 매 찰나 생멸하기에 매 찰나의 모습이 매 찰나의 시간대에 박혀 있을 뿐 이동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사물에 대해 이런 진제의 조망을 토로하는 저술이 승조 스님의 <물불천론(物不遷論)>입니다. <물불천론>에서는 모든 것이 찰나, 찰나 무상하기에 “이 세상 모든 사물은 발생한 그 찰나에 머물러 있을 뿐 이동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이동하지 않음(不遷)’을 통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가르칩니다. 상주(불천)를 통해 무상을 가르치는 역설적 논서가 승조의 <물불천론>입니다.]
그리고 질문 말미에서 “선험적 자아 또는 인식주관은 살아있는 동안 변화 없이 고정적으로 항상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쓰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인식주관’은 위의 자동차 그림의 우측에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운전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경식구민’님께서 제기하신 여러 가지 질문의 요점은 “인식주관으로서의 선험적 자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인데, 이는 위의 우측 그림에서 “운전석에 운전자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 자동차와 같은 모습의 ‘객관화 된 자아’는 ‘불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실체가 없습니다. 즉,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기에 무아(無我)입니다. 외부에서 본 자동차와 같은 자아가 허구라는 점은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과 같이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서 그 내부의 모습과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운전자’와 같은 ‘주관으로서의 자아’로 우리의 ‘자아관(自我觀)’이 향상합니다. 이런 자아의 관점을 ‘운전자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전자 관점’까지 ‘자아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도의 철학적 고전인 우빠니샤드에서 가르치는 아뜨만(ātman), 또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초월적 자아 등이 위의 우측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운전자’와 같은 관점을 갖는 ‘긍극적 자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설하신 부처님의 시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一切)를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으로 분류하신 것이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의 12처로 분류하신 것 모두 ‘운전자 관점’, 즉 ‘주관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또 후대 대승불교 유식학에서 가르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 역시 운전자 관점에서 이루어진 통찰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무아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찰이 범아일여(梵我一如)입니다. 범(梵)은 브라만의 음사어로 우주전체를 의미하며, 아(我)는 초월적 자아입니다. 범아일여란 온 우주를 내가 만들었다는 통찰로 외견 상, 불교의 일체유심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었다고 할 때, 마음에 해당하는 것이 아뜨만이고,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 브라만입니다. 불교 수행을 할 때는 일단 이런 통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범아일여의 통찰은 말하자면, 초월적 자아에 대한 자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통찰이 여기서 그친다면 불교와 우빠니샤드 외도(外道), 불교와 서양철학이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불교의 무아설은 범아일여의 통찰에 다다른 후, 한 걸음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통찰입니다. 범아일여의 아(我), 즉 아뜨만은 영원한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그런 아뜨만은 없다는 점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뜨만이라고 착각한 구심점 조차 무상하기에 무아라는 것이 불교의 무아설입니다. 범아일여를 거친 후 한 걸음 더 들어가야 만나는 통찰이 ‘무아’입니다.
대승불교 유식학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이 외견상 범아일여(梵我一如)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일체유심조에서 말하는 심(心)은 ‘아뜨만과 같은 영원한 마음’이 아니라 ‘찰나, 찰나 변화하는 무상한 마음’입니다.
요컨대 객관화된 자아가 허구라는 점을 자각하고서, 주관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불교수행의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런 ‘주관으로서의 자아’ 역시 무상하고 무아이기에, 그조차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런 자아조차 놓아버려야 죽을 때 편안합니다. 열반적정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훌륭한 질문에 명쾌한 답변입니다. 질문자님과 교수님의 식견에 탄식하고 가르침을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