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나가자, 학생들이여! 박차정
“네가 동맹휴학을 한 주모자지?”
박차정이 교장실에 들어서자 주재소 주임이 앉아 있다가 다짜고짜 눈알을 부라리며 물었다. 그 곁에 교장 선생님이 걱정 담긴 얼굴로 박차정을 바라본다.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당차게 마주 바라보는 박차정, 앳된 얼굴인데도 눈동자는 예사롭지 않게 빛난다.
“대답해 봐! 혼쭐이 난 뒤 말 하겠어. 엉?”
“……,”
“이봐! ‘철야’라는 글도 네가 썼지?”
“……,”
“학생이 소설을 다 쓰다니 장하기는 한데 그런 불온한 글을 쓰면 안 돼!”
“…….”
“대답 안 해도 다 알아. 너는 그만큼 문제 학생이야.”
그러면서 곁에 서 있는 교장 선생님에게 얼굴을 돌린다.
“저 여학생 출신을 알아봤는데 아주 악질 조선인의 집안이더라니까.”
“평소 학교생활은 착실한 편입니다. 공부도 잘 하고요.”
“아니요. 이런 악질 학생은 당장 퇴학시키시오.”
“우선 단단히 교육부터 시키겠습니다.”
“교장선생님만 믿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소.”
박차정!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그녀 몸에는 독립투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본 침략에 반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그리고 삼촌 박일형과 외삼촌 김두전, 김두봉, 또한 오빠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집안에서 자랐다.
박차정의 일본반대운동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1895년 호주장로교 여자선교회에서 세운 종교계 학교다. 일본의 간섭에 자유스러워 조선어·역사·지리 등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키우는데 힘을 쏟았다. 그 물결로 많은 민족 운동가를 키워내었다.
이러한 학교에 입학하니 가정에서 키워온 항일의식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차정은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알았다. 그걸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란 것도! 이를 위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에 발맞추어 일본과 싸우는 길을 찾았다. 동맹휴학! 일신여학교의 동맹휴학은 항상 박차정이 앞장섰다.
박차정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동래일신여학교의 교지 『일신』에 실은 <철야>라는 글 속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이 겪은 일이 스며든 글이다. 일본 침략군과 싸우다 잡혀 감옥에서 죽은 어떤 독립투사의 아들과 딸이 겨울밤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밤을 밝히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 밑에서 고생하는 우리 민족을 나타낸 것으로, 끝까지 싸워서 독립을 이루자는 민족 해방의 소원을 담고 있다. 박차정은 이것 말고도 시 <개구리>, 수필 <흐르는 세월> 등의 글을 교지에 실릴 정도로 문학방면에도 재질을 가졌다.
“오라버니. 신간회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뭐?! 네가 신간회에?”
“예.”
“그렇다면 목숨을 내놓는 일도 서슴지 않아야 되는데 학생 몸으로 감당 하겠느냐?”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꿈꾸어오던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장하다. 그런데 신간회 보다 근우회에 들면 어떻겠니?”
“좋습니다. 열심히 할 테니 두고 보세요.”
박차정이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더욱 불붙게 된 것은 근우회활동에서 부터였다. 근우회는 신간회와 같이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단체다. 다른 점은 단 여성들만의 모임인 것.
여기에서 여성운동이란 우리나라 현대화로 이끄는 운동이다. 예를 들면 여성의 차별 없애기, 양반 제도와 미신타파, 사람을 팔고 사지 말 것, 농촌 여인의 살림살이 돕기, 여노동자의 임금차별 없애기 및 출산 후 수당 주기 등.
박차정은 열렬한 활동에 힘입어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뽑혔다. 곧 출판과 선전 일을 맡았다. 뒤에는 아예 근우회의 아기장수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그녀의 활동은 독립운동에 더 눈부셨다. 다 같이 학교에 나가지 말자는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을 지도하였고, 11월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12월 서울에서 학생시위사건이 있었을 때 그 사건의 책임자로 붙잡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박차정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저번보다 더 큰 봉기를 하여 잠자고 있는 사람들이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싶었다.
박차정은 이번 일의 성공을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각 학교를 몰래 찾아다니며, 참가하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끼리의 연락과 시위 방법, 일본경찰에 맞서다가 피하는 행동 등을 가르치며 세밀하게 준비하였다.
여러 학교가 한꺼번에 일으킨 봉기! 드디어 제2차 시위운동이 1930년 1월 서울 여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이름 떨친 근우회운동이다.
-각 학교 학생들이여! 모두 다 같이 일어서라! 우리의 큰 함성소리에 일본 경찰이 겁을 내어 즉각 잡힌 학생들을 풀어주도록 소리 높여 힘차게 외치자!-
각 학교에 띄워 보낸 글이다. 일본경찰의 감시와 압력을 피하여 과연 얼마나 많은 학교가 참석할지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약속 시간이 되자 각 학교에서 깃발을 나부끼며 구름 같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다. 박차정은 아름차서 기쁨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화여자 고등보통학교 나가신다! 우리 학우 풀어주라.”
“숙명여자 고등보통학교 나가신다! 독립의 길 우리의 살길.”
“배화여자 고등보통학교가 뒤질소냐? 태산인들 겁내랴?”
“동덕여자 고등보통학교도 살아 있다. 잠자는 자 눈을 떠라!”
“대한독립 만세! 우리도 일어섰다. 근화여학교.”
“죄 없는 우리 학생들 풀어주라! 실천여학교.”
“나가자, 싸우자, 물리치자! 정신여학교.”
“일본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 태화여학교.”
“조선이여, 일본을 이기자! 여자미술학교.”
“구속 학생 석방하라! 경성여자상업학교.”
“우리의 소원은 대한 독립! 경성보육학교.”
이 운동에 11개 학교가 뜻을 같이하였다. 이 벌떼 같은 만세 운동에 일본 정부는 깜짝 놀랐다. 곧 관련된 신간회 간부들이 속속 잡혀 갔고, 그중 노른자 활동을 한 허정숙과 박차정은 구속되었다.
박차정은 처음 서대문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나왔지만, 1930년 2월 고향인 동래에서 다시 잡혀 서대문경찰서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세 차례의 심문 후 2월 15일 풀려나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 되었다.
“오라버니!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에서 노리고 있어요. 할 일은 많은데 답답합니다.”
“국내에선 독립운동이 어려울 게다. 차라리 여기 중국으로 오는 게 어떻겠니?”
1930년 봄 박차정은 중국에서 의열 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를 찾아 배편으로 조국을 떠났다. 망명생활이 펼쳐졌다. 그녀는 국내에서 일본과 싸운 공로가 알음으로 이미 중국까지 알려져 있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의열단 간부에 뽑혔다.
베이징에서 활약하던 중, 뜻이 같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1931년 결혼하게 된다. 잘 달린 말에 날개 달린 듯 그 바탕이 저절로 의열단의 중심인물로 우뚝 서게 했다.
“여기 베이징은 됐소. 더욱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갑시다.”
“그래요. 이곳은 이제 우리가 없더라도 일본과 잘 싸울 겁니다.”
난징으로 독립운동 터를 옮겼다. 박차정은 남편이 청년투사를 기르기 위해 세운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교관이 되었다. 여자 교관은 퍽 드문 일이다. 남자들도 힘든 일을 생무지의 염려를 딛고 몫을 톡톡히 해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박차정은 더욱 바빠졌다. 신문에 글로써, 혹은 방송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박차정은 피융! 피융! 총알이 오고가는 전투에도 참여했다. 아, 장하다! 여성으로서 적을 코앞에 두고 총칼로 싸운 독립투사가 몇이나 되리오. 1939년 2월 치열했던 장시 성 쿤륜산 전투 중에 일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크게 다쳤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자 상처는 날이 갈수록 도져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암만해도 저는 조국이 해방되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힘내요. 곧 해방이 됩니다. 그때는 조국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삽시다.”
남편의 간호와 위로에도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5월 27일 중국 충칭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박차정은 꽃다운 나이 34세였다.